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9
리그너스 대륙전기 279
리셴르나 샤룩스.
캣닢 중독자이며 종이 상자를 모으는 취미가 있는가 하면 아슬아슬하게 무언가가 걸쳐져 있는 모습을 보면 심술궂은 미소를 지으며 스윽 밀어버리는, 묘인의 대표적인 특성들을 누구보다도 본능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게으른 영웅이었다.
하지만 게으르다는 것이 결코 무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과거 수인 왕국의 십이멀로 오랜 시간 동안 바리안스의 대지의 패자로 군림하던 그녀는 드워프와 마족들을 상대로 여러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뒀으며 그 결과로 사막의 꾀주머니 혹은 스킬라드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맹장이기도 했다.
“성문을 열어라!”
처음 리셴르나는 지크 로리의 성벽을 이용한 농성전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자신의 생각을 바꿔야만 했다. 눈에 보이는 마족 마장기들의 수와 화력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농성전을 벌였다가는 지크 로리의 성벽이 마장기의 공격에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성벽이 무너지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둬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사방에서 밀려오는 마족의 병사에 결국 고사할 게 분명했다. 정보에 따르면 이번 전쟁에서 마족이 동원한 병사는 수인 왕국의 종족 연합군 때보다도 훨씬 많다고 했다.
게다가 성벽을 토대로 펼치는 농성전은 오히려 아군의 화력을 죽일 가능성이 높았다. 실버 문과 윙드 훗사르는 근접전에서 가장 뛰어난 효율을 발휘하는 병사들이었다. 성벽 위에 대기하는 것은 브뤼헤아 비쉬와 아르카니움 아처면 충분했다.
그런 이유로 인해 리셴르나는 마족들을 요격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물론, 정면으로 부딪칠 생각은 없었다. 마족과 많은 전쟁을 벌였던 그녀는 마족들의 장, 단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감히 이 몸을 상대하려고 하다니! 가소롭구나!”
헬 디아블로의 오너이자 마족의 S등급 영웅인 리스티 든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마왕인 쉐르난비체를 곁에서 모시는 데빌 기사단의 부단장으로 마족들 사이에서는 신성으로 떠오르고 있는 영웅이었다.
그리고 처음 그에게 지크 로리의 공략 임무가 떨어졌을 때 리스티 든은 속으로 환호를 터뜨렸었다. 소환자의 군대를 물리치고 공을 세울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더욱이 지크 로리를 지키고 있는 영웅이 수인, 그것도 묘인 영웅이라는 정보를 확인했을 때 그는 지금의 이 상황이 하늘이 준 기회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었다. 순수한 전투력만을 따지자면 묘인들은 수인 왕국의 종족 중에서도 하위권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당당하게 군대를 이끌고 온 자신을 상대로 지크 로리의 적들은 성문을 열고 나오고 있었다.
“적들이 다가온다!”
“무기를 높이 들어라!”
“어둠과 죽음 그리고 고통을!”
전투를 좋아하는 마족들이 그 모습을 보고 환호와 함성을 내지른 것은 당연한 바. 리스티 든 역시 어렵지 않게 승리를 거둘 것이라 생각하며 전투 명령을 내렸다.
“저 녀석은 내꺼다!”
그런 리스티 든의 시선은 상대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전용기에 고정되어 있었다. 짙은 회색으로 페인팅이 된 마장기였다.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였나?!”
자신을 노리고 달려드는 적기를 보며 리셴르나는 조종간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면으로 맞붙을 생각은 없었다. 자신의 마장기인 퀸 캣츠는 B등급 마장기가 베이스였지만, 상대는 A등급 마장기인 헬 디아블로 급이었기 때문이었다. 힘 싸움으로는 이길 재간이 없었다.
“하지만 속도라면 다르지.”
중무장을 한 헬 디아블로와는 달리 퀸 캣츠의 무장은 마력 칼날을 만들어낼 수 있는 너클과 근접전에서나 사용이 되는 마력 권총이 전부였다. 서로 간의 무장차이가 상당한 터라 리스티 든은 승리를 확신하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는 눈앞의 적이 평범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빌어먹을 잔챙이들이!”
수많은 검광들이 번쩍였고, 강력한 폭발 마력이 담긴 붉은색 구가 떨어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알 수 없는 무언가가 헬 디아블로를 묵직하게 누르기 시작했다. 브뤼헤아 비쉬의 저주마법이었다.
“뭐야? 헬 디아블로에 타고 있기에 유명한 녀석인 줄 알았는데 괜히 쫄았잖아?”
자신의 전용기 퀸 캣츠의 조종석에서 SSS랭크 병사들의 견제에 허둥거리는 헬 디아블로를 보며 리셴르나는 자신의 손톱을 싸악 빼냈다. 전투를 좋아하는 종족답게 마족들, 특히 마족 마장기의 오너들은 피의 광기와 흥분에 취해 주변의 상황을 살피지 않고 무턱대고 전진하는 경향이 굉장히 많았다.
그 결과 마장기와 병사들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면서, 그 틈을 노린 적들에게 각개 격파를 당하는 일이 잦았다. 실제로 다른 종족들을 마족과 전투를 벌일 때 그 점을 이용해서 전투를 펼치곤 했었다.
하지만 전투에 이골이 난 상위 마족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방법이었고, 설령 마장기와 병사들의 사이를 떼놓았다 하더라도 압도적인 전투력을 보이는 마족의 마장기 편대에 오히려 본대가 우르르 무너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것도 바보 같은 녀석들이나 저지르는 실수고. 이 몸은 다르단 말이지.”
그러나 잡힐 듯 말 듯한 리셴르나의 신들린 움직임은 상대의 지휘관 리스티 든과 마족의 마장기 편대를 순식간에 병사들에게서 떼어놓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고립된 그들은 실버 문과 브뤼헤아 비쉬라는 SSS랭크인 병사들의 견제와 엑스칼리버의 집중 사격에 호되게 당하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괴된 것은 오히려 리셴르나의 자넷급 마장기 두 기 뿐이었다. 군데군데 뜯겨져 나간 곳은 있지만 마족의 마장기들은 아직까지 온전한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들의 전투력과 실력이 뛰어나다는 방증이었다.
“대열을 유지해라! 적들의 공세가 줄어들면 그때 치고 나간다!”
특히나 적들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마장기의 실력은 리셴르나 조차도 섣불리 덤벼들 수 없는 수준이었다.
“흥흥흥.”
하지만 리셴르나의 얼굴은 아무 걱정이 없다는 듯 평온했다. 오히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다.
“이제 슬슬 참을성 따위는 하나도 없는 녀석들이 움직일 때가 됐는데?”
리셴르나의 시선이 뒤쪽으로 향했다. 어느새 성 밖으로 나온 아르카니움 아처 부대들이 활에 시위를 매기고 있었다.
두두둥! 두두두둥!
은은한 빛을 내뿜는 화살들이 마족의 마장기들을 두들겼다. 마장기의 단단한 장갑을 뚫을 정도의 위력은 아니었지만, 충격을 조종석까지 보내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도발을 하듯 손바닥으로 툭하고 미는 것 같은 화살비의 묘한 느낌은 자존심이 강한 마족 영웅들의 인내심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리셴르나가 마장기에는 별 피해를 주지 못하는 아르카니움 아처 부대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린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크아아아아! 모조리 찢어 발겨주마!”
결국 키마라이에 탑승한 영웅이 도발을 참지 못하고 앞으로 뛰쳐나왔다.
“한 마리 낚았고.”
리셴르나가 자신의 손톱으로 통신구를 툭툭 두드렸고, 순식간에 벌어진 틈 사이로 실버 문들이 끼어들며 키마라이를 고립시켰다.
“헛! 모두들 길을 뚫는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리스티 든이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SSS랭크의 병사인 실버 문과 브뤼헤아 비쉬의 견제와 어느새 앞을 막아든 상대 마장기의 방어를 뚫어내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자! 그러면 사냥의 시간이다.”
그리고 이제껏 잠잠히 있던 퀸 캣츠가 마력 칼날을 빼내들었다.
* * *
지크 로리에서 펼쳐진 리셴르나와 리스티 든의 전투는 노련함을 앞세운 리셴르나의 승리로 끝이 났다.
데빌 기사단의 부단장인 리스티 든은 마족들 사이에서 촉망받는 유능한 인재였지만 안타깝게도 전쟁 경험이 부족했다.
리셴르나는 혈기 넘치는 리스티 든이 어떻게 움직일지 이미 알고 있던 것처럼 그를 자신의 함정으로 끌어들였다.
“제기랄! 고작 수인 영웅 따위에게!”
결국 리스티 든은 그런 리셴르나의 노림수에 제대로 당했고, 자신의 마장기 전력의 반 이상을 잃는 대패를 당하며 지크 로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병사들의 피해 역시 상당했다. 마장기가 없는 부대끼리의 격돌은 병종의 랭크와 사기가 높은 소환자 윤호의 군대가 압도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는 커티삭의 승리로 인해 기세를 높이던 마족들의 움직임을 잠시나마 주춤하게 만들었다. 특히나 엘 라스엘이 지휘하는 아멘드마를 공략하던 사운더러스의 군대가 뒤로 물러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는 동안 호의 군대는 제덴 사막을 지나 아트리그에 도착할 수 있었다.
“후우.”
아트리그의 익숙한 성채를 보며 호는 한숨과 함께 생각에 잠겼다. 군대와 함께 이동을 하면서 곰곰이 떠올려봤지만 쉐르난비체의 움직임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분명 자신을 응징하기 위한 움직임은 아니었다. 마족의 소환자였을 때도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림드 산맥을 거점으로 볼 붸르니체스와 전쟁을 벌였을 때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그녀였다.
괜히 리그너스 대륙의 집순이라는 별명이 붙은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쉐르난비체가 직접 움직여야 할 정도로 큰 사건이 마족들 사이에서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혹시나 이쯤 돼서 벌어지는 마족과 관련된 이벤트가 있는가도 싶었지만 공략본을 샅샅이 훑어봐도 얻어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붙어봐야 한다는 이야기네.’
정보원들이 보내면 쉐르난비체의 전력은 엄청난 수준이었다. SSS랭크의 병사들과 각종 유능한 영웅들을 보유한 지금의 자신도 맞붙는 것이 두려울 정도였다.
더욱 무서운 것은 마족의 전력이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더 늘어난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쉐르난비체의 전용기인 루비아이를 상대하려면 최소한 브로리와 한시진, 이 둘은 꼼짝없이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다. 아니, 호 역시 전투에 참가해야 할 가능성이 높았다. 마족의 신기 카시아움 때문이었다.
“호 님에게 세계수의 축복을!”
“묘인들의 영웅 호 님이시다냥!”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경비병들에게 예의상 미소를 지은 호는 천천히 아트리그 성 내의 계단을 올라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방문을 연 호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방의 주인인 자신보다도 먼저 도착한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어리스?”
“이번 마족과의 전쟁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 호를 향해 의자에 앉아 있던 하이 엘프가 몸을 일으켰다. 그런 에어리스를 보며 호는 방의 문을 닫고는 걸친 코트를 옷걸이에 걸었다.
“무슨 이야기죠?”
“마왕 쉐르난비체가 어째서 호 님을 노리고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는지 알 거 같아요.”
“뭐……요?!”
호가 놀라서 소리쳤다. 그런 호를 향해 에어리스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안타까움과 비슷한 감정으로 보였다.
“쉐르난비체는 호 님 때문에 이곳을 찾은 게 분명해요.”
“무슨 말이죠?”
“정확히 말하면 몇 주 전, 3 파신 크탈나스의 힘이 이 리그너스 대륙을 스치고 지나갔을 때 쉐르난비체가 그 힘을 느꼈었던 같아요.”
에어리스의 말에 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칠제와 인피니티 나인, 특히 쉐르난비체와 크탈나스는 사이가 좋지 않기로 유명해요. 철전지 원수라고 할 수 있죠. 3 파신인 크탈나스의 얼굴에는 큰 흉터가 나 있는데, 마족의 신기 카시아움이 낸 상처라고 알려져 있어요.”
“그런 쉐르난비체가 크탈나스의 힘을 느꼈으니……. 가만히 있지 못했겠군요.”
“맞아요.”
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결국 지금의 이 상황은 인피니티 나인이라는 빌어먹을 이레귤러가 남긴 엿 같은 상황에 불과했던 것이다.
더욱 엿 같은 것은 쉐르난비체가 움직인 이유를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호전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