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0
리그너스 대륙전기 280
아트리그를 출발한 호가 지크 로리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늦은 시간이었다.
리스티 든과의 전투 이후에도 지크 로리는 계속해서 마족들의 공격을 받았다.
덕분에 호와 일행들은 지크 로리의 성벽 군데군데가 파여 있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마장기의 잔해로 추정되는 금속 조각들도 발견할 수 있었다.
“휘유. 엄청났나 보네.”
지크 로리의 처참한 모습에 호는 혀를 내둘렀다. 강력한 마나 보호막이 걸린 성벽 이라는 높은 등급의 건축물임에도 불구하고 성벽이 저런 꼴이면 전투가 어땠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하기야 메시지가 쉴 새 없이 날아들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개중에는 성이 함락당하기 일보직전의 내용들도 있었다.
“이거 심한데?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거지?”
“그러게. 마장기가 저렇게 만든 건가?”
병사들이 나누는 대화에 호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성벽의 가운데에 큼지막한 구멍이 뻥하고 뚫려 있었다. 마장기의 마력포 공격에 직격당한 것으로 보였는데 용케 무너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워, 원군이다!”
“호 님이다! 호 님이 오셨다!”
“만세! 만세! 호우!”
호의 군대를 발견한 지크 로리의 병사들이 성벽이 무너질 기세로 환호성을 터뜨렸다. 리셴르나의 신들린 전술로 지크 로리에 쳐들어왔던 마족들을 모조리 물리치며 시간을 끄는 데 성공했고, 드디어 원군이 도착한 것이다. 그렇게 군트락에서 출발한 호의 본대가 지크 로리에 도착했다.
“아, 굉장히 빨리도 왔군.”
지크 로리의 내성 앞에서 초췌한 얼굴의 묘인 영웅이 호를 올려다보고는 지친 미소를 지었다. 전투의 격렬함을 말해주듯 멀쩡했던 내성의 외관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마족들의 공세가 대단했던 모양인데?”
“아아. 애송이들만 잔뜩 몰려오더군. 혈기가 넘치는 애들이라 그런지 체력이 팔팔한 게. 후우.”
리센르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호의 뒤쪽에 도열한 마장기들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오호. 저게 피닉스, 프랭스, 타우러스, 코우랄라인가?”
“맞아. 전설로만 내려오던 수인족의 마장기들이지.”
“이야. 저 마장기들이 정말로 있는 녀석들이라니. 그렇다면 알바트로스 역시 전설이 아니라는 이야기인데…….”
그녀의 커튼블루 색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번뜩였다.
“혹시 스타핖드고냥에 대한 이야기는 없어?”
“……스타필드고냥?”
“그래. 그런 쇼핑복합……. 아니아니. 우리 묘인들의 전설로 내려오는 마장기지. 우리들은 줄여서 스타냥이라고 부르지만.”
“스타냥이라.”
호는 어색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묘인족의 중심도시가 포함된 영토를 차지한 게 아니라 그런지 묘인들의 전설로 내려오는 마장기에 대한 퀘스트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알바트로스를 얻기 위해서는 묘인들 말고도 일곱 종족의 마장기들을 더 찾아야만 했다.
“아직 얻은 정보는 없어. 하지만…….”
“하지만?”
“다른 종족들의 마장기를 얻은 것처럼 묘인족의 마장기 그 뭐였지?”
왠지 익숙하면서도 독특한 이름을 떠올리며 호가 고개를 갸웃하자 리셴르나가 재빠르게 말했다.
“스타냥.”
“그래. 스타냥도 언젠가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흥흥흥. 그렇단 말이지.”
호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리셴르나의 시선이 호에게 붙박였다. 그러고는 격렬했던 전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퀸 캣츠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퀸 캣츠의 너덜너덜한 모습들이 보이지? 수리를 할 시간도 없이 계속해서 전투에 나서야만 했다니까.”
“꽤나 고생했겠군.”
“그래. 게다가 마족의 녀석들은 A등급 마장기를 베이스로 한 전용기인데 퀸 캣츠는 고작 B등급 마장기를 베이스로 했다고.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는 너도 마장기사니까 잘 알고 있겠지? 게다가 얼마나 저돌적으로 밀고 들어오던지. 십이멀인 이 몸이 아니었다면 지크 로리는 이미 무너졌을 거라고.”
자신의 전적을 자랑하는 양 양팔을 흔들며 말을 하는 리셴르나의 모습에 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 지 눈에 훤히 보였다.
“스타냥을 얻게 되면 꼭 부르도록 하지. 마장기의 오너로.”
“나이스. 역시 넌 최고야.”
자신이 원했던 대답에 얼굴이 환하게 트인 리셴르나가 호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하지만 스타냥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마족 녀석들을 물리쳐야 해. 쉐르난비체나 상급 마족들의 동태에 관해 들어온 정보는 있어?”
리셴르나와 함께 내성으로 들어가면서 호가 물었다. 메시지라는 존재로 인해 전황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지만 세부적인 내용까지는 알지 못했다.
“사운더러스가 아멘드마를 공격하다가 물러났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아멘드마에 있는 소환자의 활약이 엄청났다던데?”
“아아…….”
리셴르나의 입에서 나온 소환자는 호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메시지라는 정보통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멘드마 공방전에서 상당한 수준의 활약을 펼친 인물은 바로 군단의 소환사 신윤아였다.
‘천성인건가?’
수인 왕국의 소환자로 처음 만났을 때의 윤아는 단순히 겁 많은 소녀에 불과했었다. 비록 경험치를 몰아주는 방식으로 여러 퀘스트를 함께하면서 S등급으로까지 성장을 시키기는 했지만 그렇게까지 큰 기대는 없었다.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한 경험은 있다지만 어디까지나 즐겜 유저의 수준에 불과했고, 게임과 현실과의 괴리감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쉬이 이겨내기 힘든 수준의 격차가 있던 탓이다.
그래도 소환 계통 마법에 재능이 있어 보인 터라 훗날 SSS등급의 클래스인 디멘션 서머너로 전직을 한다면 여신 라헬과의 전쟁에서 도움이 되지는 않을까 하고 생각한 게 윤아에 대한 호의 평가였다.
하지만 현재 그녀는 대규모 무효화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김유진과 함께 마족들의 손에서 아멘드마를 지켜내는 일등공신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말고도 다른 소식은? 쉐르난비체의 움직임이라던가?”
“글쎄. 쉐르난비체는 커티삭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 같은데 아직까지는 움직임이 조용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도 없으니 괜스레 불안하단 말이지.”
“그런가…….”
리셴르나의 말에 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야 어찌어찌 막아내기는 했지만 쉐르난비체가 움직이는 순간 이 지크 로리는 순식간에 잿더미가 될 거야. 정찰을 다녀온 녀석들의 말에 따르면 커티삭에 주둔하고 있는 마족 병사들의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고 하더군.”
“그녀의 친위군단이 모조리 왔으니 그럴 만도 하지.”
“아아. 젠장할. 캣닢 말리네. 쉐르난비체의 친위군단이라면…….”
침이 마르는지 리셴르나가 입을 쩝쩝거렸다.
“마족이 자랑하는 군단이 통째로 움직인 거잖아?”
병사의 수만 해도 수백만이었고, 마장기 역시 수백 기가 포함된 대군이었다. 문제는 그 많은 병사들이 쉐르난비체의 명령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는 점이었다. 명령계통에 통일되지 않았던 수인족의 종족 연합군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커티삭을 탈환할 생각은 없는 거지?”
“물론이지. 방어만 하는 것도 벅찰 거다.”
자신의 대답에 안심한 표정을 짓는 리셴르나를 보면서 호는 커티삭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까지는 용케 막아낼 수 있었지만 제대로 된 전쟁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마족의 무서움은 마왕 쉐르난비체가 직접 전투에 나섰을 때 그 진면목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호의 본대가 지크 로리에 도착한 지 이틀 후, 마왕 쉐르난비체가 루비아이를 이끌고 지크 로리로 향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 * *
세 마리의 호랑이가 해가 들지 않는 짙푸른 숲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한 마리는 순백과도 같은 흰 털을 지니고 있었고, 나머지 두 마리는 짙은 갈색 털이었다. 두 마리의 갈색 호랑이는 흰 호랑이의 앞과 뒤에서 움직였다. 그러고는 수상한 장소가 보이면 흰 호랑이가 먼저 움직이기 전에 달려가 킁킁 냄새를 맡거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커다란 앞발로 땅을 파헤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용케 찾아왔군.”
호랑이 무리들이 짙은 숲 안으로 들어서고 얼마나 이동했을까? 호랑이 무리의 앞에 검은색의 털을 지닌 짐승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었다. 날카로운 발톱과 손톱 그리고 긴 꼬리. 얼핏 보면 동족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서로가 비슷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많은 부분이 달랐다.
그리고 세 마리의 호랑이가 천천히 뒷다리를 이용해 일어서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그 내용이 사실일 줄이야! 비야르키나! 당신이 어떻게 이곳에?!”
흰 호랑이, 아란티아느가 말했다. 검은 짐승을 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사시나무처럼 떨 듯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비야르키나라고 불린 검은 짐승 역시 뒷다리를 이용해 몸을 일으켰다. 단단한 근육질의 그는 수많은 전투를 치렀던 모양인지 몸 여기저기에 흉터들이 가득했다.
“어떻게 넘어오기는? 배를 타고 왔지.”
“배? 설마?!”
“워워. 그대가 생각하는 건 아니니까, 진정하라고. 기껏해야 이십 명도 안 되는 인원이 탑승할 수 있는 조그마한 배니까. 카테지나의 힘이 영 신통찮아서 그랜드 라인도 가까스로 통과했다고.”
말과 함께 비야르키나가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아란티아느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한테 다가오지 말아요. 비야르키나.”
“오랜만에 본 친우에게 너무 쌀쌀한 것 아니야?”
“친우? 하! 그대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던가요? 종족의 배신자가? 착각하지 말아요, 비야르키나.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그대의 존재를 확인하고 아쉬토에게 당신이 이 리그너스 대륙에 나타났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예요.”
“아쉬토라…….”
비야르키나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 녀석이 아직까지 살아 있단 말이야?”
“흥. 말조심 하는 게 좋을 거예요. 아쉬토는 지금 수인 왕국을 다스리는 제왕이니까. 카테지나에 꼬임에 넘어가 대륙을 등지고 종족을 배신한 당신과는 다르다고요.”
아란티아느의 말이 끝나자 비야르키나의 얼굴에 다양한 감정들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그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분노였다.
“그 녀석이 수인족의 제왕이라……. 그렇단 말이지. 이거 재미있겠는 걸?”
아란티아느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비야르키나의 목소리에서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던 도중 이상한 냄새가 그녀의 민감한 코를 톡 건드렸다.
‘어?’
어디선가 맡아본 적이 있는 시큼한 냄새였다. 분명…….
“설마?!”
아란티아느가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써걱하는 소리와 함께 피 냄새가 숲 전체로 퍼졌다. 호인족 두 명을 죽인 이들은 검붉은 털을 지닌 짐승이었다. 그리고 아란티아느는 그 짐승의 정체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키, 킬리만자로가 어떻게 여기에?!”
그녀의 입에서 경악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킬리만자로. 인피니티 나인 중 하나인 8 파신 오으든의 분신들이었다.
“설마 비야르키나 당신! 대체 이게 무슨 짓이죠?!”
리그너스 대륙의 공적인 인피니티 나인의 분신을 본 아란티아느가 비야르키나를 휙 돌아보며 윽박질렀다. 하지만 비야르키나는 자신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듯 초연한 태도로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별거 아니야. 그리고 오으든이 8 파신이라고 했던가?”
습기 찬 땅을 밟으며 비야르키나가 아란티아느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아란티아느를 바라보는 비야르키나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예전이야 그랬겠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고.”
비아르키나의 커다란 손가락이 아란티아느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지금부터 그 예쁜 머릿속에 잘 기억해 두라고. 인피니티 나인의 8 파신의 이름은 오으든이 아니야. 바로 나 비야르키나라고.”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당신이……?!”
“말이 왜 안 돼? 왜? 여기 그 증거들이 있는데.”
두려움으로 가득한 아란티아노를 보며 비야르키나가 양팔을 활짝 폈고, 킬리만자로들이 낄낄거리며 웃는 소리가 그녀의 귀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루베릭 대륙의 파신이 리그너스 대륙에 모습을 드러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