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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너스 대륙전기-286화 (286/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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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너스 대륙전기 286

“이거 털들이 굉장히 부드러운데요? 마치 북쪽의 하얀 눈을 만지는 것 같아요!”

“우리 영지의 뮤밍크 가죽은 블루 스케일에서도 품질이 제일 뛰어나기로 유명합니다. 생산량 또한 상당하지요.”

뮤밍크 가죽을 생산하는 인부가 엘프 영웅을 향해 허리를 굽실거리며 말했다. 쿠투스 평원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뮤밍크는 들소와 비슷한 생김새를 한 동물이었다. 고기는 철분이 많고 고단백이면서도 누린내가 적어 사람들에게 꽤나 인기를 끌었다.

물론, 인간 사이에서만 인기가 넘치는 식재료였다. 엘프와 천족은 뮤밍크 고기를 먹지 않았고, 수인들도 몇몇의 종족을 제외하면 그리 선호하는 음식이 아닌 탓이었다. 그리고 가느다란 손으로 뮤밍크 가죽을 만지던 한 여인이 엘프 영웅과 마찬가지로 얼굴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옆에서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르는 남성을 향해 말했다.

“품질이 괜찮네요. 충분히 상품이 되겠어요. 가디온에서 보관중인 뮤밍크 가죽은 총 몇 상자죠?”

“사, 사천 오백상자입니다.”

“어디보자. 뮤밍크 가죽의 시세가 한 상자에 460리스니까…….”

“그……! 디아린 상단주님! 가디온의 뮤밍크 가죽은 대륙에서도 품질이 좋기로 유명합니다. 적어도 상자 당 500리스의 가격을 받을 수 있는…….”

“집사님?”

디아린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낸 남성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남성이 뱀 앞의 개구리처럼 자세를 수그렸다. 천족과의 전쟁 이후 블루 스케일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넘쳐나는 피난민들로 인해 도시의 치안은 엉망이었으며, 부족한 식량으로 인해 아사하는 영지민들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또한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생산 건물들을 짓는데도 상당한 돈을 써야 했다.

‘각 영토의 세금을 낮추도록 하겠습니다.’

상황이 점점 심각해져가는 것을 느낀 블루 스케일의 여왕 세이라 클리퍼드는 세금을 줄여서까지 영지의 정상화에 힘썼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줄인 세금만큼의 돈들이 영지의 정상화에 투자된 게 아닌 귀족들의 주머니로 모조리 들어간 탓이었다.

“낙수효과 꺼져!”

“세금을 줄이면 뭐하냐?! 어차피 영지는 개판인걸!”

“사람들이 죄다 죽고 폐허가 되어야 정신을 차리겠냐?!”

영지민들의 불만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지만 스완에서 머무르고 있는 귀족들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영지를 담당하는 실무진들은 달랐다. 그들은 영지의 복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상인들에게 돈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귀족들에게 넘쳐나는 자금으로 흔쾌히 돈을 빌려준 상단이 있었다. 바로 디아린 상단이었다.

“인간들을 제외하면 뮤밍크 가죽을 취급하는 곳은 마족들과 정령들 밖에 없는 거 아시죠? 게다가 그 수요도 많지 않다고요. 그 먼 곳까지 가서 이 가죽을 판매하려면 얼마만큼의 인건비와 시간이 소요되는지 충분히 예상하고 계실 텐데요?”

“하, 하지만 남부의 오크들에게 이 뮤밍크 가죽들은 굉장히 비싸게 팔립니다.”

“저도 알아요. 하지만 이 가죽을 남부까지 무사히 수송을 했을 때의 이야기죠.”

“디아린 상단이라면…….”

“저는 가능하지만 가디온의 풀로어 백작님은 아니시잖아요?”

디아린의 말에 집사라 불린 남성과 허리를 굽실거리던 인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녀의 말이 굉장히 차갑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블루 스케일의 수도 스완에 머무르고 있는 가디온의 영주인 풀로어 백작 역시 디아린 상단에게 돈은 빌렸다. 무려 2000만 리스에 달하는 돈이었다. 그리고 이 돈은 점점 이자가 불어 일 년 사이에 2150만 리스의 채무로 변신해 있었다.

“저는 분명 1 년의 유예기간을 주었어요. 하지만 그 1 년간 풀로어 백작님이 지급한 채무는 고작 삼.만.팔.천 리스에 불과했습니다.”

디아린의 입에서 숫자가 딱딱 끊어져 나올 때마다 남성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녀의 말은 틀린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밍크뮤 가죽 상자 대금으로 207만 리스의 빚을 변제한 셈이니 앞으로 1943 만 리스가 남았네요.”

“디아린 상단주님! 밍크뮤 가죽 대금이 들어오지 않으면 저희들은……! 굶어죽습니다!”

“그 건에 관해서는 풀로어 백작님과 상담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저는 빌린 돈을 받을 뿐입니다. 그럼 실베리안? 가죠.”

“알겠습니다. 상단주님.”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가디온의 집사를 뒤로 한 채 디아린과 실베리안이라는 이름을 지닌 엘프 영웅이 말에 올랐고, 윙드 훗사르들이 그 둘을 호위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상황은 바르시온 영토에 위치한 도시 모두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바르시온 뿐 아니라 블루 스케일 전역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나마 영주로써의 자각이 있는 영웅들이 다스리는 몇 개의 도시를 제외하면 대다수의 도시들은 빚의 변제는커녕 이자도 제대로 갚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상단주님. 과연 저들이 돈을 갚을 수 있을까요?”

마차 안에서 창밖을 보고 있던 디아린이 실베리안의 물음이 고개를 돌렸다.

“그건 왜 물어보죠?”

“저는 상단주님과 함께 블루 스케일의 영지 몇 곳을 둘러보았습니다. 하지만 블루 스케일의 귀족들은 돈을 갚을 의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더군요.”

“그렇군요. 뭐, 내 생각도 당신과 비슷해요.”

“네……. 에?!”

디아린의 대답에 실베리안의 입이 벌어졌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돈을 갚지 않으려고 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돈을 받아낸단 말인가? 게다가 상대는 힘과 권력을 지니고 있는 귀족들이었다.

그들의 채무를 모두 합치면 몇 십억 리스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으로 이는 블루 스케일의 일 년 생산량보다 조금 낮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자신이 본 귀족들의 행태로 봤을 때 그 큰돈을 갚기는커녕 상단을 향해 무기나 들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리고 디아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저들이 돈을 갚지 않으면 않을수록 우리에게는 더욱 좋은 일이 벌어질 겁니다.”

“그게 무슨……?”

실베리안이 의문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디아린은 굳이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가 스스로 깨닫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에도 디아린은 상단의 일을 수행하면서 틈틈이 상단에게 돈을 빌린 귀족들의 영지를 방문해 채무를 지불하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귀족들의 채무 변제 속도는 거북이의 걸음보다도 느린 수준이었다. 오히려 변제를 하는 대금보다 이자가 더욱 많이 쌓여 나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사건이 터졌다.

“뭐하는 짓이죠?”

“우리는 돈을 갚을 수 없습니다. 7300만 리스라니!? 그게 누구 애 이름인 줄 아시오?!”

“채무의 변제는 돈 뿐만 아니라 물품으로도 가능합니다. 영주님. 코스틸 영지에는 C등급 마장기가 한 기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뭐, 뭣이?! 감히 내 소중한 마장기를 대금으로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요?!”

버럭 호통을 터뜨리는 귀족을 보며 디아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드디어 기다리던 게 왔다는 생각이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자신의 뺨을 살짝 문지른 디아린은 얼굴에 탐욕이 가득한 귀족을 바라봤다.

“그렇다면 코스틸 영지의 슈락 자작님께서는 우리 상단의 채무를 변제하기 않으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물론이오! 내가 빌린 돈은 6000만 리스인데 갚아야 할 돈은 7300만 리스라니! 완전 사기 아니오!”

“흐응. 그렇군요.”

디아린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자신을 호위하는 윙드 훗사르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받은 윙드 훗사르들이 자신들의 창을 들어 올리자 기겁한 귀족이 뒤로 물러났고, 팔라딘들이 앞으로 나섰다.

“감히! 네 년이 나에게 검을 들이댔단 말이냐! 오늘부터 디아린 상단은 이 슈락의……!”

“혹시나 하는 말인데, 우리 상단이 알르드의 군주 윤호 님의 휘하에 있는 상단이라는 것을 알고 하시는 말씀이시죠?”

“흣?!”

귀족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디아린을 속으로 콧방귀를 꼈다. 블루 스케일의 귀족이 형편없는 놈들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멍청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정을 봐줄 생각은 없었다.

“오늘의 일은 알르드의 군주 윤호 님에게 보고하겠습니다. 이로 인해 군사적인 충돌이 일어나도 모든 책임은 슈락 자작님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두셨으면 좋겠군요.”

“자, 잠깐! 디아린 상단주!”

슈락 자작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지만, 디아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상황을 파악한 병사와 슈락 자작 휘하의 영웅들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디아린의 뒷모습과 슈락 자작을 바라볼 뿐이었다.

* * *

“뭐라고요?!”

블루 스케일의 여왕 세이라 클리퍼드가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워낙 충격적인 내용인 터라 방금 전 자신이 들은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판단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의 앞에서 아스트리드 벨이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보름 뒤부터 림드 산맥의 병사들이 디아린 상단의 채무 회수를 위한 군사적인 움직임을 개시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이 블루 스케일을 공격하겠다는 말인가요?! 윤호 님께서 그 일을 허락하셨습니까?”

“자세한 보고는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블루 스케일에 대해 더 이상 실망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거든요.”

“…….”

세이라 클리퍼드의 얼굴이 한층 더 굳어졌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98 억 리스라니?!’

블루 스케일의 귀족들이 디아린 상단에게 알음알음 빌린 돈들이었다. 더욱 황당한 것은 이들이 돈을 빌려놓고 갚을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 중이라는 점이었다. 정신이 나가도 보통 나간 게 아니었다. 그리고 아스트리드 벨과 어느 정도 안면이 있던 스퀴드 수운다 백작이 나섰다.

“림드 산맥의 군주시여. 아시다시피 우리의 재정으로는 그 돈을 갚을 수 없습니다.”

“저희들은 충분히 유예기간을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디아린과 눈을 마주친 아스트리드 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천족의 전쟁 이후 1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저희들은 블루 스케일의 평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지원군을 보내 천족들을 물리쳤으며, 굶주리는 피난민들을 위해 군량을 풀기도 했었죠.”

“그 은혜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또한 블루 스케일의 발전을 위해서 디아린 상단을 통해 많은 자금을 투자하기도 했죠.”

이어지는 벨의 말에 스퀴드 수운다 백작은 입을 다물었다.

‘빌린 돈을 갚아라. 그렇지 않으면 힘을 사용해서라도 채무를 받아내겠다.’

결국 눈앞의 여인이 하려는 말은 하나였다. 문제는 블루스케일이 100억 리스에 달하는 채무를 갚을 상황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상대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자리에 앉아 있는 림드 산맥의 군주는 채무의 변제를 제외한 그 어떤 제안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았다.

“후우. 그대의 말은 잘 알아들었어요.”

한숨과 함께 세이라 클리퍼드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멍청한 귀족들의 행태 때문에 하루하루 수명이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우리 왕국은 그 큰돈을 변제할 재간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림드 산맥의 병사들이 우리 영토를 침범하는 것도 원하지 않아요. 천족과의 대 전쟁이 끝난 지 고작 일 년이 조금 흘렀을 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일을 평화롭게 넘길 수 있겠습니까?”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세이라 클리퍼드의 말에 아스트리드 벨이 표정을 살짝 풀었다. 멍청한 귀족들과는 다르게 블루 스케일의 여왕은 뛰어난 인물이었다. 다만, 주변이 그녀를 받쳐주지 못할 뿐이었다.

“간단합니다. 돈이 없으면 현물로 지불하면 됩니다. 예를 들자면 땅?”

“……네?”

“뭐라고요?!”

그리고 이어지는 아스트리드 벨의 말에 세이라 클리퍼드와 스퀴드 수운다 백작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

왕궁 대전에 있는 귀족들이 차가운 표정을 짓거나 격하게 화를 내었다.

귀족들에게 있어 영토와 영지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시켜 주는 힘이었다. 하지만 채권자인 아스트리드 벨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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