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4
리그너스 대륙전기 274
“이거 골치 아프네.”
에어리스와의 만남을 마치고 카우셰드로 돌아온 호는 한숨과 함께 누워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푹신푹신한 양털로 만들어진 매트는 사용자의 피로를 단숨에 풀어줄 수 있는 질 좋은 매트였지만 혼란스러운 호의 마음을 진정시켜주지는 못했다.
“카테지나라…….”
그녀를 가리켜 에어리스는 루베릭 대륙의 여신이자 여신 라헬의 자매 격인 존재라고 했다. 거기에 잔혹하고 악랄하며 피를 좋아한다는 설명까지 덧붙였었다.
호는 카테지나의 이름 꺼내면서 열을 토하던 에어리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의 기준에서 카테지나는 그야말로 악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런 카테지나를 떠올리며 호는 다시 한 번 한숨을 쉬며 몸을 옆으로 뒤집었다.
‘여신 라헬만 물리치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거 아니었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전승들을 조합해 본 결과 소환자가 이 대륙을 통일할 경우 창조신의 계승자가 되어 본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단순히 대륙을 통일하는 게 전부는 아니었다. 창조신의 계승자가 되어야 하는 만큼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기준으로 여신 라헬까지 물리치는 진 엔딩을 달성해야 했다.
“고향이랴…….”
순간 현실 세계에 있는 가족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이 실종된 게 5년 쯤 되었을까? 걱정을 하고 있을 부모님들의 얼굴이 아른거리며 불쑥 가슴이 저려왔지만 호는 애써 감정을 가라앉혔다.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일단 살아남아서 이 대륙을 통일하는 게 급선무였다. 문득 잊고 있었던 애인인 혜연의 얼굴도 떠올랐다.
‘5 년이나 지났으니 결혼은 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안했을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현실 세계에 있을 그녀의 나이는 지금쯤이면 스물여덟 정도에 불과했다. 금수저가 아닌 이상 서른 이전의 결혼은 선택된 자가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말 할 정도로 호가 살던 세계는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행여나 결혼을 했다 하더라도 지금은 별 감흥이 없을 것 같았다.
“후우.”
호의 입에서 다시 한 번 한숨이 흘러나왔다. 대륙을 통일하고 나타날 여신 라헬의 세력만 물리치면 현실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니, 여신 라헬을 물리쳐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세계에서 호의 목표는 그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는 등장하지 않던 여신 카테지나와 파신이라는 이레귤러가 나타나 자신의 계획에 조금씩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라헬과 카테지나는 대륙 전쟁을 통해 서로를 힘을 흡수하려고 해요. 그런만큼 그들의 추종자들은 분명 자신들의 세력이 지니는 힘이 정점에 달했을 때 반드시 대륙 전쟁을 일으킬 거예요.”
에어리스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여신끼리의 싸움을 이야기하면서 그녀는 대륙 전쟁이라는 이야기를 호에게 알려주었다.
“설마 내가 있는 동안에 대륙 전쟁이 일어나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정보창과 퀘스트에 나타났던 썬더 퓨리, 익스큐션 스워드, 헬리오스 아쳐와 같은 EX등급의 병종에 대한 설명을 떠올리면 마음을 놓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정말로 일어날 법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실버 문과 브뤼헤아 비쉬, 이 두 SSS랭크의 병사들을 양성할 수 있게 되면서 군사력만큼은 제법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수준에 올라왔지만 대륙의 패권을 논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물며 대륙 전쟁은 이제껏 자신이 알고 있는 스케일의 전쟁이 아니었다. 그래도 마음을 놓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혹시 모르니까…….’
호는 리그너스 대륙의 숨겨진 SSS등급 던전들의 보상을 비롯해 숨겨져 있는 A등급의 마장기들을 모조리 손에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행여나 대륙전쟁이 일어났을 경우 인피니티 나인이라는 존재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나갈 수 있을 터였다. 그에 대한 정보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만능 공략집인 관우는 내 여자의 공략본이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금 진행 중에 있는 수인족의 전설 퀘스트는 정말로 꿀 같은 퀘스트였다. 퀘스트를 전부 달성하고 나면 A등급 전용기 열두 기는 물론이고, S등급의 초대형 마장기인 알바트로스까지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수인족의 전설 퀘스트는 그 정도의 보상이 충분히 어울리는 퀘스트였다. 퀘스트의 내용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결국 수인 왕국의 세력 모두를 차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수인 왕국 전체와 전쟁을 벌일 수는 없었다. 이제까지 호가 상대했던 수인 왕국의 종족들은 수인 왕국 내에서도 약소부족에 속했던 종족들이었다. 조인들은 조금 다르긴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조인족의 세력은 호인족의 십이멀인 티르거가 말아먹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인족만 하더라도…….”
우인들과는 달리 그들은 다스리는 영토만 무려 세 개였다. 그 모두를 차지하고 안정화시키려면 상당한 수의 병력과 영웅들이 필요했다. 현재의 상황으로는 힘겨운 일이었다. 병력을 늘리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라홀로프 상단에서 들여오는 노예의 수가 최근 들어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영지의 특성화가 진행되면서 발전이 급격하게 이루어졌고, 수많은 건물들이 동시에 지어지면서 마을마다 인구 부족에 신음하고 있었다. 최신식 건물들이 지어져도 그것을 운영할 사람이 부족한 것이다.
림드 산맥이나 붉은 핏빛의 대지, 나크 평원은 딱히 문제가 없었다. 이미 발전이 끝난 곳이었고, 인구들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새롭게 차지한 영토들이 문제였다.
“어디서 큰 전쟁이라도 벌어져서 피난민이라도 잔뜩 생겼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난민들이 생긴다면 그들을 흡수할 수 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상황에서 전쟁이 터진다면 자신이 관여될 확률이 굉장히 높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었다.
* * *
쉐르난비체의 명령에 따라 그녀를 호위하는 영웅들과 마족의 친위군단이 동쪽으로 향했다.
마왕의 전용기 루비아이를 포함해 데스 사이더와 헬 디아블로라는 A등급 마장기를 베이스로 한 전용기만 네 개 편대였다. 거기에 B등급 마장기가 백 여기나 되었고, C등급 마장기 모두 합산하면 마장기 전력만 물경 오백여대에 가까웠다.
“쉐르난비체가?! 판데모니움의 블라디션에만 틀어박혀 있던 그녀가 왜? 까르륵! 무슨 재미있는 일이라도 생긴 걸까?”
“동쪽? 동쪽에는 누가 있죠? 당장 로열 센티널들을 소집하세요!”
“그 빌어먹을 년이?! 헤임빌! 헤임빌을 준비해! 우리의 대지를 침범하는 순간 이 골드 스트리안이 직접 그 년의 목을 베어버리겠다!”
그리고 리그너스 대륙에서 가장 강력하다고 알려진 군단을 보유하고 있는 쉐르난비체의 움직임에 정령과 엘프, 드워프들이 비상에 걸렸다. 마장기만 물경 오백여대에 그들을 뒷받침하는 병사만 해도 수백만이나 되었다. 하물며 쉐르난비체의 전용기인 루비아이는 붉은 용의 적대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장기에 탑승한 쉐르난비체가 홀로 레드 드래곤 둘을 창조신의 품으로 보낸 까닭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하지만 다른 종족들의 불안과 우려와는 상관없이 쉐르난비체의 군단은 별다른 트러블을 일으키지 않고 동쪽으로만 향했다. 그러고는 볼 붸르니체스가 다스리고 있는 타오르는 대지에 발을 디뎠다.
“위대하신 만마의 지배자께 상급의 작을 받은 볼 붸르니체스가 인사를 드리옵니다.”
쉐르난비체의 루비아이를 향해 볼 붸르니체스가 고개를 숙이며 절했다. 하지만 그의 등줄기는 기이한 한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만마의 지배자가 자신의 영토로 향한 연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무능함을 탓하실 생각인가?’
리셴르나에게 붉은 핏빛의 대지를 빼앗긴 이후 볼 붸르니체스는 아직까지도 커티삭을 탈환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족의 소중한 영토를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되찾지 못한 것이다. 사실 그는 붉은 핏빛의 대지로 병사를 진출시킬 생각은 딱히 없었다.
비록 영토를 잃기는 했지만, 고작 촌마을 두 개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영토를 차지한 리셴르나와 소환자 윤호는 만만한 녀석들이 아니었다.
괜히 그들을 상대로 큰 피해를 입었다가 다른 상급 마족이나 드워프가 자신의 세력을 노린다면 그게 더 큰 일이었다.
“고개를 들어라.”
쉐르난비체의 목소리에 볼 붸르니체스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젊고 아름다운 마족이 오연한 모습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풍기는 위엄은 볼 붸르니체스가 자랑하는 털들을 쭈뼛 세울 정도로 범상치 않았다.
“오랜만이군. 볼 붸르니체스. 블라디션의 마왕성이 아닌 밖에서 그대와 마주하는 게 얼마만이지?”
“백 년……은 넘은 것 같군요. 땅딸막한 난장이들과의 전쟁이었습니다. 마왕님의 카시아움이 대족장의 뺨에 커다란 상처를 냈던 전쟁이었습니다.”
“그렇군.”
고개를 주억이는 쉐르난비체를 향해 볼 붸르니체스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이곳까지는 어인일로? 드워프를 공격하실 생각이시라면 이 볼 붸르니체스 최선을 다해 마왕님을 돕겠습니다.”
“아아. 난장이들에게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 볼 붸르니체스. 그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 생겼으니까. 루베릭 대륙의 인피니티 나인 중 하나인 크탈나스의 힘이 동쪽에서 느껴졌다.”
“크……탈나스?! 허, 허나! 만마의 지배자시여! 저는 그의 힘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볼 붸르니체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치듯 말했다.
그리고 쉐르난비체가 그 말에 동의하며 말했다.
“그의 힘은 아주 미약했고, 짧게 이 땅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대가 느끼지 못한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하지만 인피니티 나인의 힘이 이 대륙에 잠깐이나마 모습을 드러냈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동쪽, 동쪽이라면……?!”
생각을 곱씹던 볼 붸르니체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자신의 영토에서 동쪽으로 향하면 붉은 핏빛의 대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서, 설마……!’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에 볼 붸르니체스는 온몸이 오싹해졌다.
그는 최근 소환자 윤호의 군대가 엄청난 속도로 강해진 것을 첩자들을 통해 보고받을 수 있었다.
거기에 수인 왕국의 종족 연합군을 물리치고, 본격적으로 전쟁을 벌일 준비까지 하고 있다고 했다. 예전의 초라했던 모습은커녕 자신의 모든 전력을 동원해도 이겨내지가 쉽지 않을 정도로 성장한 것이다.
“그 빠른 성장 속도가…….”
볼 붸르니체스가 눈을 부릅떴다. 인피니티 나인의 도움을 받았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동쪽에는 누가 있지?”
“붉은 핏빛의 대지를 차지하고 있는 소환자 윤호의 세력이 있사옵니다. 현재 엘 라스엘이라는 엘프가 군주로 임명되어 붉은 핏빛의 대지의 방어를 맡고 있다고 합니다.”
볼 붸르니체스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소환자와 인피니티 나인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지만, 모든 판단은 만마의 지배자께서 할 일이었다.
그리고 쉐르난비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환자 윤호,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동쪽으로 향한다.”
마족들의 신기 카시아움은 계속해서 동쪽을 가리키고 있었고, 쉐르난비체는 무엇이 앞을 가로막던 간에 동쪽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저도 따르겠습니다. 만마의 지배자이시여.”
“마음대로 하도록.”
건조한 목소리였지만, 볼 붸르니체스는 만마의 지배자와 함께 전쟁에 나설 수 있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피가 끓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번 전쟁은 자신에게 치욕을 안겨주었던 소환자 윤호에 대한 복수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