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6
리그너스 대륙전기 276
“단순한 도발은 아니야.”
다양한 병종으로 편성이 된 군대를 확인한 칸디르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수도 적지 않았다. 눈에 들어온 병사들의 수만 봐도 대략 오만가량이나 되었다. 게다가 일정 거리를 두고 병사들이 끊임없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제까지 잠잠했던 녀석들이 본격적으로 커티삭을 노리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분명 마장기 편대도 근처에 있을 터. 거기까지 생각을 한 칸디르는 다시 화이트 윙을 움직였다. 상대의 마장기 전력에 대해 파악하는 일은 전장의 승패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였다.
그렇게 얼마나 이동했을까? 키마라이와 타나스트급 마장기가 칸디르의 눈에 들어왔다.
‘두 개 편대인가?’
좋지 않았다. 둘 다 엑스칼리버와 동급인 B등급 마장기로 근접전에서는 엑스칼리버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마장기들이었다. 그런 B등급 마장기가 무려 여덟 기였다. 거기에 가즈린과 쿠슬뱅으로 이루어진 C등급 마장기를 더하면 상당한 숫자가 커티삭을 향해 오고 있는 게 분명했다.
“쉽지 않은 전쟁이 되겠군.”
정확한 노림수가 뭔지는 예상할 수 없었지만 마족들의 진군에서 볼 붸르니체스의 의지가 느껴지고 있었다. 잠시 후, C등급 마장기 세 개 편대가 추가로 합류하는 것을 확인한 칸디르는 화이트 윙의 방향을 커티삭 쪽으로 돌렸다. 정찰은 여기까지였다.
마족들의 진군 속도로 보아하니 하루, 이틀 내에는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될 것 같았다. 시간의 여유가 없는 만큼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그나마 적들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방어시설인 이제르론이 이틀 전에 완성이 된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천족이 소환자의 휘하에 있다니? 이거 놀랍구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칸디르의 귀로 들려왔다. 이어서 화이트 윙 주변의 마력들이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상황에 위기감을 느낀 칸디르가 재빠르게 화이트 윙을 움직였다.
촤카카칵!
“크으윽!”
찰나의 순간, 무언가가 화이트 윙을 스치고 지나갔고 기체가 좌우로 요란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삐이이이! 삐이이이!
이어서 경고음이 귀가 따가울 정도로 크게 울려 퍼졌다. 적의 공격에 큰 타격을 입은 것이다.
‘대체 뭐였지?!’
칸디르는 재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무언가가 서서히 자신을 압박하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칸디르는 조종간을 잡아당겼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볼 붸르니체스인가?”
회피 기동을 하면서 칸디르는 방금 전 자신에게 공격을 가한 인물의 정체를 떠올렸다. 가장 유력한 영웅은 강력한 전투력을 지닌 상급마족 볼 붸르니체스였다. 하지만 칸디르는 곧 고개를 저었다. 방금 전, 자신의 귀에 들려왔던 목소리는 미노타우르스 특유의 투박하고 묵직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인간 여성에 더욱 가까웠다.
‘인간 여성이라? 다크 엘프 영웅인가? 그렇지 않으면 서큐버스……?! 설마!’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칸디르는 재빠르게 뒤를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치떠졌다. 화이트의 윙의 뒤로 무언가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던 탓이었다. 검은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는 커다란 검이었다.
“저건!”
칸디르의 입이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자신을 노리며 다가오고 있는 검은 마족의 신기라 불리는 카시아움이 틀림없었다. 그와 함께 조금 떨어진 곳에서 불길할 정도로 새빨간 색을 지닌 마장기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직접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지만 칸디르는 본능적으로 붉은색 마장기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큭!”
칸디르가 조종간을 부술 듯 강하게 당겼다. 화이트 윙의 방어 체계를 가동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정찰이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살아서 커티삭으로 돌아가야 했다.
“어째서 그녀가?!”
리그너스 대륙에서 카시아움을 들고 다니는 이는 예나 지금이나 단 하나밖에 없었다. 만마의 지배자라 불리며 리그너스 대륙에서 가장 잔인하며 냉혈하다고 알려진 마왕 쉐르난비체였다.
“빌어먹을……!”
하지만 카시아움의 속도는 화이트 윙을 뛰어넘을 정도로 빨랐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 마냥 자신을 쫓아오는 불꽃의 검에 칸디르는 땀을 뻘뻘 흘리며 마장기의 조종에 집중했다.
하늘 위로 흰 선과 붉은 선이 겹쳐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움직였다. 10 천사라는 명성에 걸맞게 화이트 윙을 움직이는 칸디르의 조종술은 현란했고, 화려했다. 하지만 그녀의 목숨을 노리는 카시아움 역시 집요했다.
콰직! 콰드드득!
요란한 소리와 함께 화이트 윙의 장갑들이 찢겨져 나갔다. 하지만 다행히 칸디르는 무사히 카시아움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마장기가 조금 박살난 것은 목숨을 구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위험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적들의 공격은 단순히 상급마족인 볼 붸르니체스의 주도로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상대는 대륙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마왕 쉐르난비체의 친위군단이었다.
“빌어먹을……! 마족의 움직임을 좀 더 정확하게 파악했어야 했는데!”
어렴풋이 쉐르난비체가 움직였다는 소문은 커티삭을 오가는 상단을 통해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칸디르는 그런 상인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쉐르난비체가 블라디션에 위치한 마왕성 판데모니움에서 벗어나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블라디션은 붉은 핏빛의 대지와는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만마의 지배자라 불리는 그녀가 커티삭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게다가 디아린 상단을 위시한 호의 정보망은 인간들과 엘프 왕국의 영토에나 구축이 되어 있어 있는 까닭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제법이구나.”
자신의 손에서 벗어난 흰색의 마장기를 보며 쉐르난비체는 진심으로 감탄을 터뜨렸다. 오랜만에 루비아이에게 천족의 피를 선물할 생각이었건만 피 대신 찢겨져 나간 고철만 먹였을 뿐이었다. 그만큼 상대 마장기의 움직임은 상당한 수준에 올라있었다.
“사운더러스. 저 마장기의 오너가 누구더냐?”
“날개가 흰색으로 도색된 세인테르급 전용기로군요. 분명 천족의 10 천사 중 하나인 칸디르라는 천사일 겁니다.”
“10 천사?”
사운더러스의 말에 쉐르난비체는 의심스럽고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10 천사라면 분명 자신의 공격을 피할 수 있을 정도의 깜냥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족의 상급 위를 지닌 영웅들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천족의 영웅이었다.
그런 만큼 그들이 지닌 여신 라헬의 신앙심은 다른 천족 영웅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 영웅이 소환자의 휘하에 있다? 쉐르난비체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10 천사 뿐 아니라 수인족의 십이멀 중 여럿도 소환자 윤호와 함께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보부에서는 그의 영토가 이상향 알르드인 것이 이유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라이프린의 개 따위가 이상향따위에 빠질 리가 있느냐?”
쉐르난비체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가 아는 천족들은 오로지 프리테븐만이 전부이며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광신도들이었다.
“보아하니 재미로운 일이 소환자의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로구나.”
“크탈나스의 힘일까요?”
“글쎄.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하지만 여의 생각으로는 크탈나스의 힘과는 조금 다른 것으로 보이는구나. 루베릭 대륙의 인피니티 나인들은 오로지 파괴밖에 모르는 녀석들이지 않느냐?”
“저는…….”
자신이 모시는 주군의 말에 사운더러스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상급 마족이기는 했지만 대륙 전쟁에 대해 듣기만 했을 뿐 경험은 하지 못한 그는 볼 붸르니체스와는 달리 인피니티 나인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했다.
“소환자의 군대는 엘프들이 주축이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그 밖에도 윙드 훗사르와 하이 코넷 위치로 이루어진 부대를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이 코넷 위치? 호오…….”
쉐르난비체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하이 코넷 위치는 만마의 지배자인 자신조차도 최근에서야 부대 규모로 운영을 시작한 강력한 장난꾸러기들이었다.
“능력이 제법 뛰어나군. 이름이 윤호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이제는 몇 남지 않은 1회 차 소환자로 소환자 중에서는 유일하게 이 대륙에 자신의 세력을 만든 녀석입니다.”
“어느 종족의 소환자였지?”
대수롭지 않은 쉐르난비체의 질문에 대답을 하려던 사운더러스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소환자 윤호에 대해서는 정보부를 통해 어느 정도 조사한 바가 있었다.
몇 번이나 보고도 한 바가 있었다. 하지만 만마의 제왕에게 소환자라는 존재는 아무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그런 연유로 사실대로 말을 꺼내기가 영 껄끄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만마의 지배자에게 거짓을 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족의 소환자였습니다.”
“마족?”
“그렇습니다. 폐하께서 키마라이를 하사하시기도 했습니다.”
쉐르난비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가 입가에 나직한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주억였다.
“아아! 이제야 기억이 나는구나. 그래. 소환자. 창조주의 계시를 받았다는 존재들. 하지만 우리들의 도움이 없으면 잠시라도 이 대륙에서 살 수 없는 허약한 생명체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모두가 벌레보다 못한 존재들이라면 굳이 우리들이 지켜볼 가치가 있겠느냐?”
그녀의 말에 사운더러스는 어정쩡한 표정을 지었다.
여신 라헬은 현재까지 이 리그너스 대륙에 소환자들을 네 번 불러들였다.
그렇게 4회 차 소환이 이루어졌지만 마족에게 배정된 소환자들 중 살아남은 이는 고작 셋에 불과했다.
마족에게 배정된 소환자들의 생존 확률이 급격하게 낮은 이유는 간단했다. 쉐르난비체가 선택의 신전에서 배정받은 소환자들을 이 대륙에 대한 조금의 적응도 없이 곧바로 분쟁지역으로 보냈기 때문이었다.
“소환자 윤호는 어디에 있지?”
“한 때 수인 왕국의 영토였던 카우셰드 근처에 있는 곳으로 파악됩니다. 여기서는 제법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사운더러스의 말에 쉐르난비체는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뒤에서 묵묵히 대기하고 있던 볼 붸르니체스에게 시선을 주었다.
“볼 붸르니체스.”
“만마의 지배자이시여.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그대에게 커티삭의 공성전을 맡기겠다. 건물의 잔해 하나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파괴하도록. 소환자 윤호라는 녀석이 부리나케 달려올 정도로 큰 충격을 안겨다 주면 좋겠구나.”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였지만 대화의 내용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볼 붸르니체스는 자신의 가슴을 쿵쿵 두드리며 말했다.
“폐하를 위해 이 볼 붸르니체스. 커티삭을 잿더미를 만들어 버리겠습니다.”
커티삭 공략의 선봉으로 자신을 임명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 볼 붸르니체스가 가슴을 잔뜩 피고는 뒤로 물러났다.
그런 상급 마족의 모습을 보던 쉐르난비체는 천천히 하얀색 마장기가 도망친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환자 윤호라…….”
그녀의 입술이 살짝 비틀렸다. 무거운 몸을 일으킨 보람이 있게 이번 외출은 굉장히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