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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너스 대륙전기-283화 (283/522)

# 283

리그너스 대륙전기 283

“며칠 전, 켐벨 남부에서 낡은 소형선 한 척이 발견됐다. 루베릭 대륙의 배더군.”

“뭐? 그런 일이 있었는데 아무런 보고도 안했다고?!”

“고작 낡은 소형선에 불과했어! 게다가 그 안에서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오히려 물고기가 썩는 냄새 때문에 코가 완전히 맛이 가버리는 줄 알았지. 아, 아니지. 몇 가닥에 불과하긴 하지만 배 안에서 검은색의 털이 나왔었다.”

“검은색의 털?”

아쉬토가 내처 물었다.

그러고는 눈동자를 가늘게 떴다. 킬리만자로의 털은 검붉은색이지 검은색이 아니었다.

사소한 차이기는 했지만 루베릭 대륙의 끔찍한 적들에 대해 알고 있는 쿰마가 그런 사실을 대충 넘겨짚어 말할 리 없었다.

“검붉은 색이 아니라 검은색의 털이라고?”

“그래. 그래서 킬리만자로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정말 칠흑 같은 색이었지. 마치 호인족의 블레오파 부족 녀석…….”

쿰마가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껌뻑였다. 먼지나 땀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 것도 아닌데 시야가 흐려지고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강철을 깨부술 수 있는 단단한 손 역시 조금씩 떨려오고 있었다.

“진정해라, 아쉬토.”

쿰마의 커다란 눈동자가 아쉬토에게 향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아쉬토는 사파리 내성 전체를 짓누를 정도로 강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블레오파 부족이라니!”

한창 살기를 내뿜던 아쉬토가 내성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쿰마가 무어라 말하려고 했지만 짙은 살기에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 녀석이 아직까지 살아 있단 말이야?!”

아쉬토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 묻어나왔다. 다행이도 쿰마를 향한 분노는 아니었다. 그리고 상황을 파악한 쿰마가 조심스레 물었다.

“정확한 사실은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다, 아쉬토. 비야르키나 그 녀석이 배 안에 있었으리라는 것은 단순한 추측에 불과해.”

“아니! 대륙의 배신자들인 블레오파의 마지막 생존자. 그 녀석이 돌아온 게 틀림없다. 젠장할! 바다로 도망치기 전에 켐벨에서 목숨을 끊어 놨어야 했어!”

“하지만 자네는 그를 쫓지 못했지.”

쿰마의 말에 아쉬토는 입을 다물었다. 수인에게 바다는 지옥보다도 더욱 무서운 장소였다.

어쨌든 그때의 아쉬토는 비야르키나가 죽었으리라고 생각했다. 인피니티 나인과 손을 잡고 대륙의 공적이 되어 바다로 도망친 그가 안전하게 머무를 수 있는 장소는 단 한곳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루베릭 대륙의 배를 타고 리그너스 대륙으로 돌아왔다. 그것도 인피니티 나인의 제 8 파신인 오으든의 분신 킬리만자로와 함께 말이다.

“……그렇다면 저 죽은 호인들이 아란티아느의 호위병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겠군.”

아란티아느와 비야르키나는 어릴 때부터 굉장히 친한 사이였다.

물론, 그 사이에는 아쉬토도 끼어 있었다.

그러나 비야르키나가 루베릭 대륙과 손을 잡고 대륙의 공적이 되었을 때 아쉬토는 그를 무찌르기 위해 발톱을 세웠던 반면 아란티아느는 비야르키나의 편을 들어줬었다.

‘그, 그가 그럴 리 없어요. 분명 무슨 이유가!’

아란티아느는 계속해서 비야르키나가 대륙을 배신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었다. 그가 바다로 도망치기 전까지도 말이다.

“그리고 아란티아느는 비야르키나를 만나기 위해 밤부소 숲을 몰래 찾았을 테고.”

“빌어먹을.”

아쉬토를 바라보는 쿰바의 눈에 연민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호인족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세 영웅의 비극에 대해서는 그 역시 알고 있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베릭 대륙과 관련이 되었다면 이건 우리 종족의 선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겠군.”

“칠제들에게 연락을 하겠다.”

수인 왕국을 대표하는 두 영웅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불과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수인족의 권력을 놓고 다툼을 벌이던 사이였지만, 루베릭 대륙의 존재가 등장한 이상 함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조상님들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 되겠지만 밤부소 숲을 샅샅이 조사해야겠어. 마침 잘됐군. 혈기 넘치는 젊은 녀석들에게 루베릭 대륙의 무서움에 대해서 알려주게 되었으니 말일세.”

쿰마가 나직하게 콧바람을 불었다.

* * *

“생각보다 저항이 세군.”

“죄, 죄송합니다, 폐하.”

“아아. 너를 탓하려는 건 아니다. 볼 붸르니체스.”

쉐르난비체는 온몸에 큰 상처가 난 상급 마족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동자로 코르다로 진군하는 마족 병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코르다의 인시네라 호수는 이미 마족의 병사들로 빼곡했다. 결국 마족들의 계속된 공격을 버티지 못한 소환자 윤호는 지크 로리의 수성을 포기하고 코르다로 후퇴했다. 그리고 쉐르난비체는 곧바로 코르다를 향해 병사들을 진격시켰다.

모든 병사가 코르다로 향한 것은 아니었다.

리스티 든이 이끄는 군단은 지크 로리에서 남하, 바리안스의 대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다. 부하의 보고에 따르면 리스티 든은 아트리그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이스파한 쪽으로 진군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 녀석들은?”

“아직 움직임이 없습니다."”

“흐으응. 움직이지 않을 생각인가? 이거 실망인데.”

부하의 보고에 쉐르난비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전쟁에서 그녀의 관심을 끈 적은 하나의 마장기 편대 밖에 없었다.

황금색과 검은색 그리고 붉은색의 마장기로 이루어진 편대였다. 자신이 아닌 다른 마족이 나섰다면 틀림없이 곤경을 면치 못했을 정도로 실력들이 제법이었다.

그리고 쉐르난비체는 자신을 막아선 마장기의 오너 중 한 명이 소환자 윤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크탈나스와 관계가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소환자 윤호와 전투를 벌이면서 쉐르난비체는 그에게서 크탈나스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굉장히 미미한 수준에 불과했다. 게다가 소환자 윤호의 곁에는 리그너스 대륙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종족이 함께하고 있었다. 바로 루베릭 대륙의 하이 엘프였다. 오히려 크탈나스의 기운은 윤호보다 그녀에게서 더욱 짙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쉐르난비체는 하이 엘프와 크탈나스가 관계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루베릭 대륙의 여신이자 인피니티 나인을 수족으로 부리는 여신 카테지나와 관련된 하이 엘프의 비극 때문이었다. 그런 비극을 겪은 하이 엘프와 크탈나스와 모종의 관계를 맺었을 리 없었다.

“단순한 착각에 불과했던 건가?”

동쪽에서 느껴지던 크탈나스의 기운은 언제부터인가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 소환자 윤호와 하이 엘프와 마주친 이후로 보였다. 결국 자신이 느꼈던 것은 하이 엘프와 관련된 착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쉐르난비체는 소환자를 향한 자신의 공격을 멈출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상대가 약했더라면 실망을 한 채 그냥 물러났을 테지만 소환자의 군대는 그녀의 입에서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강력한 수준이었다. 그런 적들에게는 최선을 다하는 게 지배자로서의 도리였다.

“호 님을 위하여!”

“알르드의 평화를 지키자!”

외부에서 코르다 성으로 향하는 유일한 통로인 다리로 마족들이 접근하자 실버 문들이 숫자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인간족의 마장기도 함께였다.

“크하하하핫!”

상급 마족인 사운더러스가 즐겁게 고함을 지르며 상대의 마장기를 덮쳤다. 검 한 자루가 상대 마장기의 단검과 깡 하고 마주치며 불꽃을 만들어 냈다. 애송이는 아닌 모양인지 눈앞의 상대는 사운더러스의 공격을 무려 일곱 번이나 막아냈다.

상대의 마장기가 근접전에 취약한 엑스칼리버라는 것을 생각하면 제법 괜찮은 실력이었다. 하지만 헬 디아블로를 베이스로 한 A등급 전용기에 탑승한 사운더러스를 막아내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했다.

콰지직!

금속이 우그러드는 소리와 함께 사운더러스의 검이 엑스칼리버의 팔 하나를 잘라냈다. 그리고 사운더러스는 연달아 상대의 조종석에 검을 찔러 넣었다.

“크아아아악!”

“우리를 가로막은 자여! 고통으로 울부짖어라!”

조종석에 탑승한 것으로 추정되는 생명체의 비명소리에 사운더러스가 광기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무자비하게 엑스칼리버 한 기를 무력화시킨 사운더러스는 또 다른 사냥감을 찾아 이동하기 시작했다.

쾅! 콰쾅!

마족들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성벽 위에 배치된 골드 이글과 브뤼헤아 비쉬들이 쉴 새 없이 필사적으로 마력포와 마법을 발사했다. 하지만 상대의 수가 너무 많았다.

“공격! 코르다를 구원해라!”

아멘드마와 토갈론 요새에서 지원을 온 병사들은 코르다에서 반나절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상대가 워낙 대군인 터라 제대로 합류를 하지 못 한 채 마족들과 맞닥뜨린 결과였다\. 엘 라스엘을 비롯해 윤아와 김유진은 코르다로 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길을 뚫으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마족 병사들의 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쩌저적!

“서, 성문이?!”

“모두 피해! 성문이 무너진다!”

결국 코르다의 성문으로 마족의 마장기들이 붙었고, 강력한 힘을 지닌 강철 병기의 공격에 성문이 부셔지기 시작했다.

“제길!”

성문이 무너지는 모습을 본 호가 성문 앞으로 달려갔다. 인시네라 호수를 방패로 한 천혜의 요새임에도 불구하고 코르다 역시 인해전술을 당해내지 못한 것이다.

“엘 샤난은?!”

“비상통로를 통해 도망치는 엘프들을 통솔하고 있어요!”

“어떻게든 적들이 성 내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돼! 수인 사연성은 퇴로를 확보하고!”

빠르게 명령을 내리며 호는 성문을 지나 성내로 넘어오려는 타나스트급 마장기를 향해 자신의 대검을 휘둘렀다. 우지끈 소리와 함께 동체가 크게 찌그러진 마족의 마장기가 천천히 땅바닥으로 쓰러졌고, 호는 다시 한 번 상대를 향해 대검을 내리찍었다.

“쉐르난비체가 나타나면 무조건 도망! 그 이외는 최대한 적들을 막다가 킬리드로 후퇴한다!”

호가 소리쳤다. 하지만 다들 자신들의 패배를 직감한 모양인지 대답 없이 조용히 무기만 휘두를 뿐이었다. 코르다에 주둔하고 있던 마장기의 오너들은 연신 마족의 마장기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상대의 공격에 팔, 다리가 날아가도 어떻게든 중심을 잡고 MLC 를 겨눴다. 하지만 그런 처절함이 오히려 마족들의 흥분을 돋우고 있었다.

“만마의 지배자이신 쉐르난비체 폐하. 그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

그리고 뒤에서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쉐르난비체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대로 전투가 끝이 나는가 싶더니 마지막에 자신이 찾던 맛좋은 먹잇감이 등장한 것이다.

“급보입니다!”

그러나 쉐르난비체가 전투의 흥분에 몸을 내맡길 무렵 다급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꿰뚫듯 들려왔다.

만약 마족의 전령이었으면 그냥 무시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찾은 전령은 다름 아닌 수인 왕국의 전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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