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1
리그너스 대륙전기 281
콰콰쾅! 쾅! 쾅!
커다란 굉음이 병사들의 귀를 때렸고, 폭발이 사방을 휩쓸었다.
“크아악!”
“아악!”
폭발에 휩싸인 것은 병사들만이 아니었다. 주위에 있던 마장기들 역시 피해를 입었고, 그중에는 퀸 캣츠의 오너인 리셴르나도 끼어 있었다.
“빌어먹을! 냐앙!”
적의 포격이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팔로 동체를 감쌌지만 조종석까지 전해져 오는 열기와 충격은 어쩔 수 없었다. 현대의 전차와 비슷한 형태를 한 마족의 C등급 마장기 기즈린은 수인 왕국의 마장기 카니앗산처럼 포격에 특화된 마장기였다. 근접전은 형편없었지만 장거리에서 쏘아대는 마력포의 파괴력만큼은 일품이었다.
물론, 마장기의 오너가 숙련된 자가 아니라면 명중률이 떨어진다는 단점도 있었다. 하지만 쉐르난비체의 친위군은 형편없는 명중률을 압도적인 숫자로 커버하고 있었다. 무려 백 여기에 달하는 기즈린들이 동시에 포격을 가하는 것이다.
그런 기즈린의 집중 포격에 SSS랭크의 병사들은 물론이고, 마장기들도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한, 두 대 정도는 몸으로 어떻게든 때울 수 있겠지만 백여 개에 달하는 마력포의 파괴력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어떻게든 저 빌어먹을 것들을 파괴해야 하는데!”
리셴르나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측면에서 파고들던 윙드 훗사르는 유령군마와 라임달의 방어에 가로막혔고, 실버 문들 역시 숫자로 밀어붙이는 마족들의 방어를 뚫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이런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에이스급 마장기사들이 나서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윤호군의 에이스들은 마족의 마장기들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멍멍멍!”
“꼬꼬댁 꼬꼬꼬꼬!”
“파괴! 혼돈! 어둠의 무서움을 보여주마!”
사드나인, 라쿤, 팔쿤, 웃소로 구성된 수인 사연성은 자신들의 수보다도 두 배나 많은 마족의 마장기를 상대로 접전을 펼치고 있었다. 특히 팔쿤은 상급 마족인 사운더러스를 상대로 영혼의 일기토를 펼치고 있는 중이었다. 전황을 단숨에 뒤집을 수 있는 실력자인 브로리와 한시진과 같은 엘리트 오너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쐐애애액!
“칫!”
제트기가 지나간 것 같은 소닉붐에 한시진이 얼굴을 구겼다. 방금 전의 소리는 마족의 신기라 불리는 마검 카시아움이 만들어내는 소리였다.
“저기다!”
투투투투투투투!
애로우 마법이 각인된 키마라이의 기관포가 카시아움의 움직임을 제한하기 위해 화망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카시아움은 살아 있는 생명체 마냥 그런 키마라이의 공격을 모조리 회피하며 날아들었다.
“또 온다! 시진아! 이번에도 너야!”
통신구를 통해 들려오는 연인의 목소리에 한시진은 머리를 차갑게 식히며 마장기의 컨트롤 패드를 주시했다. 붉은색의 점이 깜빡이며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무협지에 나오는 이기어검도 아니고 진짜 쫄래쫄래!”
데자뷰도 아닌 것이 벌써 이런 상황이 몇 번이나 반복되고 있었다. 칼날로 인해 빛나는 은빛의 궤적을 확인한 한시진이 데스 사이더 -화랑을 움직였다. 그러고는 화랑의 낫에 자신의 마력의 불어넣었다.
카아아앙!
잠시 후, 데스 사이더의 낫과 카시아움이 부딪치며 원형의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카시아움이……!”
“저 마장기사는 대체 누구지? 쉐르난비체님의 공격을 벌써 몇 번이나 막아내는 거야?!”
그리고 그 장면을 목격한 몇몇 마족의 마장기사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족의 신기 카시아움이 피를 보지 못한 채 멈췄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상대의 마장기사는 벌써 몇 번이나 카시아움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호오. 제법이구나.”
사방으로 충격파가 퍼져 나가는 모습을 보며 쉐르난비체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분명 검은 악마라고 했던가?”
마족의 심장이라 불리는 데스 사이더를 베이스로 한 전용기에 탑승한 상대 마장기사의 실력이 제법이었던 탓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요행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시아움은 벌써 몇 번이나 데스 사이더의 낫에 가로막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흥미를 끄는 마장기사는 데스 사이더의 오너만이 아니었다.
“캬아아아아아!”
어디선가 들려오는 포효 소리에 쉐르난비체의 마장기 루비아이가 폴짝 뒤로 수 미터 가량 물러났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쉐르난비체가 있던 자리로 거대한 덩치의 마장기가 허공에서 떨어져 내렸다. 원인족의 전설적인 마장기 코우랄라였다.
“이거나 쳐먹어!”
묵직한 크레이터를 만들어 내며 지면으로 착륙한 브로리는 순식간에 땅을 박차고는 정면의 루비아이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커다란 주먹이 공기를 찢어발기며 파괴적인 기세로 날아들었다. 단숨에 루비아이를 찌그러뜨릴 것 같은 위력적인 공격이었다. 하지만 마력을 끌어올린 루비아이도 어느새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터어엉!
“크윽……!”
주먹과 주먹이 맞부딪치면서 느껴지는 엄청난 반발력에 브로리가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는 정면을 바라보며 인상을 버럭 썼다.
“젠장할! 더럽게 세네!”
코우랄라는 뒤로 튕겨져 나간 반면에 루비아이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있었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만만치 않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만마의 지배자 쉐르난비체의 강함은 자신의 예상 이상이었다.
“세 명이서 가까스로 한 명을 붙잡는 꼴이라니.”
호도 브로리와 같은 생각이었다. 쉐르난비체가 아무리 SSS등급의 영웅이라 해도 브로리와 한시진 그리고 자신이라면 제압은 불가능해도 어느 정도 백중세는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생각한 근거도 충분히 있었다. 이미 쉐르난비체의 전투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통해 경험해 본 바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완벽한 오산이었다. 일단 자신이 알고 있던 전제 조건부터가 틀려 있었다.
<영웅 정보(Status)>
1. 이름 : 쉐르난비체
2. 성별 : 여(44444)
3. 종족 : 마족
4. 소속 : 서큐버스
5. 레벨 : 1550
6. 직업 : 만마의 지배자(EX)
7. 세부능력
통솔 : 1239 / 2000(EX)
무력 : 1264 / 2000(EX)
지력 : 431 / 500(S)
정치 : 499 / 500(S)
매력 : 927 / 1000(SSS)
8. 특성 : 만마의 지배자, 마검 카시아움, 매혹의 발톱, 공포의 오라, 인페르노, 진정한 포식자, 서큐버스의 악몽…….
‘EX등급이라니!’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등장하는 쉐르난비체는 SSS등급의 영웅이었다. 아니 애당초 가상현실게임에는 EX등급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다. 그렇기에 호는 당연히 쉐르난비체도 SSS등급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이제껏 자신이 정보를 확인했던 영웅들은 전부 SSS등급이하의 영웅이었기 때문이었다.
브로리와 로우덴도 니나 다니엘레나 리셴르나, 골든 크로우의 그나이 칼츠만과 같은 다른 종족의 유명 영웅들도 그랬다. 하지만 칠제는 리그너스 대륙의 정점에 있는 영웅들이었다.
“제길. 인피니티 나인인가 뭔가 그딴 녀석들이 등장했을 때부터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어야 했는데……!”
공략본의 정보를 맹신했던 게 실수였다. 인피니티 나인의 병사들이 EX등급이라면 그들과 적대관계에 있는 리그너스 대륙의 중심 영웅들 역시 그 못지않은 등급이라고 생각했어야 했다. 분명 쉐르난비체와 동급의 영웅들은 공략본에 나와 있는 등급보다도 훨씬 높은 등급을 지녔을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안이함을 자책하기에는 이미 상황은 벌어진 후였다.
“왼쪽으로 파고 들어갈게요!”
“오케이!”
통신구에서 브로리와 한시진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쉐르난비체의 루비아이를 협공할 생각으로 보였다. 호 역시 키마라이 -플레임이 검을 상단으로 세우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한시진과 브로리가 루비아이를 노리고 달려든다면 자신에 해야 할 일은 하나 밖에 없었다. 호의 눈에 빙글빙글 돌고 있는 카시아움이 들어왔다.
“흐아아앗!”
마력을 불어넣은 키마라이의 대검이 카시아움을 후려쳤다. 루비아이 자체만으로도 엄청나게 강력한 마당에 쉐르난비체의 손에 카시아움이 들어간다면 한시진과 브로리로는 승산이 없었다.
‘쉐르난비체와 카시아움은 무슨 일이 있어도 따로따로 공략해야 함!’
‘자신의 전력에 자신이 있다면 쉐르난비체의 손에 루비아이 쥐어주고 공략해도 상관은 없음. 다만 결과는 책임 못짐’
‘천족 유저입니다. 쉐르난비체를 가장 막판에 공략했는데, 동급 영웅 다섯 명이 달라붙어서 가까스로 붙잡았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마검 카시아움과 만마의 지배자 특성은 개사기입니다.’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하던 수많은 유저들이 입을 모아 말했던 쉐르난비체의 위용이었다. 그만큼 카시아움을 손에 쥔 쉐르난비체의 강력함은 끔찍할 정도였다.
카아아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대검에 얻어맞은 카시아움이 뒤로 휘청 물러나더니 열이라도 받았는지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호 역시 키마라이의 대검에 자신의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카시아움이 키마라이를 향해 괴상한 각도로 파고들었다.
카캉! 캉! 텅!
“큿!”
쉐르난비체의 특성인 인페르노의 영향일까? 카시아움과 부딪칠 때마다 후끈한 열기가 호의 조종석을 휘감았다. 당장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겠지만 전투가 오래 지속되다보면 분명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호는 열기에 신경을 쓸 정신이 없었다. 마검 카시아움이 조종석을 노리고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호가 카시아움을 맡는 동안 브로리와 한시진은 루비아이를 상대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흐리야압!”
브로리가 장작을 쪼개듯 루비아이를 향해 배틀 엑스를 그대로 내리그었고, 한시진의 데스사이더는 가로로 낫을 세워 상대를 상하로 분리시켜 버릴 기세로 베어 들어갔다.
“좋았……?!”
루비아이의 동체에 낫이 걸리며 불꽃이 튀어 오르는 모습을 보며 한시진이 탄성을 터뜨렸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마치 바람처럼 손에서 느껴졌던 감각이 순식간에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루비아이의 신형이 잔상처럼 흐릿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조심해!”
그리고 들려오는 브로리의 경고성에 한시진은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올렸다. 어느새 이동을 했는지 루비아이가 자신을 향해 발을 올려 차고 있었다.
터어엉!
단단한 장갑을 꿰뚫고 들어오는 엄청난 위력에 데스 사이더의 커다란 동체가 부서진 파편들을 흩뿌리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한시진이 나가떨어지는 모습에 브로리가 주먹을 휘두르려다가 멈칫하고는 루비아이와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수인족의 본능이 그녀에게 위험을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치가 빠르구나, 아가야.”
쉐르난비체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브로리는 자신도 모르게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러고는 자신의 본능에 고마움을 보냈다. 방금 전, 공격에 들어갔으면 분명 돌이킬 수 없는 사단이 벌어졌을 게 틀림없었다.
‘리그너스 대륙의 패권을 노리는 칠제들은 전부 이런 존재였어?!’
리스만을 탐하며 강한 무력으로 모두를 짓누르던 시절, 브로리는 언제나 수인 왕국의 제왕 아쉬토와 비교를 당했었다. 둘 다 황금색의 마장기를 사용하는 공통점 때문이었다. 개중에는 아쉬토보다 브로리의 실력이 훨씬 뛰어나다며 추켜세우던 녀석들도 있었다.
하지만 모조리 거짓말임이 틀림없었다. 그때 자신에게 아부를 했던 녀석들을 만나게 되면 뺨이라도 한 대 날려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수인 왕국의 제왕 아쉬토와 동급의 존재라고 평가받는 쉐르난비체는 자신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했다. 까놓고 말해서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자체가 들지를 않았다.
“제길. 그러니까 빨리 짐승신의 축복을 내려달라고 했잖아…….”
브로리의 원망스러운 시선이 카시아움을 상대로 전투를 펼치고 있는 호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카시아움을 붙잡고 있는 호는 그런 브로리의 투덜거림에 대답을 해 줄 여유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