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4
리그너스 대륙전기 284
“무슨 일이더냐?”
자신의 행동이 방해를 받았다는 것에 쉐르난비체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루베릭 대륙의 배 한 척이 그랜드 라인을 뚫고 넘어왔고, 수인 왕국의 제왕 아쉬토님께서 인피니티 나인의 제 8 파신 오으든의 분신 킬리만자로를 발견하셨습니다.”
수인 전령이 땅에 바짝 머리를 대며 외치듯 말했고, 쉐르난비체가 자신의 미간을 찌푸렸다.
“루베릭 대륙이라니? 그들의 배가 도착했다고?”
“그렇습니다, 만마의 지배자시여. 켐벨의 해안가에서 발견했습니다.”
수인 왕국의 전령이 다시 입을 열었다.
“보고를 받은 즉시 아쉬토님께서 직접 나서서 배를 낱낱이 조사했고, 대륙의 배신자였던 블레오파 부족의 마지막 생존자 비야르키나와 킬리만자로가 머물렀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비야르키나?!”
쉐르나비체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하? 그 빌어먹을 표범 녀석이 다시 이 대륙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과거의 일을 떠올리는 그녀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휘몰아쳤다.
대륙의 배신자 비야르키나. 호인족의 한 갈래에 속해 있는 검은 털이 특징이었던 부족의 남성으로 수십 년 전, 여신 카테지나의 악의에 물들어 리그너스 대륙에 루베릭 대륙을 연결하는 차원문을 세우고 이 대륙으로 인피니티 나인을 불러들이려고 했던 존재였다.
다행히 차원문이 완성되기 전, 비야르키나의 수상한 행동에 의심을 품던 아쉬토가 차원문의 존재를 밝혀냈고 칠제의 공격을 받은 비야르키나는 결국 대륙에서 도망을 치고야 말았다.
그렇게 여신 카테지나와 비야르키나의 음모는 분쇄됐지만, 칠제 역시 아무런 피해도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 시절 수인족의 제왕이었던 웅족 영웅 빅 푸가 오으든의 분신 킬리만자로와 함께한 비야르키나의 암습에 목숨을 잃기도 했었다.
‘그 녀석이 다시 돌아왔다?’
칠제의 추격에도 불구하고 살아서 도망을 쳤을 정도로 경계심이 많은 녀석이었다.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니면 저번처럼 대륙 어딘가에 또 다른 차원문이 지어지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흐으음.”
차원문은 결코 만들어져서는 안 됐다. 그랜드 라인을 거치지 않고 양 대륙이 연결되는 통로가 생겨나는 순간 대륙 전쟁이 발발하기 때문이었다. 과거 대륙 전쟁에서 인피니티 나인의 분신들로 인해 칠제들이 치른 곤욕은 헤아릴 수도 없었다. 골든 크로우를 건국한 인간들의 대 영웅 아스란 아르티아는 익스큐션 스워드의 손에 목숨을 잃었고, 헬리오스 아쳐들과 전쟁을 치렀던 엘프들은 뛰어난 실력을 지닌 최상급 궁수들이 모두 사망해 궁술이 몇 단계 뒤로 후퇴하기까지 했다.
마족 역시 종족의 근간이 흔들릴 정도의 피해를 몇 번이나 입었었다.
“급보! 급보입니다!”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생각에 빠져 있던 쉐르난비체에게 이번에는 마족의 전령이 도착했다. 유령군마를 타고 허겁지겁 달려와 쉐르난비체의 앞에 부복을 한 전령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령 여왕 아르넨 리네가 이끄는 군대가 최상급 정령들과 함께 남진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진? 피해는?”
“그, 그게 없습니다. 아르넨 리네의 군대는 빠른 속도로 우리 영토를 가로지르며 남동쪽으로 진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령들의 목적지는 드워프의 영토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쉐르난비체의 시선이 수인 왕국 전령에게로 향했다. 아쉬토가 자신에게만 전령을 보냈을 리 없었다. 정령 여왕 아르넨 리네의 갑작스런 움직임은 분명 오으든 때문이 틀림없었다. 자신이 크탈나스를 싫어하는 것처럼 아르넨 리네와 오으든 역시 비슷한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칠제의 적, 인피니티 나인의 등장 때문일까? 어느새 소환자에 대한 흥미는 뚝 떨어져 있었다. 생각해보니 마침 잘 된 것 같기도 했다. 루베릭 대륙의 배가 발견되었다는 켐벨은 블라디션이 있는 판데모니움과는 정반대에 위치한 장소였다.
“아쉽지만 놀이는 이만 끝내야겠군.”
여기서 병사를 남쪽으로 돌리면 한 달 이내에 켐벨에 도착할 수 있었다.
루비아이에 탑승한 그녀가 코르다의 성문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중간에 엑스칼리버와 실버문과 같은 병사들이 루비아이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그뿐이었다. 신기 카시아움이 번쩍이는 순간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던 모두가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루비아이?!”
진홍색 마장기가 눈에 들어오자 호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키마라이급 마장기를 어깨로 밀쳐냈다. 브로리와 한시진을 앞세워 어떻게든 성문은 사수하고 있었지만 여기까지인 모양이었다.
“도망칠 거야?”
“어쩔 수 없어. 지금은 저 녀석을 당해낼 수 없다고.”
“제길!”
브로리가 분통을 참지 못하고 조종석을 쾅하고 두드리는 소리가 통신구를 통해 들려왔다. 계속되는 퇴각에 한시진도 분한 모양인지 자신이 상대하던 마장기를 사납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하지만 복수도 살아남았을 때나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승산이 보인다면 어떻게든 물고 늘어지겠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일단 도망치자!”
몸을 돌려 커다란 대검으로 상대의 마장기를 후려쳐 넘어뜨린 호는 마무리는 하지 않은 채 몸을 돌려 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괜히 시간을 끌었다가 루비아이에게 발이라도 붙잡히게 되면 상황이 골치 아파질 가능성이 높았다.
“전군! 비상통로를 통해 퇴각한다!”
호의 명령이 떨어지자 성문 근처에서 방어를 하고 있던 아르카니움 아처들이 하얀색 구슬에 불을 붙이고는 성 밖으로 구슬을 던졌다. 그러자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뿌연 연기가 성내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연막탄이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연막탄은 상대의 시야를 막아줄 테고, 그 틈을 타 비밀 통로로 성을 빠져나갈 계획이었다.
쐐애애액!
“젠장! 더럽게도 빠르네!”
하지만 비밀 통로를 향해 신나게 달리던 호는 뒤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소닉붐에 얼굴을 구겨야만 했다. 누군가를 향해 마검 카시아움이 날아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왜 하필 나야?!”
그리고 잠시 후, 키마라이의 조종석이 붉은색 경고등으로 가득 차자 호는 등에 걸치듯 매어 놓은 키마라이의 대검을 고쳐 잡아야 했다. 재수 없게도 카시아움의 목표가 된 마장기는 바로 자신이었다.
카아앙!
금속성과 함께 키마라이–플레임의 조종석으로 날아들던 마검 카시아움이 호의 대검에 밀쳐져 뒤로 튕겨나갔다. 마장기의 출력이 조금 더 높았으면 마검을 뒤로 밀어내는 것은 물론이고, 내동댕이칠 수도 있었는데 지금은 마검을 막아낸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했다.
“윤호!”
“오빠!”
호가 카시아움에게 공격을 받자 앞서서 달리고 있던 브로리와 한시진이 몸을 틀었다. 병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큭!”
자신을 노릴 듯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카시아움을 보며 호는 여러 가지 판단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밖에 없었다. 맞서 싸우느냐? 아니면 도망을 치느냐.
맞서 싸울 경우에는 루비아이가 도착하기 전, 그리고 연막탄의 안개가 걷히기 전에 카시아움을 제압하고 몸을 빼야 했다. 브로리와 한시진이 돕더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카시아움의 등장에 적들의 마장기들까지 자신이 있는 장소로 모이고 있었다.
‘도망을 친다면…….’
저 빌어먹을 마검은 계속해서 자신을 쫓아올 터였다. 비밀통로가 발각되는 것은 물론이고, 킬리드에 도착하기 전까지 끊임없이 마족의 추격이 이어질 터였다. 하지만 카시아움을 제압하는 것보다 도망을 치는 게 더 나은 판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는 마족의 신기. 그리 쉽게 제압될 녀석이 아니었다.
게다가 코르다의 비상통로는 어두운 동굴로 만들어져 있었고, 혹시 모를 침입자를 물리치기 위해 함정 또한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한 함정을 이용해 시간을 끈다면 카시아움이 쫓아와도 충분히 도망칠 수 있었다.
쿠웅!
그 순간 갑작스레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내리며 지면에 큰 진동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정체를 확인한 호는 자신도 모르게 혀끝으로 입술을 핥았다.
“빌어먹을. 존나 빠르네…….”
진홍색의 마장기. 마왕 쉐르난비체의 전용기인 루비아이였다. 루비아이의 눈동자가 잠시 카시아움을 바라보았다가 그 너머에 있는 호의 마장기로 향했다.
루비아이와 시선을 마주친 호는 강하게 검을 쥐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루비아이는 자신을 공격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만약 그럴 생각이었다면 자신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이미 공격을 가했을 터였다. 마검 카시아움이 루비아이의 옆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조금씩 나빠지기 시작했다. 쉐르난비체가 자신을 시험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지금의 이 난관을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고 묻고 있는 것 같았다.
‘2 년 아니 3 년만 더 있었어도.’
이렇게 대책 없이 무너지지는 않았을 터였다. 아무리 그녀가 EX등급의 영웅이라고 해도 SSS등급으로 구성된 다수의 영웅들은 이겨내지 못할 테니까. 마족의 신기 카시아움? 극소수이긴 해도 카시아움 못지않은 무기들이 이 대륙 어딘가에 숨겨져 있었다. 그때 쉐르난비체가 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500억 리스.”
“……에?”
“500억 리스를 지불하면 너의 땅에서 물러나겠다는 이야기다. 포로로 잡은 녀석들도 풀어주도록 하지.”
호는 물끄러미 쉐르난비체를 바라봤다. 뜬금없는 그녀의 제안에 어안이 벙벙했다. 열심히 터뜨렸던 연막탄의 가루들이 바람에 날려 사라졌지만 양 측의 병사들은 서로를 노려볼 뿐 전투를 중단한 상황이었다. 브로리와 한시진 역시 자신들의 무기를 늘어뜨린 채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원래는 그대의 땅을 모조리 차지할 생각이었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상황? 생각이 아니라?’
뭔가 이상한 느낌이었지만 호는 굳이 묻지 않았다. 쉐르난비체는 말이 계속해서 이어진 탓이었다.
“인피니티 나인 중 하나인 오으든의 분신 킬리만자로가 수인 왕국의 땅에서 발견되었다. 그대는 잘 모르겠지만 이 몸이 직접 가야 할 정도의 큰일이지. 아쉽지만 우리의 싸움은 여기까지인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500억 리스를 지불하면 물러나겠다는 이야기입니까? 당신이 차지한 커티삭과 지크 로리 그리고 바리안스의 대지의 영지들을 내놓고?"”
“물론이다. 뭐, 안줘도 상관은 없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 코르다를 포함해 세 개의 영토를 가져가겠다.”
500억 리스가 애 이름은 아니지만 그건 곤란했다. 자신의 영토 중에서도 지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있는 땅이 바로 붉은 핏빛의 대지였다. 붉은 핏빛의 대지를 빼앗기게 되면 림드 산맥과 바리안스의 대지로 향하는 길이 사라지는데다가 토갈론 요새 역시 고립되기 때문이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어느새 호의 옆으로 다가온 브로리가 물었다. 그리고 쉐르난비체는 차가운 목소리로 단언하듯 말했다.
“나는 만마의 지배자 쉐르난비체. 이 몸의 약속은 그 어떤 것보다도 단단하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키마라이의 조종석 안에 있던 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갑자기 상황이 바뀌어서 물러난다니? 우리를 가지고 놀았다 이거냐?!’
황당하면서도 기분이 더러웠다. 먼저 전쟁을 벌여 수많은 영웅 및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고, 도시를 파괴해 물질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는 갑작스레 일이 생겼다며 선심 쓰듯 전쟁을 중단하자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호가 더욱 화가 난 것은 바로 쉐르난비체의 제안에 안도하는 자신의 마음 때문이었다. 분하기는 하지만 여기서 전쟁을 끝낼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이었다. 계속된 전쟁으로 병사들을 잃고 도시가 파괴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더욱이 전쟁을 계속한다 하더라도 쉐르난비체를 물리칠 수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지금 바로 그 큰돈을 지불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성은 감정을 짓눌렀다.
“상관없다."
이미 대답을 예상한 모양인지 쉐르난비체가 고개를 까닥였다. 그러고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우리 종족의 상단을 그대의 도시로 보내도록 하지. 나머지는 상단주와 논의하도록.”
그 말을 끝으로 쉐르난비체는 몸을 돌려 성 밖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성 내로 진입한 마족들의 병사들도 함께였다. 그렇게 마족의 군대가 물러나는 모습을 보며 호는 주먹으로 마장기의 조종석을 강하게 내려쳤다.
“젠장!”
콰직하는 소리와 함께 조종석의 부품 몇 개가 튕겨져 나갔다. 부딪친 부위에서 통증이 느껴지면서 핏방울이 손끝을 타고 흘렀지만 짜증과 분노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오늘의 일은 꼭 되갚아 주겠다, 쉐르난비체.”
그녀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호의 눈동자에 독기가 짙게 서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