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1
리그너스 대륙전기 291
“여신 라헬이 말했던 대로 소환자들은 정말로 창조신의 권능을 이어받은 존재일까요?”
이레네 아르티아의 물음에 골든 크로우의 재상 그나이 칼츠만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폐하. 창조신의 권능은 이보다 더욱 대단한 것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알르드의 주인인 윤호가 다른 소환자들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인물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렇군요. 아무리 소환자가 무능하다 하더라도 그들에게도 영웅이라 불리는 존재는 있을 테니까요.”
이레네 아르티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라이온레인의 등장은 앞으로의 세력도에 큰 변화를 만들어 낼 게 틀림없었다.
“라이온레인. 우리가 구입할 수는 없겠죠?”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그나이 칼츠만이 입을 열었다. A등급 마장기는 군사적으로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병기였다. 그에 투자된 기술력과 자금을 생각하면 굉장히 많은 것을 대가로 내어놓아야만 할 것 같았다. 그것도 알르드에서 라이온레인을 판매한다는 조건에서였다.
골든 크로우의 내정 전반을 맡고 있는 재상의 답변에 이레네 아르티아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고, 그 모습을 보며 그나이 칼츠만은 자신이 모시는 여왕이 지닌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
“알르드의 도움으로 인해 상황이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골든 크로우는 많은 적들의 위협 속에 놓여 있습니다. 이 위협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강력한 무기가 필요합니다. 라이온레인과 같이 우리 인간들만이 다룰 수 있는 마장기가 말이죠.”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기사의 여왕이라 불리는 여인의 말을 들으며 그나이 칼츠만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알르드의 인맥들을 떠올렸다. 알르드 내에서 중책을 맡고 있는 로우덴 셰필드나 디아린 상단주라면 라이온레인의 구매 건에 관해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문제가 있다면 라이온레인을 구매하는 대가로 자신들이 내놓을 수 있을 만 한 카드였다. 안타깝게도 골든 크로우가 제시할 수 있는 매력적인 카드는 몇 장 되지 않아 보였다. 그렇게 몇 개의 생각을 떠올린 그나이 칼츠만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자신의 여왕을 향해 말했다. 며칠 전, 알르드의 인맥을 통해 들었던 소식이 기억나고 있었다.
“마침 알르드에서 건국식이 열린다고 하더군요. 제가 직접 가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림드 산맥을 중심으로 세워졌던 소환자 윤호의 세력은 어느새 그 주변의 영토들을 아우르며 뻗어나갔고, 지금은 다른 인간들의 왕국들과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
충분히 하나의 왕국이라고 칭할 수 있을 정도였기에, 알르드가 건국한다는 것에 대해 이상함을 느끼는 세력은 없었다. 수인 왕국과 바라테이온, 아이리스 성국 정도가 불만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단지 불만에 그칠 뿐이었다. 적어도 알르드는 그들에 밀리지 않는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건국식? 알르드에서 건국을 선포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자신들끼리 조용히 치른다고 하더군요.”
“흐음. 그들이 차지한 영토가 벌써 열 개나 되었군요.”
그나이 칼츠만의 대답에 이레네 아르티아의 얼굴에 호기심이 나타났다. 그녀의 발 앞꿈치가 바닥을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 * *
취이이익!
붉은색 갑주로 무장한 커다란 마장기에서 타들어가는 냄새와 함께 검은색의 연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무기에 당한 모양인지 장갑 여기저기가 찢겨진 모습으로 전신을 도배한 마장기는 한 쪽 무릎을 땅바닥에 대고 있는 모양이었다.
“후우. 역시 SS등급은 다르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호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전투의 여파 때문에 몸이 부서질 듯 아파오고 있었다.
“흥! 당연하지!”
호의 혼잣말을 들은 모양인지 통신구를 통해 브로리의 코웃음을 들려왔다. 기쁨이 잔뜩 묻어 있는 것 같은 코웃음을 뒤로한 채 호는 정면의 카메라를 통해 브로리의 전용기인 코우랄라의 모습을 바라봤다.
자신이 탑승한 마장기와 마찬가지로 코우랄라의 상태 역시 멀쩡하지 않았다. 팔 한 짝은 어디론가 날아가고 없었고, 동체 곳곳에서는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전부 호의 작품이었다. 그렇게 자신이 만들어낸 모습을 감상하던 호가 조종간의 버튼 중 하나를 찾아서 눌렀다.
기이잉!
조종석이 열리면서 매캐한 냄새가 코로 밀려 들어왔다. 마나까지 사용하며 치른 대련이었던 탓에 주변이 엉망이었다.
“쳇. 감이 녹슬었나.”
호가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실전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격렬했던 대련은 자신의 패배였다.
조종석과 지면까지는 제법 높이가 있었지만 몸을 날려 멋들어지게 땅에 착지를 한 호는 고개를 들어 방금 전까지 자신이 탑승했던 붉은색의 마장기를 바라보았다. 인간의 A등급 마장기인 라이온레인. 호가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던 주력 마장기였다.
인간의 영웅으로 엔딩을 봤던 만큼 호는 자연스레 인간들의 최종 테크 병기인 라이온레인을 전용기로 사용했었다. 그런 추억이 담긴 라이온레인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에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고, 옛날의 추억을 떠올리며 라이온레인을 움직이던 도중 브로리가 대련을 신청한 것이다.
“잡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상대는 무력 수치 1000 에 가까운 SS등급 영웅. 거기에 수인의 전설급 마장기를 전용기로 보유하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라이온레인에 탑승한 호는 내심 자신의 승리를 예상하고 있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가상현실 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악랄한 난이도를 지닌 게임의 엔딩, 그것도 진 엔딩을 봤던 호에게 있어 마장기는 눈을 감고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다뤄봤던 병기였다.
그만큼 라이온레인의 조종술에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역시 브로리는 브로리였다. 호각에 가까운 대련은 결국 그녀의 승리로 끝이 난 것이다.
“제법이기는 한데, 이 몸을 당해내려면 아직 멀었다고.”
어느새 다가왔는지 브로리가 어깨를 으스대며 말했다. 이번 대련에서 승리한 게 어지간히 기쁜 모양이었다.
“한 끗 차이였어.”
“그 한 끗이 전장에서는 생사를 가르기도 하지.”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호는 쩝하고 입맛을 다셨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SS등급으로의 승급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신체능력과 반사 신경이 조금만 더 높았어도 충분히 이길 수 있는 대련이었다. 게다가 라이온레인을 다룬 것도 오랜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승급만큼이나 중요한 것들이 산재해 있었다. 그중 호가 가장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 바로 영웅들의 승급이었다.
‘폭풍 바람의 신전만 공략하면 되는데.’
호의 눈동자가 브로리에게 향했다. 시간이 제법 걸리긴 했지만 호는 브로리의 SSS 승급에 필요한 아이템 중 하나를 제외하고 전부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남은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폭풍 바람의 신전이라는 SS등급의 던전을 공략해야만 얻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게 쉽지 않단 말이지.”
관우는 내 여자의 공략본에 따르면 폭풍바람의 신전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A등급 마장기가 열기 가량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뿐인가? 추가로 획득한 정보에는 마장기의 오너들이 S등급은 되어야 공략이 수월하다고 했다.
‘현재까지 완성된 라이온레인의 수는 네 기.’
호는 대련의 여파로 인해 반파 수준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두 기의 마장기를 경악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기술자들을 지켜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A등급 마장기인 만큼 라이온레인의 생산은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래도 특성화로 인해 발전된 도시 덕분인지 자신의 예상보다는 생산 속도가 빨랐다. 도시의 모든 생산력을 총동원하면 이 주에 한 대씩 생산이 가능했다.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 내에서 A등급 마장기의 생산에는 평균 약 두 달 가량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을 생각하면 특성화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어쨌든 이렇게 생산되는 라이온레인과 수인족의 전설급 마장기를 포함하면 조만간 폭풍바람의 신전 공략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능숙하게 마장기를 다룰 수 있는 오너들이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서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슬슬 공략에 관한 훈련은 진행해야겠네.”
SS등급의 던전답게 폭풍 바람의 신전에 등장하는 몬스터들은 굉장히 강력했다. 특히 보스급 몬스터들은 각 종족의 수장과 비교될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괜히 A등급 마장기가 다수 필요한 게 아니었다.
애당초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끝을 바라보는 유저들의 도전정신을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설계된 컨텐츠였다. 클리어 보상 역시 플레이어에게 크게 도움이 될 만한 것들로만 구성이 되어 있었다. 그런 만큼 이 이상한 세계에서도 그 위험성이 어디가지는 않을 터였다. 이미 최상위 던전의 위험성은 블루스케일의 수도인 스완 근처에 위치한 하늘의 궁전을 통해 뼈저리게 느꼈었다.
“훈련? 그게 무슨 소리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호와 나란히 걷던 브로리가 귀를 쫑긋 세우며 물었다.
“던전을 공략할 생각이다.”
“던전? 고작 던전을 공략하는 데 훈련이 따로 필요한가?”
브로리가 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호의 휘하에 있는 병사들의 강력함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까닭에 그녀의 눈동자에는 의아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SSS랭크의 병사들과 마장기만 있다면 이 대륙에 자리 잡고 있는 던전들은 가뿐하게 클리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던전을 클리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 우리가 공략한 던전은 평범한 던전이 아니거든.”
브로리를 향해 호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기억 속에 있는 최상위 던전들의 공략 경험을 떠올렸다. 몇 개의 힘겨웠던 전투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자 호의 입에서 자연스레 한숨이 흘러나왔다.
SS등급 던전의 공략은 진 엔딩을 본 호도 몇 번 밖에 경험하지 않은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앤드 컨텐츠였다. 가상현실게임에서는 굳이 고 난이도 등급의 던전을 공략하지 않아도 엔딩을 보는 데 무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리그너스 대륙전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존재들이 점점 등장하고 있는 상황. 그들에 대한 대비를 해야 했다.
‘인피니티 나인.’
그들은 칠제와 대립하는 존재이자 루베릭 대륙의 지배자라 불리는 파신들의 뜻을 따르는 병사들이었다. 호가 양성할 수 있는 병종 중 하나인 썬더 퓨리가 그런 인피니티 나인 중 하나였다. 무려 EX등급으로 나타나 있는 썬더 퓨리는 정보에 따르면 강력함이 A등급의 마장기를 뛰어넘는다고까지 나와 있었다.
고작 병사들이 리그너스 대륙의 최종 병기나 다름없는 A등급의 마장기를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은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한 경험이 있는 호에게는 쉬이 믿기 힘든 내용이었다. 실제로 그들이 그렇게나 강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다면 리그너스 대륙은 이미 파신들이 차지했을 터였다. 아니면 강한 힘에 따른 제약이 있을 거라는 게 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인피니티 나인과 파신이 리그너스 대륙을 노리고 있고, 만만히 볼 수 없는 적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그런 인피니티 나인과 파신들은 리그너스 대륙을 지배하는 각 종족들과는 철전지 원수 관계였다.
“평범한 던전이 아니다? 대체 어떤 던전을 공략하려고?”
“폭풍 바람의 신전.”
“폭풍 바람의 신전?”
곧 브로리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많은 던전을 성공적으로 공략한 경험이 있는 그녀였지만, 호가 말한 던전의 이름은 들어본 기억이 없던 탓이다. 설령 어디선가 들었다 하더라도 던전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는 영웅인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골든 크로우에 있는 던전이야. 그들의 영토 최북단에 자리 잡고 있는 커다란 탑이지.”
“골든 크로우라. 굉장히 멀리 가야되는군. 뭐, 다른 종족의 영토에 위치한 던전 공략을 처음 하는 것도 아니니. 분명 무슨 이유가 있는 거겠지?”
“음. 허리케인 글러브라고, 폭풍바람의 신전에서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 필요해.”
“허리케인 글러브……?”
호의 대답에 브로리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몇 번이나 허리케인 글러브라는 단어를 웅얼거렸다.
만약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한 경험이 있는 눈치 빠른 플레이어라면 브로리가 보여주는 지금의 어색한 모습에서 허리케인 글러브가 브로리와 어떠한 연관이 있는 아이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터였다.
호 역시 공략본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미 허리케인 글러브가 브로리의 승급에 필요한 아이템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