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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너스 대륙전기-278화 (278/522)

# 278

리그너스 대륙전기 278

“젠장!”

욕설과 함께 느껴지는 아릿함에 호는 입술에 혀를 가져다 대었다. 비릿한 맛과 향이 혀끝을 타고 올라왔다.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던 모양이었다.

제법 따갑기는 했지만 현재 자신이 처한 빌어먹을 상황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쉐르난비체가 이끄는 마족의 친위 군단에게 커티삭이 공격을 받고 있었다.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벌어지고 있는 전투의 격렬함을 보여주듯 메시지가 쉴 새 없이 날아들고 있었다.

중요한 사건 사고가 벌어졌을 때만 메시지가 날아올 수 있게끔 했는데도 불구하고 띵동.거리는 소리는 머리가 아파올 정도로 끊임없이 들려왔다.

‘어째서 쉐르난비체가? 그 집순이는 갑자기 왜 움직인 거야?!’

만마의 지배자로 불리는 그녀가 왜 자신의 영토를 그것도 직접 공격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뭐, 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전쟁은 시작되었고, 커티삭은 무너지기 일보직전이었으니까. 아마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커티삭은 함락될 게 분명해 보였고, 전쟁의 불씨는 곧 붉은 핏빛의 대지로 퍼져 나갈 터였다.

쉐르난비체의 공격으로 호의 영토는 비상이 걸렸다. 토리아 요새에 주둔하고 있던 병사들은 아멘드마로 이동했고, 바리안스의 대지를 다스리는 군주 리셴르나 역시 지크 로리에 모든 전력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림드 산맥, 나크 평원, 디치 플레이스만등 영토 곳곳에 나눠져 있던 마장기들과 병사들도 시시각각으로 붉은 핏빛의 대지로 향하고 있었다.

덕분에 국경의 방어가 크게 취약해진 상황이지만 어쩔 수 가 없었다.

“마왕 쉐르난비체라니! 이거 엄청난 싸움이 될 것 같은데? 이 브로리님만 믿으라고!”

“침착해요, 오빠.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커티삭은 무사할 거예요.”

다급해 하는 게 눈에 보인 걸까? 자신을 부르는 한시진의 목소리에 호는 차분히 숨을 고르고는 그녀에게 말했다.

“땡큐. 안 그래도 초조함에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던 참이었어.”

“그런데 쉐르난비체라는 마왕이 움직인 게 확실한 거예요? 전령은 마족들의 군대가 나타났다고만 했는데…….”

“응. 확실해.”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단호하게 말하는 호의 모습에 한시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호의 뛰어난 직감과 이제까지 보여준 신비로운 능력 중 하나라고 이해를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마왕이라는 존재. 여성이었죠? 오랜만에 보네요.”

“선택의 신전에서 본 이후 처음이니까. 오년만이겠네.”

호가 말했다.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 선택의 신전에서 경험했던 일들은 아직도 기억이 선명했다. 대형 사마귀처럼 생긴 괴물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소환자들을 죽였고, 노예처럼 각 종족들에게 끌려 나가기도 했다.

호와 한시진을 포함해 스무 명 가량이 되는 소환자들 역시 마족의 소환자로 선택되었었다. 하지만 쉐르난비체의 시험에 가까운 공격에 대부분의 소환자들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가까스로 쉐르난비체의 공격을 피하고 살아남은 인물들은 다섯. 호와 시진을 포함해 그녀의 동생인 한시현과 아스트리드 벨 그리고 지금은 죽고 없는 카타리나 아키네라는 여인이었다.

‘그땐 그나마 인간들의 소환자가 되기를 바랐는데…….’

결과론적으로 보면 마족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결국 이렇게 자신만의 독립 세력을 갖출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인간들의 소환자였다면 또 어떤 상황이 그려졌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 살아남았던 사람들은 카타리나 아키네를 제외한 모두가 알르드의 일원으로 이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묘한 인연이었다.

“그 때는 진짜 무서웠지. 우리 세계에는 그런 괴물 같은 녀석들이 없었거든.”

“저도요. 전쟁을 경험한 탓에 죽음에는 나름대로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시현이가 있으니까 행동이 굉장히 조심스러워지더라고요.”

“하기야 그랬겠네.”

지금이야 많이 씩씩해졌지만 그때의 시현이는 평범한 일반인에 불과했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으로 큰 문제없이 이 세계에서 익숙해진 것을 보아하면 정말로 강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스트리드 벨도 마찬가지도 말이다.

호는 현재 브로리와 한시진을 비롯해 아쉬카로트, 니나 다니엘레 거기에 웃소가 추가로 포함된 수인 사연성을 이끌고 지크 로리로 향하고 있었다. 군트락에서 붉은 핏빛의 대지까지 가는 가장 빠른 루트이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크 로리까지는 최소 보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이럴 때 드워르기니만 있었어도…….’

호는 날렵한 외관을 지닌 드워프의 C등급 마장기를 떠올렸다. 수송, 이동, 기습에 특화된 마장기로 리그너스 대륙에 존재하는 마장기 중에서 가장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마장기였다. 만약 드워르기니만 있었다면 보름의 시간을 그 반 이하로 줄일 수 있었다. 마장기에 상처가 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운전을 조금 험하게 할 자신이 있다면 일주일 내에도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수많은 병사들과 보급 물품 및 다른 마장기도 수송을 하려면 엄청난 숫자의 드워르기니가 필요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주요 영웅들과 그들의 전용기만을 옮길 수 있어도 엄청난 도움이 되었을 터였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타임리스 상단에게 문의를 넣어봐야겠군.’

중고품이라도 몇 대 구할 수 있으면 이러한 위급한 상황에서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직접 개발을 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과 자원이 엄청나게 필요했다. 드워프의 마장기 연구는 마장기의 공통 기술 부문을 제외하면 백지 상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현재 공돌이들은 라이온레인 연구에 한창이었다.

그린 드래곤 레피스트 퓨리온은 이번 전쟁에도 나서지 않았다. 그녀는 소환자는 돕되 전투에는 직접 나서지 않겠다고 예전에 못을 박았었기 때문이었다.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도 내정에는 이용할 수 있지만 군사부문으로는 이용이 불가능한 이벤트 영웅들이 있었기에 낙담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바삐 지크 로리로 향하던 도중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느낌의 정체를 알아차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메시지가…….’

머리가 아파올 정도로 바쁘게 날아오던 메시지들이 어느새 잠잠해져 있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떠오른 메시지를 확인한 호의 입에서 낮은 침음이 흘러나왔다.

띵동.

-마족의 공격에 커티삭이 함락되었습니다.

-S등급 영웅 칸디르가 심각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치료를 받지 않으면 칸디르는 사망합니다.

-S등급 영웅 칸디르가 포로로 붙잡혔습니다.

-A등급 영웅 리수진이 포로로 붙잡혔습니다.

마왕 쉐르난비체가 직접 나선 이상 버티는 것이 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커티삭이 함락되었다는 메시지를 보자 가슴이 세차게 요동치고 있었다. 이제까지의 상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력한 적의 등장이었다.

* * *

"어, 엄청난 수가 몰려오는데요? 발자국 소리를 헤아릴 수가 없어욧.”

땅바닥에 귀를 대고 있던 토끼족 영웅이 얼굴을 찌푸리고는 길쭉한 귀를 파닥파닥 흔들며 일어났다. 자리에 있는 많은 영웅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크냐아아앙!”

그리고 한 묘인 영웅이 성난 고함을 내질렀다. 지크 로리의 최고 통솔권자이며 수인족의 십이멀인 리셴르나였다.

“빌어먹을! 젠장할! 썅! 대체 내 묘생은 왜 이런 거야!?”

수인족의 십이멀이었다가 대세를 읽고 호에게 몸을 의탁한 게 불과 1 년도 되지 않은 일이었다. 새로운 세력에 들어온 만큼 리셴르나는 어떻게든 호의 세력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전쟁에 참여했고, 그 보상으로 원래 다스리고 있던 바리안스의 대지의 군주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캣닢의 성지인 아트리그에서 뒹굴뒹굴 꿈같은 시간을 보내면 참이었다. 마족의 본격적인 침공이 일어나기 전까지 말이다.

“결국 커티삭은 함락이 된 모양이군요.”

“칸디르라는 천족의 10 천사가 지키고 있지 않았어? 이렇게나 빨리 무너졌다고?”

“마왕 쉐르난비체가 직접 나섰다고 하더군.”

“쉐, 쉐르난비체?!”

만마의 지배자이자 리그너스 대륙의 칠제 중 한 명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여기저기서 두려움에 찬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칠제의 위명과 공포가 뼛속까지 각인된 탓이었다. 하지만 모든 영웅들이 전의를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냥냥. 지크로리 만큼은 사수해야 돼. 지크로리가 뚫리면 그 다음은 아트리그라고!”

“캣닢의 성지만큼은 목숨을 걸고 지키겠다!”

“성전! 성전! 성전! 냥냥! 성전을 벌이자!”

바로 묘인들이었다. 그들은 캣닢의 성지로 명성을 떨치면서 묘인의 낙원이자 이상향이 된 아트리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며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으으음…….”

리셴르나의 입에서도 깊은 침음이 흘러나왔다. 지크 로리가 무너지게 된다면 그 다음은 아트리그였다. 문제는 지크 로리와는 달리 아트리그에는 별다른 방어시설이 없다는 점이었다. 결국 지크 로리가 뚫리면 아트리그는 덤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제기이이일.”

이성은 쉐르난비체에게 대항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일단은 뒤로 후퇴해 윤호와 합류하는 게 가장 현명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자신에게 천국을 안겨다 주었던 질 좋은 캣닢들과 묘인들에게는 꿈의 도시가 되어버린 이상향은 리셴르나의 심장을 꽉 조이고 있었다.

“마장기는 몇 기나 되지? 아니, 쉐르난비체의 움직임은?”

“……삐이. 잘 모르겠는데욧.”

“다시 한 번 들어봐. 루비아이에 올라탔으니까 걸음 소리가 묵직묵직할 거라고.”

리셴르나의 말에 토끼족 영웅은 다시 한 번 땅바닥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눈이 좋은 영웅들도 성에서 가장 높은 장소를 찾아 올라가 마족 군대의 동태를 확인했다.

“쉐르난비체의 움직임은 모르겠어요. 다만, 고 등급 마장기로 추정되는 묵직한 소리는 들렸어요.”

“마족 녀석들의 A등급인 헬 디아블로급 마장기는 보이는데. 루비아이면 빨간색 아닌가요?”

“빨간색 마장기는 없습니다!”

루비아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에 모두의 얼굴에 일순 희망이 감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관적인 상황은 아니었지만 칠제의 존재 여부에 대한 차이는 엄청났다. 더군다나 지크 로리에는 제법 많은 수의 마장기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바리안스의 대지에 있던 마장기들을 모조리 긁어모은 결과였다.

“쉐르난비체가 없으면…….”

“잘 하면 할 만하지 않겠어?”

리셴르나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여러 가지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지크 로리를 버리고 퇴각을 할까 싶었지만 마음은 내심 방어전에 쏠리고 있었다. 호의 본대가 빠른 속도로 지원을 오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고, 일단 쉐르난비체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리셴르나가 차분한 표정을 짓더니 주변의 영웅들을 둘러보며 외쳤다.

“모두들 전투 준비! 이 지크로리에서 마족들을 물리친다! 적들의 대장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쉐르난비체는 없는 것으로 파악됐으니까! 너무 겁먹지 말도록!”

“전쟁! 전쟁이다! 마장기 정비병에게 빨리 연락해!”

“퀸 캣츠를 준비해! 내가 직접 나간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칠제인 쉐르난비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충분히 할 만하다는 이야기였고, 시간만 끌 수 있다면 충분히 아트리그 아니 지크 로리를 지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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