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7
리그너스 대륙전기 287
“방금 전에 헛소리라고 말씀하신 분은 가디온의 풀로어 백작님이시군요. 저희 쪽에게 2200만 리스의 채무가 있으시군요. 그렇다면 앞으로 보름 내에 돈을 받으러 가도 되겠습니까?”
“뭐, 뭣이?! 지금 날 협박하는 거냐!”
“계약서에 적힌 바에 의하면 풀로어 백작님께서 돈을 갚기로 한 날은 이미 지난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 그게 우리 영지는 아직 그 큰돈을…….”
“최근에 스완의 대저택을 구입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돈은 대체 어디서 나신 거죠?”
자신에게 지목을 받은 배불뚝이 귀족이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뒤로 한 채 아스트리드 벨은 다른 사람의 이름을 호명했다.
“슈베인 후작님은 저희 쪽에게 16 억 리스를 빌리셨군요. 꽤 큰돈을 빌리셨네요?”
16 억 리스라니? 벨의 말을 들은 세이라 클리퍼드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그 돈으로 C등급 마장기 일곱 기를 구매하셨군요. 하지만 우리에게 회수된 돈은 1억 리스도 되지 않습니다. 상환하기로 한 날 역시 이미 지났네요?”
자리에서 일어나 귀족들을 한 번 둘러본 아스트리드 벨은 굳은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행여나 우리가 소환자라고 해서 허튼 생각을 하고 계시는 분들은 없었으면 합니다. 소환자도 소환자 나름이거든요. 또한 말씀을 드렸다시피 우리는 우리가 빌려준 돈을 받아내기 위해 보름 뒤부터 군사 행동을 개시할 것이며 림드 산맥을 비롯한 알르드의 모든 전력을 동원할 것이라고 미리 경고를 드리겠습니다.”
“으, 으음…….”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셨나 봐요? 원금과 이자라도 제 때 갚으셨으면 블루 스케일과의 우호를 생각해서라도 직접 나설 생각은 없었는데, 디아린 상단을 향해 무기를 겨눈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아스트리드 벨의 말에 스퀴드 수운다 백작이 침음을 흘렸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눈앞의 여인은 블루 스케일의 사정 따위는 봐주지 않을 생각으로 보였다. 하기야 돈을 빌려준 지 일 년이 넘은 만큼 이들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인내하고 기다린 셈이었다. 하물며 상환은커녕 몇몇 귀족들은 돈을 갚지 않겠다고 무기를 들었다고까지 했다.
“하, 하하.”
블루 스케일의 여왕 세이라 클리퍼드는 어이가 없는 모양인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귀족 몇몇이 꼬리를 내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나라의 일에 관해서는 자신들의 권리를 집요하게 주장하던 이들이었다.
그렇게 귀족들을 향해 뜨거운 눈길을 보던 세이라는 시선을 돌려 아스트리드 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벨 역시 그런 여왕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았다. 한참을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던 세이라 클리퍼드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블루 스케일의 왕실은 림드 산맥의 군주가 행사하려는 권리를 정당하다고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블루 스케일의 수도 스완이 포함된 왕실의 영토인 시그너스와 왕실 직할령인 썬드라는 제외합니다. 또한 림드 산맥의 군주는 어디까지나 채무가 있는 귀족에 한해서만 권리를 행사해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그, 그런?!”
“왕실이 귀족을 버리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세이라 클리퍼드의 말에 몇몇 귀족들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니, 그럼 돈을 갚으면 되는 거 아니오? 대체 그 큰돈을 무슨 생각으로 빌리셨소?”
“정신이 나간거지. 왕실이 왜 그대들의 멍청한 행동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거요?”
하지만 그런 귀족들의 행동은 이제껏 잠잠히 있던 왕실파 귀족들에게는 비웃음거리가 될 뿐이었다. 그 웃기는 상황을 보며 아스트리드 벨은 내심 피식하고 웃었다. 그러고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이런 나라를 이끌어 나가야 하는 어린 여왕을 바라보았다.
* * *
마족과의 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커티삭은 최근에야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아직 도시 규모는 S등급인 메트로폴리스급에 머무르고 있었지만 두어 달 정도만 있으면 메갈로폴리스로 규모가 커질 것이라는 게 영웅들의 생각이었다. 방어 시설 역시 전에 비해 엄청나게 늘었다. 특히 마동포 -이제르론이 무려 두 기나 설치가 되었다. 이제르론의 충전 시간이 긴 약점을 어떻게든 최소화하려는 이유였다.
커티삭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상급 마족 볼 붸르니체스는 도시가 요새화되어가는 모습이 불안한 모양인지 자주 군사를 움직이는 모습을 보였지만, 도발을 한다거나 영토를 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지배자인 마왕 쉐르난비체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리고 호는 꼬박꼬박 마족의 상단을 통해 배상금을 지불하고 있었다.
“이번 달에도 27억 리스가 빠져나갔어요.”
“……어휴.”
칸디르의 말에 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영지에서 가장 발전도가 높은 도시 세 개에서 생산되는 리스만큼의 돈이 매 달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 돈을 모조리 영지의 발전이나 다른 곳에 투자를 했다면 분명 엄청난 성과를 얻었을 터였다.
“어쩔 수 없다. 쉐르난비체 녀석을 상대하지 못한다면 계속해서 돈을 갚아나가는 수밖에. 그런 의미에서 이 몸에게 짐승신의 축복은 대체 언제 내려줄 참이냐?!”
집무실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브로리가 호를 노려보았다. 마족과의 전쟁이 끝난 지 반 년이 넘게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짐승신의 축복을 내려주지 않는 호에게 불만을 나타내는 것이다.
“말했잖아.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크르르르릉! 대체 그 준비는 언제 되는 거지?”
“그것도 분명 전에 말했을 텐데? 라이온레인의 연구가 끝나야 한다고.”
매번 있는 일이었기에 호는 그런 브로리의 불만을 가볍게 넘겼다. 브로리의 SSS 승급에 필요한 아이템은 아직 준비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폭풍 바람의 신전을 공략해야 얻을 수 있는 허리케인 글로브와 후작의 증표 때문이었다.
‘폭풍 바람의 신전을 공략하면서 A등급 마장기가 최소 열기가 넘게 필요하다고.’
팀 갈리는 공돌이가 일 년이 넘게 연구에 매진했지만 라이온레인에 관한 모든 연구를 완료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리그너스 대륙의 최종 병기라 불리는 A등급 마장기인 만큼 개발과 관계되는 연구의 종류와 난이도가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연구 팀의 존재는 확실히 사기나 다름없었다. 라이온레인의 자체 생산까지 75% 정도의 연구가 진척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추세라면 올해가 가기 전 라이온레인의 개발이 끝날 것으로 보였다.
또한 후작의 증표는 대륙의 영토 열 개를 획득해야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그래서 알르드가 리그너스 대륙에 존재하는 하나의 국가로 인정을 받고나면 브로리에게 작위를 내려 후작의 증표를 수여할 수 있었다.
‘림드 산맥, 붉은 핏빛의 대지, 바리안스의 대지, 나크 평원, 페렛 습지대, 디피 플레이스만, 군트락, 카우셰드까지.’
현재 총 여덟 개의 영토가 호의 아래에 있었다. 앞으로 두 개의 영토를 더 차지할 수만 있으면 대륙의 모든 세력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땅히 노려볼 만한 영토가 없었다.
수인 왕국에게 시비를 거는 것도 이제는 힘들었다. 워낙 자신에게 당한 게 많은 모양인지 호올스에 상당수의 군대가 주둔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중에는 빼액곰이나 훗사르, 흑묘로 이루어진 부대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세 개 편대 이상의 웨어 타이거와 릴라릴라급 마장기도 목격되고 있었다.
‘천족들과 드워프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고…….’
덕분에 함부로 병사를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최근 림드 산맥에서 병사들이 움직이고 있다지?”
“블루 스케일의 몇몇 귀족들이 디아린 상단의 돈을 떼어먹었다고 하더군요.”
“뭐, 불성실한 채무자들은 어디서나 있는 법이지. 내가 살던 곳에서도 그랬어.”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등장한 캐릭터 인기 순위에서 열 손가락까지는 아니더라도 20 위권 내에는 꼭 드는 영웅 세이라 클리퍼드가 있는 나라인 만큼 호 최대한 블루 스케일과 가까이 지내며 그들의 편의를 봐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치라는 게 있었다.
“얼마나 떼어먹었다고 했지? 90억 리스라고 했던가?”
“저번 주를 기준으로 100억 리스가 넘었다고 하더군요.”
“무지하게 많네. 과연 블루 스케일이 그것을 갚을 수 있을까?”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속으로 호는 그들이 절대로 갚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등장했던 블루 스케일은 여왕 세이라 클리퍼드를 포함한 서너 명의 영웅을 제외하면 그야말로 무능한 귀족들의 천국이나 다름없는 왕국이었다. 게다가 왕권 역시 굉장히 약했기에 아무리 세이라 클리퍼드가 노력을 해도 결국은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국가였다.
‘아이디가 뭐였더라. 블랙 스완이라고 했던가?’
세이라 클리퍼드를 열렬히 사랑하는 유저 한 명이 그런 블루 스케일을 대륙의 최강국으로 만들기 위해 블루 스케일에 임관해 경험했던 일들을 실시간으로 공략 사이트에 올리며 유저들에게 큰 관심을 끈 일이 있었다.
몇 번이나 대륙을 통일했던 경험이 있는 만큼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도전한 일이었지만 상상을 뛰어넘는 귀족들의 텃세와 충격과 공포를 느끼게 하는 그들의 무능함에 결국 두 손과 두발 모두를 들어 올리며 최강국을 향한 도전은 허무하게 끝이 났었다.
‘여기도 크게 다를 바 없겠지.’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그랬다. 적어도 제정신이 박힌 귀족이라면 자신의 영달을 위해 영지를 대가로 그런 큰돈을 빌릴 리 없었다.
“갚을 생각이었다면 진즉에 갚았을 겁니다.”
칸디르가 한쪽 입술을 당기며 비릿하게 웃었다. 블루 스케일의 무능한 귀족들에게 보내는 조소와도 같은 웃음이었다.
“그리고 림드 산맥의 군주께서는 돈 대신 그들의 땅을 가져올 생각으로 보이더군요.”
“……나쁘지 않지.”
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트리드 벨이 블루 스케일의 영토 두 개만 빼앗아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제대로 관리도 못하는 땅 자신에게 넘겨준다면 예쁘게 성장시켜 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림드 산맥에 괜찮은 마장기사들이 있던가?”
채무를 강제적으로 회수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물리적인 충돌이 일어날 터였다. 바로 전쟁이었다. 블루 스케일의 육상 전력이 워낙 허약한 만큼 딱히 걱정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마장기의 변수는 언제나 감안해야 하는 법이었다.
“마장기사?!”
호는 자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몸을 움찔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바로 브로리였다.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말에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싸움을 좋아하는 그녀로써는 여기서 인부들을 관리하고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것보다는 전장에 나서는 게 훨씬 행복할지도 몰랐다.
‘브로리라면…….’
다혈질적이기는 했지만 경솔한 편은 아닌 만큼 일군을 이끌기에는 무리가 없어보였다. 또한 통솔 수치도 낮지 않았다. 물론 111에 불과한 지력 수치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큰 상관은 없어 보였다.
행여나 블루 스케일의 함정에 빠지더라도 브로리의 능력이라면 그런 함정 따위는 힘으로 파훼하고 상대를 물리칠 가능성이 농후해 보였다. 어차피 본 때를 보여줄 생각이라면 제대로 된 인재를 보내는 것도 좋은 방법으로 보였다. 전과는 달리 커티삭도 본 모습을 되찾은 터라 브로리가 할 일 역시 크게 많지 않았다. 그리고 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어때? 블루 스케일의 귀족들 한 번 상대해 볼래?”
호의 말에 브로리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너의 실력이라면 블루 스케일의 귀족들에게 돈을 받아내는 건 어렵지 않겠지?”
“물론이다! 이 몸은 1 리스라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당당하게 대답을 하는 브로리를 보며 호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라면 분명 블루 스케일의 귀족들에게 100억 리스 모두를 받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면 그 가치 이상의 땅을 얻어내거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