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7
리그너스 대륙전기 277
“마족?! 마족의 병사들이다!”
“종을 울려라! 영웅들에게 연락하고 마장기를 가동해!”
지평선 너머로 볼 붸르니체스가 이끄는 군대가 모습을 드러내자 커티삭에 비상이 걸렸다.
“미친!”
종소리를 듣고 누구보다도 먼저 성벽 위로 달려온 칸디르는 마족의 병사들을 내려다보며 거칠게 숨을 뿜어내었다. 쉐르난비체의 손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오고 커티삭으로 무사히 귀환한 게 불과 반나절 전의 일이었다.
심지어 화이트 윙은 이제야 막 수리가 들어간 참이었다.
아무리 빨라도 하루, 평균적으로 이틀 정도는 걸리는 거리였다.
하지만 마족의 병사들은 하루도 채 되지 않아 커티삭에 그 끔찍한 모습들을 보이고 있었다.
“쉐르난비체……!”
칸디르는 무식하다고 밖에 생각이 들지 않는 마족들의 이러한 행동들이 쉐르난비체에 대한 고위 마족들의 과도한 충성심과 만마의 지배자에 대한 마족들의 맹목적인 추종 때문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 역시 비슷한 상황 속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마족들의 선두에는 상급 마족으로 추정되는 영웅이 탑승한 A등급 마장기 데스 사이더가 있었다.
“캬우우우우!”
거친 호흡에 따라 짙은 갈색의 근육들이 커졌다 줄어들었기를 반복했다. 살짝 휘어진 원뿔처럼 이마에 길쭉하게 솟아난 거대한 뿔은 호흡의 주인공이 미노타우루스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상급 마족 볼 붸르니체스였다.
“내가 다시 왔다, 커티삭!”
볼 붸르니체스의 눈에 들어온 커티삭의 모습은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수인들과 소환자의 세력이 제법 신경을 쓴 모양인지 성벽도 상당히 높아져 있었고,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건물들도 잔뜩 올라간 모습이었다.
하지만 볼 붸르니체스는 자신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만마의 지배자가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기에 물러설 생각도 없었다. 오로지 힘으로 상대를 박살낼 생각이었다.
“만마의 지배자께서는! 커티삭의 모든 것을 파괴하라고 하셨다!”
데스 사이더가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마족 병사들의 움직임도 조금씩 격렬해져갔다.
고된 행군으로 지칠 법도 했지만 그들은 곧 있을 살육에 대한 기대로 몸의 피로를 날려버리고 있었다.
취익! 취익! 스아아!
커티삭의 성벽이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하면서 마족 병사들이 성벽 위의 적들을 향해 소리를 내질렀다. 그와 함께 전장의 광기가 만들어내는 파동이 동심원을 그리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이제르론을 발사해라!”
차츰차츰 성으로 진군해오는 적들을 보며 칸디르가 외쳤다. 잠시 후, 성의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탑에서 길쭉한 무언가가 삐죽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엑스칼리버의 MLC 와 비슷한 생김새였지만 그 크기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컸다.
“이제르론 충전 중! 출력 30 ! 40 !”
“거리 200! 상대의 데스 사이더급 마장기를 노려라!”
“출력 80 ! 90 !”
시험 발사도 하지 못한 상황에서 치러지는 첫 실전이었지만 훈련을 받은 병사들은 자신들을 지휘하는 서큐버스 영웅의 명령에 따라 침착하게 데스 사이더를 향해 이제르론의 포신을 겨누기 시작했다.
“출력 100 ! 충전이 완료되었습니다!”
“발사아! 저 녀석들을 모조리 쓸어버려!”
서큐버스 영웅이 짱짱한 목소리로 외쳤고, 곧바로 리그너스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방어 병기 중 하나인 마동포 이제르론이 발사되었다.
구우우우우우
충전이 끝난 이제르론의 포신에 A등급 마장기 스무 대를 동시에 가동시킬 수 있는 마력이 뭉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콰아아아앙!
화산지대로 유명한 드래곤버스트 산맥의 화산들이 폭발하면 이러한 광경일까? 묵직한 소리와 함께 쏘아져 나간 마동포는 순식간에 데스 사이더를 꿰뚫었고, 뜨거운 열기와 함께 지면에 커다란 버섯구름을 만들어내었다.
“어, 어어…….”
그 압도적인 위력에 발사 명령을 내린 서큐버스 영웅은 물론이고, 성벽 위에서 전투를 준비 중인 SSS랭크의 병사들마저도 넋을 놓을 정도였다.
“보, 볼 붸르니체스님!”
엄청난 위력의 공격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마족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자신들의 지휘관을 찾았다. 이제르론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데스 사이더는 몸체의 삼분지 일 가량이 사라진 채 쓰러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 뜨겁게 달아올랐던 전장의 광기는 온데 간 데 없었다. 힘겹게 살아남은 병사들은 잿더미가 되어버린 동료들의 모습에 망연자실한 채 하나둘씩 자리에 주저앉았다.
“모두들 뒤로 후퇴한다! 빨리빨리 움직여!”
이제르론의 공격에 선두에 있던 B등급 마장기가 대다수 파괴되었다. 영웅들도 무사하지 못했다. 하지만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C등급 마장기들은 운이 좋게도 대부분이 살아남았다. 폭발의 진원지에서 제법 떨어져 있던 탓에 마장기의 장갑이 이제르론의 충격파를 막아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남은 영웅들은 혼란스러워하는 병사들을 통솔하며 명령을 내렸다.
“볼 붸르니체스님을 피신시켜라!”
운이 좋게도 볼 붸르니체스 역시 살아남았다. 천운이 내렸는지 이제르론이 마력포는 데스 사이더의 조종석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붉게 충혈된 눈을 비롯해, 거친 숨을 내쉬며 온몸에서 피를 흘리는 모습이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마족의 군대가 순식간에 괴멸한 모습에 칸디르는 멍한 표정으로 이제르론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이제르론에 대한 이야기는 10 천사인 그녀도 책을 통에서나 봤을 뿐이었다. 별다른 설명도 없었다. 리그너스 대륙의 가장 강력한 방어 병기 중 하나라는 게 내용의 전부였다.
그러나 설명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처참한 광경들은 어째서 이제르론이 리그너스 대륙의 가장 강력한 방어 병기라고 불리는지 그 연유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다. 어째서 자신을 영주로 임명한 윤호가 무슨 일이 있어도 가장 먼저 이제르론을 건설하라고 말했는지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르론을 사용해 볼 붸르니체스의 군대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준 것은 결과론적으로 봤을 때 실수나 다름없는 결정이었다. 이제르론의 위험성을 느낀 쉐르난비체가 직접 병사들을 움직여 커티삭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쩌저정! 콰아앙!
마족의 신기 카시아움이 하늘을 날며 커티삭 성의 방어 시설들을 모조리 박살 내고 있었다. 브뤼헤아 비쉬들이 저주마법을 이용해 카시아움을 무력화시키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엑스칼리버에 탑승한 영웅들이 MLC 로 카시아움을 노렸지만 마족의 신기는 살아 있는 생명체마냥 유유히 화망을 빠져나갔다.
“이, 이제르론이 파괴 됩니다!”
“모두들 도망쳐! 빨리 조종실 밖으로 나가!”
그리고 그렇게 박살 나는 방어 병기 중에는 엄청난 시간과 자원을 들여서 건설한 마동포 이제르론도 포함되어 있었다. 강력한 위력을 보이는 만큼 다시 이제르론을 사용하려면 최소한 여섯 시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기에, 볼 붸르니체스의 뒤를 이은 쉐르난비체의 공격에는 방어시설로써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캬카카카칵!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헬 디아블로급 전용기에 탑승한 사운더러스가 엑스칼리버의 팔 하나를 뜯어내며 광소를 토해냈다. 엑스칼리버의 오너 역시 A등급 영웅이었지만 마족의 베테랑 오너인 사운더러스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벽 위의 엑스칼리버와 자넷들은 자신의 몸을 도외시한 채 성벽 위로 올라선 마족의 마장기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호 님을 위하여!”
“적들에게 세계수의 분노를!”
“어둠으로 가득 찬! 절망을 당신에게 드리겠어욧!”
SSS랭크의 실버 문과 브뤼헤아 비쉬들도 분전했다. A, B등급 영웅들의 지휘를 받는 그들은 골드 이글과 힘을 합쳐 마족의 B, C등급 마장기를 파괴하는 저력을 보이기까지 했다.
“하아아압!”
자신의 전용기 화이트 윙에 탑승한 칸디르 역시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그녀는 카시아움에 당한 마장기의 부위도 제대로 수리하지 못한 채 전투에 나서고 있었다. 칸디르는 상대와 맞서 용감하게 전투를 벌였지만 마족들의 마장기와 병사들은 지평선 너머로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끊임없이 몰려들고 있었다.
“호, 호 님에게 영광을!”
“이 몸이 이렇게 죽는 건가?!”
쾅! 콰앙!
게다가 쉐르난비체의 카시아움이 하늘을 날 때면 어김없이 서너 기의 마장기가 파괴되었다.
“칸디르 님 후퇴하셔야 합니다! 벌써 마장기 전력의 반을 잃었습니다!”
통신구를 통해 들려오는 부하의 보고에 칸디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의 날개는 괴로움으로 퍼덕이고 있었다. 그리고 숨을 깊이 들이쉰 칸디르가 명령을 내렸다.
“롭! 피스! 쿠링턴 편대는 지크 로리로 도망친다! 나머지 편대는 아멘드마로 향하도록!”
“칸디르 님께서는……?”
“나는 커티삭과 함께할 것이다.”
칸디르의 목소리에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몇몇 마장기사들이 자신도 함께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칸디르는 그들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굳이 헛되이 목숨을 잃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반파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화이트 윙으로는 두 도시에 도착하기 전에 추격대의 손에 붙잡힐 게 분명했다.
“우리는 마족과 함께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종족. 그들의 지배자인 쉐르난비체가 눈앞에 있는데 그냥 물러날 수는 없지.”
그럴 바에는 차라리 쉐르난비체의 루비아이에 흠집이라도 내고 싶은 게 그녀의 각오였다.
“후퇴! 후퇴한다!”
“모두 지크 로리와 아멘드로 도망친다!”
후퇴 명령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브뤼헤아 비쉬들이 적들을 향해 군중 제어 마법을 사용했다. 어떻게든 발을 묶으려는 의도였다.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마장기들 역시 천천히 뒤로 물러서면서 최전방에 있는 병사들이 빠져나올 수 있도록 엄호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칸디르는 마왕 쉐르난비체의 전용기 루비아이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오호?”
자신의 향해 짙은 살기를 드러내는 흰색의 마장기를 보며 쉐르난비체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천족의 A등급 마장기인 세인테르 급으로 10 천사라는 영웅이 탑승했다던 마장기였다.
“감히! 누구를 노리느냐!”
루비아이를 향해 다가가는 화이트 윙을 발견한 사운더러스가 칸디르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런 사운더러스를 향해 쉐르난비체가 말했다.
“비켜나라, 사운더러스.”
“하, 하지만 폐하!”
“마침 유흥이 필요한 참이었다.”
허공을 날던 카시아움이 자신의 크기를 조절하더니 루비 아이의 손으로 들어왔다. 원래부터 루비 아이의 무기인 것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렇게 준비를 끝낸 쉐르난비체가 칸디르를 향해 말했다.
“오너라. 천족의 전사여.”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이트 윙이 바람 같은 속도로 루비 아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카아앙!
귀를 때리는 금속성과 함께 루비 아이가 밟고 있던 땅바닥에 쩍하고 금이 갔다. 이어서 부채꼴 모양의 충격파가 뒤로 퍼져 나가며 뒤에서 달려오던 마족의 병사들을 후려쳤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우지직!
강한 힘이 실린 루비 아이의 로우킥에 화이트 윙의 다리가 괴상한 각도로 꺾이며 흔들거렸다. 파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파괴된 마력회로에서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똑같은 A등급 전용기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힘의 차이였다.
“크윽! 무슨 이런 무식한 힘이!”
순식간에 다리 한쪽을 잃은 칸디르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제대로 자세를 잡을 수가 없었다.
“용기는 가상하다만 안타깝게도 실력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구나.”
그렇게 휘청거리는 화이트 윙을 향해 마족의 신기 카시아움이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