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2
리그너스 대륙전기 282
“또 온다!”
“빌어먹을!”
루비아이가 달려드는 것과 동시에 세 여인이 눈이 휙휙 돌아갈 정도로 빠르게 난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배틀액스와 낫 그리고 채찍이 어우러질 때마다 날카로운 소리와 폭발음이 전장을 짓눌렀다.
붉은색과 검은색 그리고 황금색이 어우러지면서 주변을 초토화시키기 시작했고, 주위에 있던 마장기들은 그 기세에 못 이겨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유일하게 아니, 어쩔 수 없이 전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마장기가 있기는 했다. 마검 카시아움과 일대일을 펼치고 있는 호였다.
“실력이 제법이로구나!”
“제법은 무슨!”
띵동.
-한시진이 검의 길을 발동했습니다. 그녀의 공격은 앞으로 5분간 상대의 방어력을 무시합니다.
쉐르난비체의 감탄에 자존심이 상한 한시진이 낫을 대각선으로 휘둘렀고, 또 한 번 거센 폭음이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퍼져 나간 충격파는 멀리 떨어져 있던 SSS랭크의 병사인 실버 문조차 몸을 붕 뜨게 만들 정도였다.
“이거나 쳐먹어!”
띵동.
-한시진이 천화를 발동합니다.
한시진의 외침이 전장을 쩌렁쩌렁하게 흔들었다. 그와 함께 데스사이더가 하늘을 향해 뛰어 올랐다. 그러고는 양 손으로 자신의 낫을 꾸욱 잡았다. 한시진의 강력한 마력에 영향을 받은 데스사이더의 낫이 푸른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호오?”
쉐르난비체의 눈에 호기심이 맴돌았다. 상대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시진의 데스 사이더가 쉐르난비체가 탑승한 루비아이가 있는 곳을 향해 날카로운 바람을 날려 보내듯 자신의 낫을 연달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푸른색의 반월형 기운이 쏘아져 나가며, 지면을 무자비하게 폭격했다.
콰앙! 쾅! 콰쾅!
그 속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마치 다연장로켓이 발사라도 된 것 같은 장면이었다. 그렇게 마력의 대부분을 루비아이에게 쏟아 부은 한시진이 지면으로 착륙했다.
“……제길. 이건 완전히 사기잖아.”
그러고는 눈앞의 광경을 보며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모든 능력을 다한 공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루비아이는 조금의 흠집만이 났을 뿐 대체적으로 멀쩡한 모습이었다.
“투덜거릴 시간이 있으면 빨리 일어나!”
“나도 알아!”
브로리의 경고에 한시진은 끙 하고 신음성을 내며 조종간을 붙잡았다. 방금 전의 공격으로 마력의 대부분을 사용했으니 이제는 기운을 되찾을 때까지 미친 듯이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야 할 시간이었다.
* * *
일찌감치 호는 자신의 전력으로는 쉐르난비체의 친위 군단을 상대하는 게 힘들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공략본과 자신의 경험을 이용해 다른 종족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속도로 발전을 하고, 군사력을 높였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인 국력의 차이라는 게 있었다.
더욱이 상대는 제대로 움직였다 하면 온 대륙이 긴장을 하게 만드는 리그너스 대륙에서 전투력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종족인 마족이었다. 그리고 호는 쉐르난비체의 전투를 통해 마족의 무시무시함을 몸소 체감할 수 있었다.
“수인 왕국과는 차원이 다르네.”
전투에 나섰던 사십만의 병사 중 삼분의 일이 목숨을 잃었다. 현대전이었다면 사단 수십 개가 날아간 상황이었다. 마족들의 피해는 그보다도 컸다. 각종 버프를 받은 실버문과 브뤼헤아 비쉬의 조합은 호가 알고 있는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 최고의 조합이었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의 피해만 놓고 본다면 쉐르난비체와의 전투는 패배가 아닌 승리를 거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문제라면 아군은 병력의 삼분의 일이 날아갔고, 상대는 아직도 아군의 수배에 달하는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마장기의 피해는 오히려 아군이 컸다.
“빌어먹을 애송이들! 정신 똑바로 차리라니까!”
멀리서 브로리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호의 귀로 들려왔다. 그녀가 어째서 화를 내는지는 호 역시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이번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마장기의 오너들 대부분이 마장기전 경험이 다섯 번이 채 안 되는 신입들이기 때문이었다.
“마장기 전력까지 무너지면 곤란한데…….”
림드 산맥에서 모병된 병사들이 코르다를 거쳐 지크 로리로 넘어오고 있었지만, 문제는 마장기들이었다. 마장기의 생산은 문제가 없었지만 마장기를 다룰 수 있는 오너들이 부족했다. 현재 림드 산맥에서 생산이 가능한 마장기들은 전부 인간들의 마장기인 터라 다른 종족의 영웅들은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엑스칼리버는 원거리 포격전에는 강력한 모습을 보여도 근거리의 장비가 휴머니온 단검밖에 없어서 근접 전투는 상당한 숙련도를 요구했다.
결국 마족의 마장기가 근접전으로 파고 들어오면 그들을 막아낼 수 있는 엘리트 오너가 있는 게 아닌 이상 필연적으로 대열이 무너지면서 큰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마족과의 전쟁에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만마의 지배자 쉐르난비체였다.
‘……너무 강해요. 지금의 저는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요.’
‘그 녀석 정말로 칠제가 맞는 거야? 칠제 위에 또 무언가가 있는 거 아니야? 저런 괴물이 이 대륙에 일곱이나 된다고?’
가까스로 쉐르난비체의 손에서 도망친 한시진과 브로리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호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EX등급의 영웅이라니?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믿지도 않았을 정보였다. 지금보다 좀 더 군사력을 키운다면 수인 왕국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후회를 해 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중요한 건은 쉐르난비체를 어떻게 막아내느냐는 점이었다.
“지금 당장 영웅들을 승급시킬 수는 없는 노릇인데.”
S 나 SS등급의 영웅을 SSS등급까지 승급을 시키려면 그들이 선호하는 희귀한 아이템들이 다수 필요했다. 공략본이 있더라도 당장은 구할 수 없는 아이템들이었다.
‘지원군은…….’
자신에게 원군을 보내줄 정도로 우호적인 세력은 인간들밖에 없었다. 하지만 블루 스케일은 도움이 되지 않을 테고, 골든 크로우는 여기까지 오려면 최소 한 달 이상이 필요했다.
“후우.”
호를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만한 뾰족한 수가 나지 않았다. 결국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필사의 응전으로 쉐르난비체의 세력을 조금씩 깎아먹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그나마 실버문과 브뤼헤아 비쉬의 양성이 가능하기에 선택할 수 있는 전술이었다.
결국 끈질기게 방어전을 펼치면서 쉐르난비체가 물러나기를 기다리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모든 것이 그녀의 손에 달려 있는 셈이었다. 그렇게 호가 쉐르난비체의 공격에 전전긍긍하고 있을 무렵, 대륙의 끝자락에서는 커다란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쉬토! 썩 나오거라! 아쉬토!”
수인 왕국의 중심 도시이자 수도로 불리는 도시 사파리. 그런 사파리의 내성 안으로 커다란 곰 한 마리가 성큼성큼 들어오면서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내성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웅족 영웅의 목소리에 호인족 경비가 달라붙었다.
“아쉬토님은 지금 집무실에 계십니다.”
수인족의 왕이자 자신들의 영웅인 아쉬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웅족의 태도가 곱게 보이지 않았는지 호인족 경비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흥! 왕으로써의 책무가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이 집무실에 처박혀 있기는!”
“조심 하십시오! 아쉬토님은 수인 왕국의……. 케엑!”
웅족의 커다란 발톱이 경비의 목을 짓눌렀다.
“너야말로 말조심을 하는 게 좋을 걸? 내 이름은 쿰마! 웅족의 왕이자 클루나, 캄챠크, 켐벨을 다스리는 이 왕국의 대장로다!”
“흥. 자네가 대장로인 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을 걸? 경비가 지적하려고 했던 건 자네의 태도겠지.”
아쉬토의 목소리였다. 내성을 쩌렁하게 울리는 웅족의 목소리가 거슬렸던 모양인지 집무실에 나온 그는 이 층에서 쿰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태도? 고작 경비 주제에? 지적을 하려면 네놈들의 무례함이나 지적할 것이지!”
“무례함? 흥. 내 눈에는 미련한 곰 녀석이 행패를 부리는 것밖에는 보이지 않는데?"”
쿰마의 방문이 반갑지는 않은 모양인지 아쉬토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 녀석의 눈이 작으니까 그런 것밖에 보이지 않는 거다, 아쉬토! 네놈이 감히 우리 종족의 성지인 밤부소 숲에 호인들을 보내서 더럽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흥! 밤부소 숲에서 호인 두 마리가 죽은 채로 발견됐다! 보아하니 호인 영웅의 호위병이더군!”
“우리 종족이?”
아쉬토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호인과 웅족이 서로 반목하는 지금 웅족의 성지인 밤부소 숲에 찾아갈 멍청한 호인 영웅은 아무도 없었다. 그 때였다. 경비 중 한 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아쉬토님. 며칠 전 아란티아느님이 호위병 둘을 이끌고 순찰을 나가셨습니다.”
경비의 말에 아쉬토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경비가 말한 이는 바로 자신의 부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쉬토의 날카로운 눈이 곧바로 쿰마에게로 향했다.
“네놈이 감히! 내 여자를?!”
순식간에 아쉬토가 이층에서 뛰어내리며 쿰마의 앞으로 다가왔다. 으르렁거리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아쉬토의 모습에 쿰마는 콧방귀와 함께 자신의 커다란 손을 쫘악 펼쳤다.
“아란티아느가 어쨌든 간에 그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고. 중요한 것은 호인 두 녀석이 밤부소 숲을 더럽혔다는 것이다.”
“네놈이 아란티아느를 납치하고 호위병들을 죽인 후 밤부소 숲에 던져놓은 게 아니라?”
“밤부소 숲에? 우리 웅족들이? 나 참. 헛소리도 작작하는 게 좋을 걸?”
쿰마가 아쉬토를 바라보며 조롱하듯 말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웅족에게 밤부소 숲은 절대로 건드릴 수 없는 성지와도 같은 장소였다. 그리고 아쉬토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란티아느가 어째서?’
갑자기 그녀가 사파리 밖을 나갔다는 것도 이상했지만, 하필이면 간 행선지가 웅족의 성지인 밤부소 숲이라는 게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것도 고작 두 명의 호위병만을 데리고 나섰다는 것도 이상했다.
“우리 종족의 시체는?”
“가져왔다. 밤부소 숲의 짐승들이 조금 뜯어먹기는 했지만.”
쿰마가 손뼉을 짝하고 치자 웅족 몇몇이 들것에 실린 호인족의 시체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경비 한 명이 입을 틀어막았다. 시체가 썩는 냄새가 굉장히 고약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죽은 호인족의 얼굴을 본 아쉬토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얼굴이 익숙한 게 아란티아느의 호위병이 틀림없었다.
“……이 냄새는?”
어느새 내성을 가득 메운 끔찍한 악취 속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냄새에 아쉬토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는 시체 사이로 다가가 자신의 코를 들이밀었다. 욕지지가 올라올 것 같은 죽음의 냄새 속에 시큼한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던 냄새였다. 그리고 아쉬토가 얼굴을 들어 올렸을 때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킬리만자로의 냄새다.”
“……뭐라고?”
쿰마의 말을 무시한 채 아쉬토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호인족의 시체를 바라봤다.
시체에 난 상처로 추정해 봤을 때 호위병들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한 채 단숨에 목숨을 잃은 게 분명했다. 8 파신 오으든의 분신인 킬리만자로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확실해. 킬리만자로다.”
“말도 안 돼! 루베릭 대륙의 놈들이 어떻게 밤부소 숲에?!”
쿰마가 으르렁거리며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아주 잠깐 머뭇거리는 기색이 있었다. 그리고 그 낌새를 아쉬토는 놓치지 않았다.
“무엇을 알고 있는 거지? 쿰마? 똑바로 말하지 않는다면 널 가만두지 않겠다. 아니, 내가 가만히 있어도 대륙의 녀석들이 너희 부족을 그냥 둘 리 없겠군. 인피니티 나인이 관련된 일이니 만큼 대회의의 방패도 통하지 않을 거다.”
아쉬토가 히죽이며 말했다. 인피니티 나인의 제8 파신인 오으든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무시무시한 녀석들 몇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던 쿰마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