# 305
리그너스 대륙전기 305
알르드가 바라테이온을 공격했다는 소문은 빠르게 주변 왕국으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그 소문을 믿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최근 알르드의 위세가 맹렬하기는 했지만 상대는 군사 강국인 바라테이온이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허무맹랑한 정보로 생각하며 피식 웃던 영주들은 정말로 바라테이온의 국경 도시 중 하나인 치니코프 영지가 호의 손에 함락되었다는 정보가 연달아서 날아오자 그제야 화들짝 놀라며 사태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는 팔 왕국, 아니, 이제는 칠 왕국이 되어버린 인간들의 중심 국가 골든 크로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알르드는 정말로 바라테이온과 부딪칠 생각인가?”
기사왕 이레네 아르티아가 옥좌위로 자신의 손가락을 두드리며 주위의 영웅들을 바라보았다.
조용한 대전 위로 손가락과 옥좌가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딱딱거리는 소리가 묘한 리듬을 타고 울려 퍼졌다. 그리고 재상 그나이 칼츠만이 앞으로 나섰다.
“제가 아는 알르드의 패자는 계산과 사리에 굉장히 밝은 인물입니다. 그가 바라테이온을 공격했다면 분명 그 이유가 있을 겁니다. 아니면 블루 스케일을 도와주는 대가로 무슨 이득이라도 취하려고 하겠죠.”
“블루 스케일의 멍청한 귀족들의 영토를 푼돈으로 차지한 것처럼?”
“그렇습니다. 그리고 윤 호는 바라테이온 보다 블루 스케일을 노리고 있을 가능성이 더욱 높습니다. 알르드가 본격적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기에는 그들의 지리적인 상황을 놓고 봤을 때 큰 무리가 있기 때문이죠. 게다가 수인 왕국이 뒤를 위협하고 있는 형편이죠. 또한 천족들의 움직임도 조심해야 합니다. 이리저리 적들이 많은 상황이죠.”
그나이 칼츠만의 말에 기사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알르드가 전쟁을 벌이기 위해서는 블루 스케일의 영토를 관통하는 보급로를 만들어야 했다. 어마어마한 시간은 물론이고 물자의 수송 역시 비효율적으로 변할 게 분명했다.
특히나 마장기의 정비가 굉장히 어려워질 터였다. 여타 적대국의 움직임 또한 주시할 필요가 있었다.
“사자 싸움에 끼어든 토끼와 같은 신세로군. 세이라도 힘들겠어.”
이레네 아르티아가 자신의 사촌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나이 칼츠만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이번 전쟁은 바라테이온의 억지로 인해 시작된 전쟁입니다. 늙은 사자처럼 간교한 패트릭 바라테이온의 의중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지만 바라테이온의 움직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정말로 블루 스케일을 점령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바라테이온이 어째서 동맹이나 다름없는 블루 스케일을 공격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조사가 한창이었다.
그리고 정보부를 맡고 있는 그나이 칼츠만은 그 이유를 마장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최근 바라테이온과 상업 왕국의 교류가 심상치 않은데다가 블루 스케일에는 마장기의 제작에 필수적인 특산품인 휴머니온 합금을 포함해 해양석, 마정석이 생산되고 있었다.
“결국 이번 전쟁은 블루 스케일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한 바라테이온과 알르드의 힘 싸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자기사단이 출동했다고 들었다.”
“그렇습니다. 정보원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사자기사단의 존재는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다만, 치니코프 공방전 때 사자기사단은 직접적으로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주변의 영지로 모습을 감춘 듯 보입니다.”
“이유는 무엇이지?”
“아무래도 직접적으로 알르드의 강군을 맞상대하는 것을 피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게다가 뻔히 드러난 알르드의 약점을 이용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사자기사단의 단장인 레오는 멍청한 녀석이 아니다. 보급로를 끊으려는 생각이 분명해.”
이레네 아르티아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무리 SSS 랭크의 병사와 강력한 마장기가 있다 할지라도 보급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알르드의 움직임은 어떻지?”
혹시 자신들의 정예 전력을 믿고 바라테이온의 영토 안으로 진격해 들어갔으면 크게 고생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상대는 골든 크로우와 함께 칠 왕국의 군사 강국으로 소문난 국가였다.
다행일까? 그나이 칼츠만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치니코프 성을 점령한 알르드는 현재 영지에 눌러 앉아 보급로를 확대하고 있다고 합니다.”
“호오……. 거점을 만들려는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임시 거점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치니코프 영지에는 어마어마한 자금과 인력이 투자되고 있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호와 알르드의 움직임은 자신들의 수도를 이전해 올 기세였다.
“그래서 우리들의 입장은?”
“당연히 중재를 해야 하지만…….”
이레네 아르티아를 보며 그나이 칼츠만은 말끝을 흐렸다. 그쪽에 신경을 쓰기에는 골든 크로우 역시 산재한 문제가 굉장히 많았다. 게다가 천족의 10 천사 중 둘이 포함된 천족의 군대가 곧 골든 크로우를 공격할거라는 소문이 팽배해 있었다.
* * *
“목재.”
“디아린 상단의 도움을 받아 163 개의 수송 부대가 수송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치니코프에는 19 만 상자의 목재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석재는?”
“역시나 마찬가지로 215 개의 수송 부대가 수송 중입니다. 영지에는 11만 5천 상자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돋보이는 외알 안경으로 인해 지성미가 넘치게끔 보이는 견인 영웅 로우덴을 향해 그의 부관이자 심시티의 팀원 중 하나인 마족 영웅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런 두 영웅을 보며 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 성벽의 수리와 방어 시설의 건설은…….”
“문제없습니다. 멍멍. 영주님. 우리 심시티의 능력이라면 이런 영지를 환골탈태 시키는 것쯤은 일도 아닙니다. 그렇지?”
“그, 그렇죠. 음뭐어.”
로우덴의 부관이자 미노타우르스 종족인 마족 영웅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고는 주위를 둘러보며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성벽을 포함해 각종 방어 시설 거기에 이제르론까지 완공시키려면 최소한 두어 달 이상은 철야에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어쨌든 이 모든 것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영지의 복구를 위해 들어가는 자재는 공짜로 생겨나는 곳이 아니니 말이었다.
“벨로 하여금 디아린 상단을 통해 자재를 구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자세한 사항은 벨과 이야기를 해 봐.”
“괜찮습니다. 림드 산맥의 경제력이라면 충분할 겁니다. 멍멍. 다만, 공사에 필요한 인부들이 부족합니다.”
“그건 어쩔 수 없지. 실버 문들을 지원해 줄게.”
“실버 문.”
호의 말에 마족 영웅이 살짝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알르드의 이름 아래에 함께 한다 하더라도 수백 년 간이나 서로를 적대했던 종족이었다. 함께 무언가를 하는 것이 꺼려지는 건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로우덴의 말대로 당장 공사에 투입시킬 인부가 부족한 건 사실이었다.
깡! 깡! 카앙!
“이건 B구역으로, 저건 E구역으로 옮겨!”
“자재는 어디 있나?!”
“어이! 그거 조심히 다뤄! 마정석이 부딪쳐서 폭발하면 큰 사고가 벌어진다고!”
“전방주시! 좌우확인! 안전무게! 안전높이! 무재해로 나가자! 좋아! 좋아! 좋아!”
심시티의 도착과 함께 잠시 멈췄던 영지의 공사가 재개되었다. 순식간에 영지를 탈바꿈시킨다는 심시티는 위명은 거짓이 아니었다.
다 부서진 치니코프 영지의 시설 및 건물들이 심시티에 속한 영웅들의 환상적인 작업 능력에 영향을 받아 빠른 속도로 올라가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 둘씩 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저 녀석도 쓸 만하네. 머리만 좋은 줄 알았는데, 작업 효율도 엄청난 데?”
팀 심시티의 활약에 놀란 브로리가 감탄을 담아 말했다.
“그래도 SS등급의 영웅이야. 우리 왕국에서는 너 다음으로 등급이 높은 녀석이라고.”
“그래도 전쟁에서는 별 쓸모가 없잖아?”
“……싸움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건 아니지.”
호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 브로리의 이마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그런 호의 행동에 기분이 나빠진 브로리가 입을 벌려 호의 손가락을 앙 하고 깨물려고 했다. 그리고 호의 옆에 서있던 한시진이 말했다.
“치니코프 영지가 점점 발전하는 건 좋은데, 바라테이온이 조용한 게 영 불안하네요.”
“사자기사단의 움직임은? 따로 보고된 건 없어?”
“일단 그들이 처음 발견되었던 란틴 산맥으로 실버 문과 브뤼헤아 비쉬를 정찰부대로 편성해 보내기는 했어요. 하지만 따로 보고가 들어온 것은 없어요.”
“아무래도 숨은 모양인데…….”
문제는 치니코프 영지의 주변이 전부 바라테이온의 세력권이라는 점이었다.
사자기사단의 규모가 그리 작은 편은 아니지만 그들이 숨을 수 있는 곳 차고도 넘쳤다. 그런 두 남녀의 대화에 브로리가 한시진을 바라보다가 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자기사단이라는 녀석들이 나타날 때까지 이곳에서 계속해서 머물러야 하는 것이냐?”
“뭐, 그렇지. 겸사겸사 보급로도 만들고.”
“으으.”
자신의 말에 벌써부터 좀이 쑤시는지 어깨를 부르르 떠는 브로리를 보며 호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치니코프 영지의 방어와 보급로가 이어지기 전까지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호는 보급 없이 전쟁을 치르는 게 얼마나 무모한 행동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치니코프 영지에 집중되는 바라테이온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 주변을 들쑤셔 놓을 필요성은 있어 보였다. 하지만 일단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호의 눈동자가 영지의 중심부에 배치되어 있는 마장기 보관고로 향했다. 저번 전투에서 느낀 것이지만 라이온레인을 움직이는 마장기사들에게는 훈련이 필요했다.
완전히 못 써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라이온레인의 진가를 위해서라면 좀 더 마장기의 숙련도를 높일 필요성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는 브로리와 한시진이라는 뛰어난 교관이 둘이나 있었다.
“눈으로 보지 말고 몸으로 움직이라고! 이 바보들아! 너희같이 덜떨어진 녀석들이 상대의 공격을 눈으로 보고 피할 수나 있을 것 같아?!”
“있는 힘을 다해 마력을 끌어 올리세요! 지금 뭐하는 거예욧! 고작 그 정도의 의지로 A등급 마장기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침을 튀기며 고함을 지르는 두 여인의 강도 높은 훈련에 라이온레인의 오너들은 악 소리를 내며 하루하루를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이 주 뒤, 치니코프 영지에서 두 개의 마장기 편대가 출진했다. 호와 한시진이 포함된 라이온레인 편대와 브로리를 주축으로 라쿤, 팔쿤, 사드나인으로 이루어진 전설급 마장기 편대였다.
“그럼 여기서 헤어지자. 우리는 북쪽으로 갈게.”
“나는 서쪽에 있는 라우드 영지를 뒤엎고 오면 되는 거지?”
“그래. 마정석의 보급도 있으니까 무리할 필요는 없어. 그냥 이, 삼일 정도만 뒤집으면 될 거야. 행여나 바라테이온의 군대가 나타나면 전면전은 무조건 피하고.”
A등급 마장기의 위력이 아무리 대단하다 하더라도 쪽수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었다. 게다가 동력원에 장착되어 있는 마정석의 마나가 떨어지면 아무리 강력한 마장기가 하더라도 고철이나 다름없었다.
“그 정도야 걱정 말라고.”
마치 자신을 모자란 애 취급 하는 호의 행동에 브로리가 툴툴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알르드의 별동대가 바라테이온의 국경을 뒤집기 시작했다.
* * *
쾅! 콰아아앙!
“무, 무슨 소리냐!”
블루 스케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바라테이온의 영지, 코른을 다스리는 영웅이 폭발 소리를 듣고는 벌떡 침상 위에서 튀어나왔다.
그리고 발코니를 통해 영지를 내려다보는 순간 그는 병사의 보고를 받기도 전에 무슨 상황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적습! 적습이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붉은색으로 도색된 마장기들이 영지를 공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정체를 짐작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현재 바라테이온과 적대 관계에 있는 세력은 알르드 밖에 없었다.
“영주님! 지시를!!”
“당장 마장기 편대를 준비해라!”
영주의 지시는 빠르고 정확했다. 그리고 성에 배치되어 있던 마장기들이 하나둘씩 영지를 습격한 적들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나타나는군! 자, 실전이다!”
통신구를 통해 뒤에 있는 라이온레인의 영웅들을 향해 한마디를 날려준 호는 입술을 빠르게 훑으며 조종간을 움직였다.
그리고 라이온레인의 무기중 하나인 마나 건이 발사되면서 정면에서 달려드는 적의 마장기 중 가장 앞에 있던 녀석을 명중시켰다.
“크윽! 이 거리에서 맞췄다고?!”
“에이스급 오너다! 모두들 커다란 건물을 엄폐물로 삼는다!”
편대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바라테이온 마장기사들이 거리낌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레 사격전이 벌어질 테고 그 여파로 인해 영지민들의 피해가 급격하게 늘어날 터였다. 하지만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상대는…….
“우리의 주력 기체가 라이온레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건물을 엄폐물로 삼는다고? 바보 아니야?”
호의 전용기인 라이온레인–플레임이 자신의 어깨를 활짝 펼쳤다. 그리고 딸칵 하는 소리와 함께 튀어나온 마력 폭탄들이 호의 마나와 상응하면서 앞으로 튀어나가기 시작했다.
펑! 퍼퍼퍼펑!
커다란 폭발이 일어나면서 건물 뒤로 숨은 마장기들이 건물과 함께 지면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오너의 마나와 상응해 유도탄처럼 움직이는 마력 폭탄은 단순히 엄폐물 뒤에 숨었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의 A등급 마장기, 라이온레인의 무서운 점이었다.
‘뭐, 파훼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 리그너스 대륙은 라이온레인을 주력으로 생산할 정도로 경제 및 기술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당연히 라이온레인을 상대로 하는 전투 역시 경험 했을 리 없었다. 그리고 이는 아군에게 엄청난 장점으로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