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0
리그너스 대륙전기 290
“에, 엘프잖아?! 엘프의 병사들이 어째서?”
“실버 문? 엘프가 아니야. 알르드의 군주 윤호의 병사들이라고.”
“그들이 왜 레진에? 설마 또 전쟁이 벌어진 건가?”
레진의 영지민들은 자신들의 영지로 들어오는 윤호군의 병사를 보며 의아한 모습을 보였다.
며칠 전, 레진을 다스리는 뚱뚱보 귀족이 병사와 용병들을 긁어모아 출진했던 사실이 떠오른 백성들은 혹시 모를 전쟁의 불안함에 몸을 떨었지만 그 뚱뚱보 귀족이 실버 문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대외적으로 알라드와 블루 스케일은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어, 어어?!”
“카스트 자작의 깃발?”
하지만 영주성에 걸려있던 뚱뚱보 귀족의 깃발이 끌어 내려지고 알르드의 문장이 펄럭이는 순간 모두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영주성으로 달렸다. 그렇게 우르르 몰려든 영지민들의 질문이 관리들을 향해 날아들었지만 레진의 관리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낸들 아나?”
그들 역시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주성의 깃발을 끌어내렸던 실버문의 대장을 만난 그들은 빠르게 자신이 알아낸 정보들을 영지민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며칠 전, 윤호군과 토르니 공작이 이끄는 귀족들과의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토르니 공작의 귀족군은 대패, 살아남은 귀족들은 바라테이온으로 도망을 쳤다고 합니다!”
“피그펫 자작님은 전쟁에서 사망했습니다!”
“앞으로 쿠투스 평원의 도시 레진은 알르드에 귀속됩니다!”
갑작스런 소식에 모두들 멍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영지의 주인이 바뀌었다고 해서 실망을 하거나 분노에 찬 모습을 보이는 이는 찾아볼 수 없었다. 레진을 다스리던 뚱뚱보 귀족, 피그펫 자작은 빈말이라고 해도 좋은 영주라고 말할 수 있는 귀족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토르니 공작의 측근이기도 한 그는 영지의 정상화와 발전보다는 수탈에 더욱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일까? 영지민들은 뚱뚱보 귀족의 행방보다는 알르드가 자신들을 다스린다는 소식에 관심을 보일 뿐이었다.
“알르드라면……?!”
“우리도 카틀라스 항구처럼 변할 수 있는 건가?”
몇몇 영지민들이 선망과 기대에 찬 눈빛을 보였다. 블루 스케일이 자랑하던 항구도시였지만 전쟁 이후 폐허가 된 에레브의 카틀라스 항구를 알르드가 큰돈을 들여 구입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여행자들을 통해 들려온 소문에 의하면 폐허가 되었던 카틀라스 항구는 급속도로 발전을 거듭해 예전의 성세를 뛰어넘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고 했다.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식량을 얻지 못해 굶어 죽는 사람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레진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다.
“글쎄? 쿠투스 평원은 림드 산맥하고 너무 멀지 않아?”
“림드 산맥이야 원래 그들의 땅이라지만 우리는 아니잖아? 전쟁이 일어났다면 또 다시 빼앗길지도 모를 텐데 결국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야.”
하지만 계속된 고난에 지친 탓인지 회의감을 보이는 이들도 없지는 않았다. 땅을 빼앗긴 블루 스케일이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게 영주성 앞으로 모여든 영지민들이 어떤 상황인지를 깨닫고는 다시 자신들의 자리로 되돌아 갈 때였다.
“어어……?”
영주성의 문이 열리며 한 인물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깔끔한 옷을 입고 있는 어린 소녀였지만 소녀를 바라보던 레진의 영지민들은 모두들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뒤로 시립해 있는 실버 문들이 그녀의 위상을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흐응.”
그리고 브로리는 주위를 둘러보며 이마를 찌푸렸다. 영주성에 몰려든 영지민들은 한눈에 봐도 다들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옷은 금방이라도 헤질 것처럼 낡아 있었고, 움푹 들어간 눈과 홀쭉해진 뺨은 그들이 오랜 시간 동안 굶주림과 싸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녀석을 잡아서 지금의 이 꼬라지를 보여줬어야 하는데.”
“앞을 가로막는 귀족들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브로리의 말에 화려한 휘장을 달고 있는 실버문이 대답했다. 그녀가 말한 인물이 누구인지를 예상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앞 선 전투에서 귀족들의 구심점이라 할 수 있는 토르니 공작은 브로리의 맹공에도 불구하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바라테이온으로 도망을 쳤다.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마장기사들이 목숨을 도외시하고 달려든 탓에 한 끗 차이로 놓친 것이다.
“식량은 충분하지?”
“많지는 않습니다만 영지민들에게 나눠줄 정도의 양은 보유하고 있습니다.”
“림드 산맥에 도움을 요청하고 일단 나눠주도록 해.”
브로리의 명령에 실버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식량이 아깝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앞으로 이들은 알르드의 이름으로 자신들과 함께할 영지민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일은 레진 뿐 아니라 쿠투스 평원의 모든 도시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결국 세 개의 영토가 알르드 쪽으로 넘어갔군요.”
“소, 송구합니다. 폐하.”
스완에 위치한 왕성의 회의장에서 블루 스케일의 대 귀족 스퀴드 수운다 백작이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다른 귀족들도 비슷한 모습이었다. 결국 알르드는 자신들이 말 한 대로 귀족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고, 압도적으로 승리를 거뒀다. 그러고는 귀족들의 채무 변제를 대가로 그들의 땅에 자신들의 깃발을 꽂아 넣었다.
“후우.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스퀴드 수운다 백작을 상대로 힘없이 미소를 지어보인 세이라 클리퍼드는 군데군데 자리들이 비어져 있는 왕성의 회의장을 눈에 담았다. 과거 귀족파라 불리던 귀족들의 자리들이었다.
‘비록 영토 세 개는 잃었지만.’
이 나라의 적폐나 다름없었던 무능한 귀족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것도 자신들의 피는 하나도 흘리지 않은 채 말이다. 알르드의 손에 넘어간 땅의 면적이 작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귀족들의 반발로 인해 자신의 명령이 통하지 않던 땅이었다. 그에 반해 불만은 어찌나 많은지 그 불만을 무마시키기 위해 들어간 세금 또한 엄청났다.
“에레브, 바르시온, 쿠투스 평원에 들어가던 자금 지원을 중단하도록 하겠습니다.”
세이라 클리퍼드의 명령에 귀족들은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그 세 영토는 블루 스케일이 아닌 다른 나라의 영토였다.
“그리고 그 돈들은 전부 마장기 및 병력의 개발에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알르드에게 골드 이글과 자넷의 구입 의뢰를 넣도록 하지요.”
“으음…….”
“알르드에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귀족들의 반문에 세이라 클리퍼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상황에서 자신들에게 마장기를 적당한 가격에 판매해 줄 국가는 마장기의 세대교체에 들어가고 있는 알르드 밖에 없었다. 비록 그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세이라 클리퍼드는 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자존심을 굽힐 생각이 있었다.
* * *
“한 대당 1억 3500만 리스를 지불한다면 판매해주도록 하세요.”
“적당한 가격이기는 한데, 그들의 입장을 생각하면 좀 더 불러도 괜찮을 텐데요?”
현재 블루 스케일은 자체적으로 C등급 마장기를 생산하는 게 불가능했다. 기술은 있었지만 제작에 필요한 특산품을 구매할 수 있는 루트가 없었다. 그렇게 의뭉스러운 표정을 짓는 디아린을 향해 아스트리드 벨이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가 블루 스케일이 구입 의사를 철회하면 곤란하거든요.”
“곤란하다?”
“네. C등급 마장기의 생산 원가는 1억 1000만 리스로 알고 있어요.”
“정확히 말하면 1억 1120만 리스입니다.”
상인답게 디아린이 정확한 가격을 입을 올렸다.
“뭐, 사소한 것은 그냥 넘어가자고요. 어쨌든 새 제품도 아닌 중고품을 1억 3500만에 넘길 수 있다면 충분히 남는 장사 아닌가요?”
“그렇긴 하죠…….”
디아린은 말끝을 흐렸다. 아스트리드 벨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뭔가 아쉬운 느낌이었다. 블루스케일의 상황을 생각하면 최대 1억 5000만 리스까지는 받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괜히 무리수를 둘 필요는 없어요. 다른 종족의 마장기라면 모를까, 자넷 급과 골드 이글 급 마장기들은 이제 일선에서 물러날 때가 되었거든요. 필요 없는 건 적당한 가격에 빨리 정리하는 게 좋죠.”
벨의 말에 디아린은 날카로운 눈매를 드러내었다. 방금 전 그녀가 했던 말을 허투루 넘길 수 없었던 탓이었다.
“일선에서 물러난다? 설마 그것의 개발이 완료가 된 건가요?”
“아뇨. 하지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아요. 며칠 전, 엘 브릭의 연구팀과 드워프들이 완성시킨 시제품의 시험 가동 모습을 보고 왔어요.”
“시험 가동이라……. 성공적이었나요?”
“물론입니다. 수많은 돈과 시간이 투입된 연구입니다. 당연히 성공해야죠.”
벨의 말에 디아린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시험 가동을 성공적으로 끝냈을 정도라면 조만간 생산이 시작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녀들이 입에 올리는 주인공은 바로 인간의 A등급 마장기의 라이온레인으로 대형급 마장기이자 어떤 전장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칠 수 있는 전천후 마장기였다.
현재까지 A등급 마장기의 생산 체제를 갖춘 세력은 마족의 쉐르난비체와 가드랜드를 다스리는 천족들의 여왕 라이프린 밖에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심지어 인간의 팔, 아니 칠 왕국 중에도 라이온 레인의 생산에 성공한 나라는 아무도 없었다. 전부 던전의 공략을 통해 유물로 발견된 것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었다.
“또 한 번 대륙이 시끄러워지겠네요.”
“익숙한 일이잖아요?”
벨의 말에 디아린은 고개를 주억이고는 몸을 일으켰다.
엘 브릭의 연구팀을 통해서 정보를 입수한 디아린 상단은 일찌감치 라이온레인의 생산과 관련된 특산품들을 대량으로 구입, 엄중하게 보관해 놓고 있었다. 하지만 라이온레인의 개발이 완료되고 생산이 시작된다는 소문이 대륙 전역으로 퍼져 나가는 순간 그와 관련된 특산품들의 가격은 엄청나게 치솟아 오를 게 분명했다.
“이거 C등급 마장기의 거래 따위에 신경을 쏟고 있을 때가 아니었네요. 라이온레인의 생산과 관련된 특산품의 거래 계약을 다시 확인해 봐야겠어요.”
“그러면 저는 새로운 마장기의 연구가 완료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는 것을 최대한 늦춰 보도록 할게요.”
아스트리드 벨의 말에 디아린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거면 충분했다.
그렇게 알르드의 건국이 선포되고 호가 블루 스케일의 귀족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지 두 달 뒤, 디르시나에서 붉은색으로 도색이 된 새로운 마장기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흉부에 알르드의 문장이 멋들어지게 새겨진 거대한 마장기는 인간족의 A등급 마장기로 알려진 라이온레인 급 마장기였다. 그리고 이 소식은 상단과 여행자들의 입을 통해 대륙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뭐?!”
“붉은색의 마장기? 흐음?! 설마?”
“마, 말도 안 돼! 라이온레인이라니!”
알르드에서 라이온레인이 등장했다는 소식을 들은 각 종족의 수뇌부들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장기는 리그너스 대륙의 가장 강력한 전쟁 병기였다. 그만큼 개발도 생산도 어려웠다. 정교한 금속 가공 기술과 마법 관련 기술을 비롯해 모든 분야의 기술을 집대성해야지만 제작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마장기였다.
하지만 이미 호가 C등급과 B등급 마장기의 생산에 성공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것만 해도 믿기 힘들 정도로 놀라운 사실인데 이번에 디르시나에서 모습을 드러낸 마장기는 신화나 전설로만 내려오는 S등급 마장기를 제외하면 가장 강력하다고 알려진 A등급의 마장기였다.
드워프의 대족장인 골드 스트리안이나 정령 여왕 아르넨 리네와 같은 영웅들도 무지막지하게 소모되는 자원으로 인해 연구에 난색을 표했던 바로 그 기술이었다.
“라이온레인이라니……?”
골든 크로우의 지배자, 이레네 아르티아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그녀는 알르드에서 전해온 소식을 듣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들의 A등급 마장기인 라이온레인은 골든 크로우에도 몇 기 존재하지 않는 최상급 마장기였다. 많은 희생 아래에 고대유적이나 위험한 던전의 공략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나서야만 운 좋게 얻을 수 있었던 무기였다. 그런 마장기를 다른 나라도 아닌 소환자가 제작에 성공한 것이다.
두근.
이레네 아르티아는 자신의 심장소리가 크게 뛰는 게 느껴졌다. 인간 국가들의 구심점이라 할 수 있는 골든 크로우조차도 라이온레인은 자체적으로 생산하지 못했다.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골든 크로우 뿐 아니라 군사강국인 바라테이온이나 상업왕국인 미피츠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소환자의 나라, 알르드에서 라이온레인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