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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너스 대륙전기-273화 (273/522)

# 273

리그너스 대륙전기 273

“썬더 퓨리.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네요. 제3 파신 크탈나스의 분신이라고 불리는 마검사죠. 아, 저번에 같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가요?”

“잠깐이지만 그랬었지.”

호의 대답을 들은 에어리스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며칠 전, 미약하지만 3 파신 크탈나스의 힘이 잠깐이지만 이 대륙에 머물렀다가 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힘에 뭔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었는데 그 이유를 이제 알 것 같네요.”

“썬더 퓨리 때문인가?”

호가 눈앞에 띄어놓은 메시지 창을 닫으며 말했다. 메시지 창에는 이제부터 썬더 퓨리의 양성이 가능해진다고 나와 있었다.

“그렇습니다. 이제부터 호 님께서 원하신다면 실버 문과 브리헤아 비쉬의 마력을 이용해 썬더 퓨리를 소환할 수 있을 겁니다.”

그녀의 말에 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EX등급의 무시무시한 병사들이었다. A등급 마장기의 위력도 뛰어넘는다고 설명이 되어 있는 만큼 그 활용도는 무궁무진할 터. 이 썬더 퓨리 부대를 몇 부대만 보유할 수 있어도 리그너스 대륙의 세력 판도는 크게 달라질 터였다.

하지만 강력한 힘을 얻으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었다.

“마력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그들을 제물로 바친다고 들은 것 같은데?”

“비슷한 말입니다.”

자연과 생명을 사랑하는 엘프, 그것도 하이 엘프가 말한 내용이라기에는 굉장히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물론, 크탈나스의 입장에서 말이죠.”

“그렇긴 하겠지만 그와 나는 다른 입장이라서 말이지.”

썬더 퓨리 한 부대를 얻기 위해서는 실버 문 만 명과 브리헤아 비쉬 만 명. 무려 이 만이 넘는 목숨을 희생시켜야 했다. 비록 썬더 퓨리 한 부대의 위력이 A등급 마장기를 능가한다고 해도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이게 일반적인 게임이었다면 모를까, 저건 미친 짓이야.’

가상현실게임 내라면 호기심에서나마 썬더 퓨리를 소환할 수도 있었다. 아니면 정보를 공유해 썬더 퓨리를 소환한 플레이어들의 경험 및 체험담을 통해 결정을 내렸을 터였다. 하지만 이 세계는 게임이 아니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호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런 호를 공작의 깃꼬리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선명한 청록색 눈동자가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호 님은 썬더 퓨리를 소환하지 않으실 생각이로군요.”

“그래.”

에어리스의 말에 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썬더 퓨리에 관한 정보를 보고 잠깐이나마 마음이 끌렸던 적은 있었다. 하지만 썬더 퓨리가 아무리 강력한 병사라 해도 이 만의 멀쩡한 목숨을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 후폭풍 역시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알르드가 무너질 거야.’

전쟁도 아니고 단순히 병사를 소환하기 위해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일이다. 당연히 엘프와 마족들의 엄청난 반발이 있을 테고, 이는 곧 영지의 불만으로 이어질 터였다. 두 종족 영웅들의 충성심 역시 큰 폭으로 낮아질 가능성이 높았고, 심할 경우 반란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그런 것을 감안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썬더 퓨리를 소환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정말로 위급한 상황이 코앞에 닥친 게 아니라면 말이다.

“역시…….”

그런 호의 대답에 에어리스는 그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루베릭 대륙의 하이 엘프는 이미 호가 그런 결정을 내리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다행이네요. 만약 당신이 강력한 힘에 취해 썬더 퓨리를 소환했다면 아마 큰 일이 벌어졌을 거예요.”

“큰일이라니?”

“분명 인피니티 나인과 대립하는 존재들인 칠제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테니까요.”

인피니티 나인과 대립하는 존재? 그에 대한 내용을 떠올리던 호는 갸웃하던 고개를 우뚝 멈춰 세웠다. 루베릭 대륙의 지배자들이 인피니티 나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면 에어리스는 리그너스 대륙의 지배자들을 가리켜 칠제라고 칭했다. 그리고 칠제는 각 종족을 대표하는 영웅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바로 마왕 쉐르난비체, 엘프 여왕 유스타시아, 대족장 골드 스트리안, 정령 여왕 아르넨 리네와 같이 리그너스 대륙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는 각 세력의 지도자들이었다.

“설마?!”

그리고 무언가를 깨달은 호가 소리치듯 말했고, 에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썬더 퓨리가 등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칠제 모두가 힘을 합쳐서 당신을 공격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썬더 퓨리의 존재로 인해 당신이 루베릭 대륙의 끄나풀이라고 다들 생각할 테니까요.”

“……휘유. 난리가 날 뻔했군.”

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말은 즉, 리그너스 대륙 전체가 자신을 적대시 한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행여나 EX등급이라는 힘에 빠져서 썬더 퓨리의 소환 명령을 내렸다면, 1 년 아니 반년도 되지 않아 자신이 이룩한 모든 것을 잃어버릴 뻔했다. 목숨까지도 함께 말이다. 하지만 의문이 가는 것도 있었다.

“리그너스 대륙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서로 대립을 하면서도 루베릭 대륙이라는 적이 나타나면 공통적으로 손을 잡는다는 건가?”

“맞아요. 아, 리그너스 대륙과 루베릭 대륙 둘 다 창조신 리그로우와 세리너스님이 만들어낸 대륙이라는 사실은 알고 계시죠?”

“그에 대한 이야기는 대충이나마 알고 있어. 디르시나의 도서관에서 본 기억이 있거든. 그런데 그 사실이랑 대륙의 지배자들끼리 대립을 하는 거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이는데?”

“아니요. 충분히 상관이 있답니다.”

에어리스가 싱긋 웃었다. 하이 엘프의 미소에서 나오는 기묘한 매력이 잠시나마 호의 마음을 흔들었지만, 호에게는 그보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올 내용이 더욱 중요했다.

“무슨 내용인지 정확히 알고 싶은데?”

“리그너스 대륙과 루베릭 대륙은 먼 옛날부터 서로를 차지하지 위해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다고 해요. 대륙 전쟁이라는 이름 아래에 말이죠.”

호는 에이리스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분명 이야기는 이게 끝이 아닐 터였다.

“물론, 가장 최근에 있었던 대륙전쟁이 이만 년도 더 된 일인 만큼 두 대륙의 전쟁에 관한 기록은 지금으로써는 고대의 역사책에서나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것도 굉장히 짤막하게 말이죠. 하지만 각 종족의 지배자들은 루베릭 대륙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어떻게?”

“여신 라헬이 알려주거든요.”

“여신 라헬이? 그녀가 왜?”

에어리스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지만, 호는 긴가민가했다. 여신 라헬의 목적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신 라헬은 대륙을 혼란에 빠뜨린 후 쇠약해진 세력들을 흡수해 자신이 리그너스 대륙을 장악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소환자들을 이 대륙에 불러들인 이유도 그에 있어 보였다.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진 엔딩 역시 그러한 여신 라헬의 음모를 막는 내용이었다. 진 엔딩의 내용에 따르면 그녀는 자신이 장악한 힘을 토대로 잠들어 있는 리그로우와 세리너스를 제압하고 새로운 창조신이 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왜? 굳이 대륙을 혼란에 빠뜨리려면 루베릭 대륙에 대해서는 비밀로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갑자기 또 머리가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호의 의문은 곧 해결되었다.

“네. 대륙 전쟁을 다시 말하면 신들의 전쟁이기도 하거든요.”

“신들의 전쟁?”

“맞아요. 리그너스 대륙의 신이 창조신 사이에서 태어난 여신 라헬이라면 루베릭 대륙을 다스리는 신 역시 창조신 사이에서 태어난 신이라는 말이에요. 그리고 대륙 전쟁은 이 두 신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이죠.”

“신이 라헬 하나가 아니라고……?”

호는 미간을 찡그렸다. 새로운 신이라니? 의문은 해결되었지만 머리는 더욱 복잡해지고 있었다. 그런 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어리스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네. 루베릭 대륙의 신은 카테지나라 불리는 여신이에요.”

띵동.

-루베릭 대륙의 여신 카테지나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여신 카테지나가 당신의 존재에 대해 인식했습니다.

메시지가 나타났지만 호는 가볍게 메시지를 닫았다. 이런 내용을 보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진 까닭이었다. 어쨌든 여신 카테지나는 라헬과 자매나 그와 비슷한 관계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신성 모독이 될 수도 있겠지만 무지하게 성격이 좋지 않을 것 같은 이름인데?”

“맞아요. 잔학하고 악랄한 최악의 여신이죠.”

에어리스가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더니만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자신의 예상에는 없었던 에어리스의 강한 반응에 호는 눈을 깜빡였다.

“카테지나와 비교하면 이 세계의 여신인 라헬은 정말로 선한 존재예요.”

“……내가 아는 라헬은 희대의 나쁜 년인데.”

“그건 당신이 소환자의 입장이니까요. 하기야 카테지나도 하이 엘프의 입장에서만 나쁜 존재겠네요.”

“어째서?”

호의 질문에 에어리스가 무언가를 떠올리더니 차갑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그 모습을 본 호는 에어리스가 여신 카테지나를 적대한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가 루베릭 대륙의 하이 엘프를 모조리 죽였거든요. 딱 열일곱 명만을 제외하고서요.”

에어리스의 목소리는 굉장히 서늘했다. 하지만 호는 서늘함 속에 숨겨진 그녀을 아픔이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 * *

리그너스 대륙에서 마족은 굉장히 호전적인 성격을 지닌 종족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대륙의 남서부를 지배하는 마족들은 정령, 엘프, 드워프들을 상대로 쉬지 않고 전쟁을 일으켰으며, 그들의 재물과 영토 그리고 백성들을 노예로 갈취했다.

데스사이더, 키마라이, 타나스트와 같은 강력한 마장기에 탑승한 마족의 영웅들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전투를 승리로 거두는 무시무시한 용맹을 발휘했고, 그런 영웅들의 뒤를 따르는 마족의 병사들은 자신의 무기 뿐 아니라 온몸을 이용해서 신속하고 깨끗하게 적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그리고 현재 마족을 지배하는 인물은 만마의 제왕이라 불리는 마왕 쉐르난비체였다.

“크탈나스의 힘이 느껴졌다.”

마왕성의 옥좌에 앉아 있던 쉐르난비체가 감고 있던 눈을 뜨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쉐르난비체의 목소리에 마왕성의 대전 내를 생명체마냥 움직이던 마족들의 신기 카시아움이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크탈나스라면……?”

쉐르난비체를 호위하던 사운더러스가 자신이 모시는 주군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파신 크탈나스. 과거 대륙 전쟁에서 마계의 신기 카시아움에 상처를 입고 물러난 루베릭 대륙의 적이었다. 그에 대해서는 마족의 군단장인 사운더러스도 자세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어떻게 루베릭 대륙의 괴물이? 서, 설마?! 대륙 전쟁이 벌어지는 것입니까?”

“아니. 크탈나스의 힘은 아주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을 뿐이다.”

말과 함께 쉐르난비체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카시아움이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렇다면?”

사운더러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만마의 지배자가 옥좌에서 몸을 일으킨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쉐르난비체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크탈나스의 힘은 동쪽에서 느껴졌다. 정확한 위치는 카시아움이 안내할 터. 그리고 가야겠구나.”

“루비아이를 준비하겠습니다.”

사뿐히 걸음을 옮기는 쉐르난비체의 뒤에서 사운더러스가 부복하며 말했다. 마왕의 전용기인 루비아이가 움직인 이상 분명 큰 전쟁이 벌어질 터. 지금부터 바삐 움직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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