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5
리그너스 대륙전기 285
‘전쟁이 끝난 건가?”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마족들이 그냥 물러났는데? 정말로 승리한 건가?”
소식을 듣고 비밀 통로를 통해 도망쳤던 영주민들이 돌아왔고, 그들은 마족들이 모두 물러난 모습을 보며 떠나갈 듯 환호성을 질렀다. 마족의 병사들이 성문 안까지 들어왔던 터라 성 내는 부서진 건물들로 인해 엉망이었지만, 다들 얼굴에는 기쁨이 묻어나고 있었다. 자신들의 터전이자 고향을 지켜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킬리만자로가 수인 왕국의 땅에서 발견됐다던데 대체 어떤 상황이기에 쉐르난비체가 물러난 거죠?”
“킬리만자로라면. 인피니티 나인 중 하나인 제 8 파신 오으든의 분신이라 불리는 존재들이예요.”
“……썬더 퓨리와 같은 존재인가 보네.”
호의 말에 그를 바라보던 에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인피니티 나인이 이 리그너스 대륙으로 쳐들어 온 겁니까?”
“아뇨. 그건 아닐 거예요. 아무리 여신 카테지나의 힘이 강력하다 해도 창조신이 만들어낸 결계라 불리는 그랜드 라인을 쉽게 넘을 수는 없어요. 소수라면 모를까, 대륙을 도모할 정도의 대군이 넘어온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렇다면 소수라도 칠제가 움직일 정도로 위협적이라는 건데…….”
“네. 카테지나의 악의에 물든 그들의 강력함은 이 대륙의 힘을 훨씬 뛰어넘거든요.”
썬더 퓨리만 해도 EX등급의 병사들이었으니 그와 동급인 존재들이 나타난 것에 대해 칠제들이 과민하게 반응을 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정보창에 따르면 썬더 퓨리 한 부대의 위력은 A등급 마장기와 엇비슷하거나 뛰어넘는다고 했다.
‘EX등급의 윗 단계는 대체 무슨 등급이지? 고작 분신이 EX등급인데 인피니티 나인이라는 애들은 슈퍼 등급이라도 되는 건가?’
순간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딱히 답은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은 이 대륙과 루베릭 대륙을 연결할 수 있는 차원 관문을 건설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어요.”
“그건 좀 위험하겠네요.”
뒤이은 에어리스의 말에 호는 고개를 주억였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오으든의 분신인 킬리만자로의 등장은 충분히 대륙 전체가 움직일 만한 사건이었다. 실제로 그러고 있기도 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쉐르난비체가 이끌던 마족의 군대가 군트락을 지나쳐 수인 왕국의 땅으로 넘어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정말로 전쟁이 끝난 것이다.
“아직 신의 품으로 돌아갈 때가 아니었나 보네요.”
다행히 칸디르는 무사했다. 하지만 심각한 부상 속에서 대충 치료만 해놓고 방치해 놓은 탓인지 세부 능력들이 큰 폭으로 깎여 있었다. 아무래도 후유증을 치료하려면 특별한 아이템이나 승급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녀의 전용기였던 화이트 윙 역시 완전히 파괴가 되어 복구가 불가능했다.
마족의 군대에 필사적으로 저항했다는 것을 보여주는지 커티삭은 완전히 폐허로 변해 있었다. 영지 정보를 살펴보니 S등급이었던 메트로폴리스급 도시가 C등급인 소도시까지 하락해 있었다.
“으아아아악! 나, 나의 파라다이스가!”
아트리그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마족의 군대가 휩쓸고 지나간 아트리그 역시 중도시까지 발전도가 하락했다. 하지만 바리안스의 대지의 군주인 리셴르나를 더욱 좌절케 한 것은 다름 아닌 아트리그에 있는 캣닢 공장의 상태였다. 다른 건물들은 그럭저럭 멀쩡한 것들이 남아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마족의 병사들은 아트리그의 캣닢 공장들을 모조리 파괴해 놓고 도시에서 물러났다.
“망가진 도시를 복구하려면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가겠군.”
나무 책상 하나만 덩그러니 가져다 놓은 커티삭의 집무실에서 호가 말했다. 엉망이 되어버린 두 개의 영토를 복구시켜야 하는 일인 만큼 엄청난 리스와 자원이 소모될 터였다.
“거기에 보상 문제도 있고요.”
디아린이 말했다. 그녀는 호의 명령에 따라 파괴된 도시의 복구견적을 내기 위해 커티삭을 방문했다.
“아, 그랬지. 마족의 상단이 찾아왔다고 했던가?”
“네. 아스트리드 벨님께서 직접 대화를 나눴고, 배상금은 앞으로 이 년간 매 달 갚아나가기로 했다고 해요. 연이율은 24% 고요.”
“24% 라니? 나 참, 악마들이 따로 없군.”
지불해야 할 돈이 500억이었으니 얼추 계산해 봐도 매달 평균 27억 가까이를 지불해야 했다. 그렇다고 500억 리스를 단번에 만들어 내는 건 돈 들어갈 곳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현재 상황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허리띠를 졸라매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인피니티 나인의 등장으로 인해 자신에 대한 각 종족들의 시선이 멀어졌다는 점이었다. 특히 수인 왕국이 그랬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대륙의 최남단에 위치한 영토 켐벨에서 킬리만자로들이 발견되었고, 수인 왕국의 제왕 아쉬토가 이끄는 군대와 전투가 벌어졌다고 했다.
“결과가 어떻게 됐지?”
“대외적으로는 수인 왕국이 승리했다고 하지만 정확한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입은 피해가 상당한 모양이에요. 아쉬토의 전용기인 킹 타이거가 박살났다는 것을 목격했다는 보고도 있어요. 파신이 등장했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조그마한 해프닝 정도로 끝난 건 아니었나 보네.”
호가 고개를 주억였다. 킬리만자로가 썬더 퓨리와 동급인 EX등급의 병사들이라면 아쉬토의 전용기가 박살이 난 게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봤을 때 리그너스 대륙으로 넘어왔다는 인피니티 나인의 분신들은 모조리 사라질 터였다. 아쉬토 뿐 아니라 대륙의 지배자들이 모조리 나섰기 때문이었다.
“이 대륙만 통일하면 엔딩인 줄 알았는데…….”
“네?”
“아니, 아무것도. 어쨌든 자재의 수급에는 지장이 없겠지?”
“물론이죠. 이제는 우리 상단도 제법 크다고요.”
디아린이 예쁘게 웃으며 대답했다. 디아린 상단의 규모는 십대 상단급은 아니더라도 삼십대 상단에는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그녀가 몸담고 있던 아르테미스 상단의 규모는 예전에 뛰어넘었다.
[상단–디아린 상단(신뢰)[10000 / 10000]]-직물, 섬유, 식품, 무기, 광석, 가축, 마법석, 해양석…….
규모–32634 운용 자금–83억 리스]
‘
나쁘지 않네.’
전과는 조금 달라진 정보창의 모습을 보며 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알르드의 여덟 영토에서 생산되는 특산품들을 모조리 취급하면서 디아린 상단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기준을 만족시키려면 디아린 상단은 조금 더 성장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단주인 디아린의 성장 역시 필요했다. 아직 그녀는 A등급 영웅에 불과했다.
“커티삭에는 언제까지 머무를 생각이지?”
“이틀 정도요. 그 정도면 복구 견적은 대략적으로 나올 것 같아요. 왜요?”
“주고 싶은 선물이 있어서.”
“……선물이요? 갑자기 왠 선물이람? 헉?! 서, 설마 일은 아니겠죠?”
선물이라는 말이 싫지는 않은 모양인지 수줍게 웃던 디아린이 벼락같이 표정을 바꾸고는 호를 쳐다보았다. 그런 디아린의 반응에 호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내가 그렇게 악랄 했나? 어쨌든 지금부터 불러주는 재료들을 좀 구해줬으면 해.”
“필요한 재료요? 갑자기 또 무슨 재료람……아?!”
디아린이 눈을 번쩍 떴다. 그녀가 호의 휘하에서 상단 일을 한 게 벌써 몇 년이었다. 방금 전에 한 호의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설마 창조신의 축복을……?!”
“맞아. 그리고 이번에는 디아린 그대에게 축복을 내릴 생각이야.”
호의 대답에 디아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어떤 아이템을 준비하면 되는 거죠?!”
그러고는 재빠르게 펜과 종이를 꺼내들며 호를 쳐다보았다. 창조신의 축복. 이는 자신의 격을 높일 수 있는 행운 중의 행운이었다.
* * *
까앙! 까아앙!
커티삭에서 대대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사의 지휘는 심시티의 팀장인 로우덴이 맡았지만 호 역시 함께했다. 자리를 비운 군트락이 조금 걱정되기는 했지만 그 쪽 일은 그린 드래곤 레피스트 퓨리온이 알아서 잘 해결해줄 터였다. 게다가 니나 다니엘레를 군주로 임명했으니 큰 문제는 없을 터였다.
수인들이 쳐들어 올 염려는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영토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해결해야 했다.
“쉐르난비체가 다시 쳐들어온다 하더라도 커티삭의 성벽을 넘지 못하도록 하겠어!”
모든 것이 무너지고 새롭게 도시가 세워지는 만큼 호는 커티삭을 대륙에서 제일가는 요새도시로 만들 생각이었다.
“취익! 취익! 비켜비켜!”
“음무워어어어!”
체력이 좋은 오크와 미노타우루스들이 무거운 자재들을 옮기자 엘프들이 재빠르게 자재를 손질하고 수인들에게 건넸다. 그리고 수인들은 공사가 진행 중인 현장으로 부지런히 자재들을 들고 나르기 시작했다.
“어, 어어?!”
“호 님께서 직접?”
그리고 그중에는 호도 끼어 있었다.
띵동.
-자신들과 함께하는 군주의 모습에 커티삭의 영지민들이 감동의 도가니에 빠졌습니다.
-건설 속도가 조금 빨라집니다. 앞으로 5시간 동안 건설 효율이 30% 증가합니다.
눈앞에 나타나는 메시지에 호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건설 현장에 직접 나선 보람이 있었다. 사실 이런 것을 의도해서 몸을 움직인 것도 없잖아 있었다. 영지 곳곳에서 대대적인 공사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사고는 그리 많지 않았다. 여러 영웅들이 관리자로 투입된 까닭이었다.
하지만 예전과 비하면 영웅들의 수는 크게 줄어 있었다. 마족과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영웅들의 수가 제법 되었던 탓이다. 주점을 통해 새로운 영웅들을 고용할 수는 있지만 시간이 필요했다.
띵동.
-아르티아 합금의 연구가 완료되었습니다.
-다음 연구의 선택이 가능합니다.
팀 갈리는 공돌이의 연구 역시 순조로웠다.
마족들에게 지불해야 할 돈이 제법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크 평원을 비롯해 어느 정도 성장이 완료된 영토에서 생산되는 자원을 통해 호는 계속해서 A등급 마장기의 연구를 진행시켜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A등급 마장기를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을 때까지는 고작 20% 정도의 연구만을 끝낸 상황이었다. 팀 공돌이의 연구 개발 효율은 상당히 높은 편이지만, A등급 마장기의 제작 기술 역시 만만치 않은 기술이었다.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의 마장기를 먼저 개발할까도 싶었지만 깊이 생각을 해 본 결과 라이온레인의 개발을 먼저 끝내는 게 나중을 위해 좋은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A등급과 B등급의 차이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데다가 A등급 마장기를 다수 보유하고 있어야만 전력 상승을 위한 이벤트를 진행하는 게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카테지나 여신이라는 작자가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니…….”
인피니티 나인의 분신이자 EX등급 병종의 소환은 최후의 선택으로 미뤄났다.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전력을 상승시킬 수 있는 방법이기는 했지만 켐벨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생각하면 도저히 EX등급 병종을 소환할 용기가 나지를 않았다.
고작 파신과 그가 이끄는 소수의 병사가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륙의 칠제가 한 자리에 함께하면서 무려 이천 만 이상의 병력이 켐벨이라 불리는 수인 왕국의 조그마한 영토에 집중된 것이다. 듣자하니 마장기의 수만 삼천 여기가 넘었다고 했다.
당연히 소수의 킬리만자로들이 그 전력을 상대로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소문에 따르면 킬리만자로들은 정령 여왕 아르넨 리네의 손에 갈기갈기 찢겼다고 했다. 그 와중에 제 8 파신 역시 소멸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정확하지는 않은 정보였다.
“조금 더 전투가 지속되었으면 좋을 텐데.”
대륙의 혼란이 지속될수록 호는 시간을 벌 수 있었고, 그만큼 자신의 전력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일주일 뒤, 칠제들의 군대가 이동을 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호는 상황이 종료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카우셰드와 군트락에 병력을 집중시키도록!”
혹시 모를 수인 왕국의 도발을 위해 호는 마족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병사들과 마장기들을 그 두 영토에 대거 투입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수인족의 군대가 움직이려는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일 년의 시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