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5
리그너스 대륙전기 275
“군주님에게 세계수의 축복을.”
“브뤼헤아 비쉬의 훈련이 끝이 났습니다. 마족이 자랑하는 마법사들이라 그런지 마나를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더군요. 군주님도 한 번 만나보시겠습니까?”
“컹컹! 우리 코볼트! 우리의 엘프 군주님에게 인사를 한다! 컹컹!”
“음뭐어! 이 땅의 농사는 우리들에게 맡겨주십시오! 리그너스 대륙에서 우리 우인족만큼 농사에 대해 잘 아는 이들은 없을 겁니다. 푸르르르.”
호의 명령에 따라 붉은 핏빛의 대지의 군주로 임명된 엘 라스엘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영지민들이 하나같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 엘 라스엘의 뒤로 실버 문 다섯이 몇 발자국 떨어진 채 대기하고 있었다. 마법으로 벼린 날카로운 검으로 무장한 그들은 엘 라스엘의 경호원들이었다.
S등급 영웅인 그녀를 해할 수 있는 자가 이 아멘드마에 몇 명이나 있을까 싶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과거 엘프 왕국의 군단장이었던 엘 라스엘은 총명하고 영리한 여인이었다. 시텔라의 생명 부족인 그녀는 병사들을 통솔하고 영지민들을 안정시키는 데 있어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오늘도 아멘드마는 평화롭네요.”
“세계수와 달의 여신님의 축복을 한 몸에 받으신 군주님의 자애로움 덕분입니다.”
“호호. 그건 제가 아니라 우리들이 모셔야 할 윤호 님에게 할 말 아니던가요?”
한 실버 문의 말에 엘 라스엘은 싱긋 미소를 짓고는 다양한 종족들이 한데 어우러진 영지 내를 돌아보았다. 엘프 왕국의 군단장에서 호의 영웅이 되어버린 탓에 엘프 왕국의 영웅들 사이에서는 배신자로 낙인이 찍힌 그녀였지만 엘 라스엘은 현재 자신의 상황에 대해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다툼 없이 서로가 함께하는 이상향 알르드의 모습은 평화를 사랑하는 엘프들이 꿈에서나 볼 수 있는 지상낙원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커티삭에서 연락이 온 것은 없나요?”
“그저께 도착한 전령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알려왔습니다.”
집무실로 돌아온 엘 라스엘이 휘하 영웅들을 향해 물었다. 최상급 마족인 볼 붸르니체스의 영토와 경계를 맞대고 있는 커티삭은 한때 천족의 10 천사 중 하나였던 칸디르가 영주로 있었다.
“커티삭에 건설 중인 이제르론의 현황은요?”
“대부분의 공사는 끝이 난 모양입니다. 수일 내로 건설이 완료될 것 같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다행이네요.”
리그너스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방어시설 중 하나인 이제르론의 건설이 거의 끝났다는 말에 엘 라스엘은 안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은 잠잠하다지만 커티삭과 붙어 있는 종족은 리그너스 대륙의 전쟁꾼들인 마족이었다. 언제 커티삭을 노리고 병사를 일으킬지 모르는 일이었다. 더욱이 상대는 거대한 덩치와는 달리 음흉하다고 알려진 볼 붸르니체스였다.
“코르다에서 생산 중인 엑스칼리버들은요?”
“마장기 오너들의 훈련이 마치는 즉시 커티삭으로 보내지고 있습니다. 현재 엑스칼리버 네 개 편대와 자넷, 골드 이글 일곱 개 편대가 대기 중에 있습니다.”
“……제법 많네요.”
무려 44 기의 마장기가 커티삭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 정도라면 볼 붸르니체스도 쉽사리 병사를 일으키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엘 라스엘의 표정에는 약간이지만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세비트리나 실버 애로우에 대한 개발 소식은 없나요?”
“아직까지 그런 소식은…….”
현재 알르드에서 생산이 되는 마장기는 자넷과 골드 이글 그리고 엑스칼리버로 모두 인간들의 마장기였다. 그렇기에 안타깝게도 엘프 영웅들은 그런 마장기들을 이용할 수 없었다. 엘프 영웅만이 아니었다. 인간들의 마장기는 오로지 인간 영웅만이 사용이 가능했다. 마장기에 장착된 마정석이 그들의 마나만을 받아들이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소환자들은 그런 제한 없이 마장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알르드의 군주인 윤호가 대표적이었다. 그는 엑스칼리버와 키마라이라는 두 종족의 마장기를 자유자재로 이용했다.
“하루라도 빨리 우리 종족의 마장기도 연구가 시작되었으면 좋겠는데…….”
한 기 밖에 남지 않았던 윈드 라이더가 던전 공략에서 파괴된 이후 소환자 윤호의 영토인 알르드에는 엘프들의 마장기가 단 한 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엘프 영웅들의 입장에서는 아쉬운 게 당연했다.
더욱이 알르드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종족 역시 엘프들이었다. 당연히 엘프 영웅들의 수 역시 최근 급격하게 늘어난 인간 영웅들을 제외하면 다른 종족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물론, 호는 엘프들을 비롯해 다른 종족들도 친밀하게 그리고 차별 없이 대했다. 알르드라는 이상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엘 라스엘 역시 그런 호의 태도를 이해하고 있었지만 내심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갑자기 집무실의 분위기가 묘해지자 A등급 영웅인 엘 릿츠가 헛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큼. 호 님께서 한창 연구 중이셨던 브뤼헤아 비쉬의 연구가 최근에 끝이 났습니다. 디아린 상단에게 슬쩍 물어보니 브뤼헤아 비쉬를 양성하는 데 꼭 필요한 특산품 구입 루트 역시 완성되었다고 하더군요.”
“이제 실버 문처럼 각 영지에서 본격적으로 브뤼헤아 비쉬의 훈련이 시작되겠군요.”
“그렇습니다, 엘 라스엘. 단단한 방패인 실버 문과 강력한 마법 공격이 가능한 브뤼헤아 비쉬로 이루어진 군대는 훈련만 제대로 된다면 전장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겁니다. 우리 알르드만이 이룰 수 있는 군대죠.”
엘 라스엘은 집무실을 둘러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집무실을 가득 메운 영웅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웅들 중 대다수는 엘프들이었다. 하지만 수인 영웅의 수도 적지 않았고, 고작 두세 명에 불과했지만 마족인 오크와 서큐버스 영웅도 있었다.
그리고 엘 라스엘은 엘 릿츠와의 대화에서 그녀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후우…….’
순간적으로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아쉬움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붉은 핏빛의 대지를 다스리는 군주로써는 하지 말아야 할 생각을 잠시나마 머릿속에 가지고 있던 탓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림드 산맥에서 최근 새로운 연구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혹시 무엇인지 알고 있나요? 엘 릿츠?”
엘 라스엘이 그녀를 흘긋 바라보았다. 다른 영웅들도 관심이 가는 것은 매한가지였는지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정확한 정보는 아닙니다만 최근 디르시나의 연구팀 공돌이들이 라이온레인의 연구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라이온레인?!”
자리에 앉아 있던 수인 영웅 하나가 화들짝 놀라며 고함을 쳤다. 하지만 그의 무례함을 지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놀란 것은 매한가지였기 때문이었다.
“라, 라이온레인이라니?”
엘 라스엘은 숨을 헉 들이쉬었다. 라이온레인. 인간들의 A등급 마장기로 해상을 제외한 어느 전장에서도 활동이 가능한 전천후 마장기였다.
엑스칼리버보다 배는 더 큰 덩치를 지닌 마장기로 무장 역시 A등급 마장기답게 엄청났다. 원거리 포격이 가능한 MLC 와 함께 근접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커다란 바스타드 소드, 수류탄처럼 사용이 가능한 마력 폭탄이 다수 장착되어 있던 까닭이었다.
특히나 자신이 원하는 장소로 던져서 폭발시킬 수 있는 마력 폭탄의 파괴력은 C등급 마장기의 장갑을 통째로 녹여버릴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하지만 라이온레인이 유명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라이온레인을 베이스로 한 전용기 블루 세이버를 보유하고 있는 한 여인 때문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이레네 아르티아. 기사의 여왕으로 불리며 리그너스 대륙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자랑하는 일곱 명의 대영웅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라이온레인은 수인 왕국 십이멀의 목숨을 빼앗았으며 천족과 엘프 왕국의 수많은 도발을 물리치기도 했었다.
“맙소사! 그렇다면 우리도 A등급 마장기를 생산할 수 있는 건가요?”
이제껏 조용히 있던 서큐버스 영웅이 놀라서 말했다. A등급 마장기는 대륙을 지배하는 일곱 종족도 제대로 생산 체계를 갖추지 못한 최신형 전투 병기였다.
“역시 호 님은 대단하군. 크릉.”
“라이온레인이라니! 이거 정말 엄청난데? 우리 엘프 왕국의 A등급 마장기인 아보르 비테가 아닌 게 아쉽기는 하지만 라이온레인이 생산된다면 적들의 침략도 걱정이 없겠어!”
“우리 종족의 데스사이더였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취익! 라이온레인도 대단한 마장기지. 이거 벌써부터 몸이 근질근질한데?”
집무실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그만큼 라이온레인에 대한 연구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엘 라스엘은 실버 문과 브뤼헤아 뷔시 거기에 라이온레인 편대로 이루어진 군대를 떠올렸다. 단단한 방패와 위력적인 대포 그리고 강력함을 더해주는 마장기의 조합은 벌써부터 오싹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 모두를 갖추기 위해서는 엄청난 자원과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하지만 자신이 떠올리던 군대의 편성이 완료된다면? 이 알르드는 리그너스 대륙의 수많은 세력 중 하나가 아닌 일곱 종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크, 큰일이야! 큰일 났다고! 엘 라스엘 님은 어디에 계시나?!”
그때였다. 요란한 소리가 밖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어……?”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
엘프 영웅들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청각이 발달한 그들은 집무실의 소란스러움에 끼어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심상치 않은 목소리에 이상함을 느낀 한 영웅이 집무실의 문을 열었고, 곧바로 누군가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집무실 내로 뛰어들 듯 들어왔다. 커티삭에서 온 전령이었다.
* * *
뿌우우우! 뿌우!
“무슨 일이지?”
갑작스레 들려오는 나팔 소리에 집무실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있던 칸디르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밖으로 나왔다. 마족과의 경계지대로 정찰을 나간 윙드 훗사르 부대의 경고 나팔 소리였다.
“윙드 훗사르 부대의 귀환이다!”
“성문을 열어!”
정찰을 나갔던 윙드 훗사르 부대가 커티삭으로 귀환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수는 몇 되지 않았다. 번쩍번쩍 빛나던 갑옷들은 다양한 색의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쉴 새 없이 달린 모양인지 거칠게 투레질을 하던 군마들은 성 내에 들어서는 순간 그대로 주저앉았다.
“어떻게 된 것이냐?!”
온몸에 상처가 가득한 윙드 훗사르를 향해 칸디르가 물었다. 무려 1 개 부대를 정찰로 보냈었다. 하지만 살아 돌아온 것은 고작 여덟 명에 불과했다. 몬스터나 산적과 같은 녀석들의 공격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만약 윙드 훗사르가 마주친 상대가 그런 놈들에 불과했다면 피해를 입기는커녕 그들을 물리치고 전리품을 습득 채로 복귀를 했을 터였다.
하지만 눈앞의 병사들은 강력한 공격에 전멸이나 다름없는 피해를 입고 도망친 모습이었다.
“마, 마족입니다! 마족의 대규모 군대가 몰려오고 있습니다.”
S+랭크 병종인 윙드 훗사르 부대에게 이렇게 큰 피해를 줄 만한 세력은 하나 밖에 없었다. 최근 움직임이 심상치 않더니만 올 게 온 모양이었다.
“대규모 군대? 볼 붸르니체스가 움직인 건가? 화이트 윙을 준비시켜! 내가 직접 정찰을 다녀오겠다! 그리고 너! 너! 지금 바로 아멘드마와 아트리그로 가라! 엘 라스엘과 리셴르나에게 마족의 군대가 침입했다고 이르도록!”
“실버 문들은 방어태세를 갖추고 지금 당장 마동포 이제르론의 충전에 들어간다! 마장기 오너들 역시 빨리 소집해!”
“네! 영주님!”
칸디르의 명령에 병사들이 바삐 움직였다. 그리고 화이트 윙의 준비가 끝났다는 보고를 받은 칸디르는 재빠르게 화이트 윙에 탑승했다.
“화이트 윙. 움직이겠다!”
커다란 날개를 펼친 세인테르급 마장기가 하늘 위로 똑바로 솟구쳤다. 이어서 마력 엔진에서 나오는 강한 추진력을 이용해 화이트 윙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앞으로 쏘아지듯 날아갔다.
“역시!”
칸디르의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커티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마족의 군대가 발견된 것이다.
‘데스 로드인가?’
빠르게 마족의 군대를 스치고 지나가면서 칸디르는 상대의 이모저모를 살폈다. 마족의 군대는 S+랭크 보병인 라임달이 주력인 것으로 보였다.
데스 로드라는 별명으로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는 죽음의 전사들이었다. S랭크 기병인 유령군마들도 찾을 수 있었다. 또한 소수지만 할리온도 눈에 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