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9
리그너스 대륙전기 259
“……이 개만도 못한 자식들!”
그런 호인족의 행태는 팔쿤의 가슴에 커다란 분노를 만들어 내었다.
저들은 자신들을 버린 게 분명했다. 이미 디치 플레이스만은 호와 이레네 아르티아에게 무너지고 있었고, 페렛 습지대 역시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사방에서 공격을 당하고 있는 만큼 조인들은 이미 무너진 상황이라고 여긴 것이 틀림없었다.
‘남은 병사들이라도 살려야 된다!’
계속된 패배로 많은 수의 병사들을 잃기는 했지만 아직도 십만이 넘는 병사들이 난전 속에서 생사를 걸고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잠시 후,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팔쿤이 눈을 떴다. 그러고는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끔 마장기의 통신을 열었다.
“나는 수인족의 십이멀이자 조인족의 전사 팔쿤! 적들의 지휘하는 검은 악마에게 말한다!”팔쿤의 외침에 사방에서 쏟아지는 포격이 잠시나마 멈췄고, 모두의 시선이 팔쿤이 탑승한 마장기로 쏠렸다. 그리고 잠시 후, 자신의 앞으로 데스 사이더가 모습을 드러내자 팔쿤은 천천히 웨어 타이거의 무장을 해제하며 말했다.
“십이멀의 권한으로 나와 살아남은 병사들은 검은 악마 그대에게 투항하겠다. 결과는 이미 정해진 바. 더 이상의 불필요한 희생은 원하지 않는다.”
팔쿤의 말에 여기저기서 수인들의 탄식과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들 역시 자신들이 패배했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당신들의 투항을 받아들이겠어요. 하지만 무장 해제는 물론이고, 마장기는 회수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한시진이 조용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게 백 만이 넘는 대군으로 이루어진 수인족의 종족 연합군은 림드 산맥의 성 하나를 점령하지 못한 채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종족 연합군을 패배로 몰아넣고 후퇴를 하던 호인족의 티르거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감히 네 년이……!”
호인족의 십이멀, 티르거가 눈을 부릅떴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라이온레인의 날카로운 검이 그의 가슴을 꿰뚫고 있었고, 큼지막하게 벌어진 상처부위에서는 검붉은 핏줄기가 울컥울컥 튀고 있었다. 티르거를 그렇게 만든 이는 다름 아닌 기사의 여왕 이레네 아르티아였다.
“빌어먹을! 어째서 인간들이!”
수인 왕국의 십이멀답게 뛰어난 전투 능력을 자랑하던 티르거 역시 라이온레인의 팔 하나를 가져가기는 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자신의 목숨이었다. 그리고 라이온레인에 탑승한 이레네 아르티아가 자신의 검을 천천히 돌리면서 말했다.
“그대는 분명 강하다. 하지만 나의 검은 이미 대륙의 정점에 올라있는 바. 애당초 그대는 내 상대가 될 수 없었다.”
SS랭크인 티르거와 SSS랭크 영웅인 이레네 아르티아 사이에는 종이 한 장 이상의 격차가 있었다. 그리고 이레네 아르티아는 검신이라는 위대한 특성까지 보유하고 있는 영웅이었다. 하지만 티르거는 그녀의 목소리를 끝까지 듣지 못했다. 이레네 아르티아가 라이온레인의 검을 돌리는 순간 목숨이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크아아악!”
“아, 아쉬토님이여!”
차가운 대지에 몸을 뉘인 이는 티르거만이 아니었다. 다른 마장기와 살아남은 수인 병사들도 하나둘씩 쓰러지고 있었다. 그렇게 나크 평원에서 도망친 티르거 부대는 디치 플레이스만에 도착하자마자 이레네 아르티아가 이끄는 골든 크로우의 1 군단과 마주쳤고 결국 모조리 사망하고야 말았다. 십이멀의 최후라고 말하기에는 굉장히 허무한 끝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폐하.”
이레네 아르티아의 뒤로 그랜달이 예를 갖추며 말했다. 그런 그랜달의 목소리에는 흥분이 가득 담겨 있었다. 기사의 여왕답게 자신의 주군은 수인족의 십이멀, 그것도 무력이라면 둘째라면 서러워할 호인족의 십이멀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비록 라이온레인의 팔 하나가 날아가기는 했지만, 그거야 수리만 하면 끝이었다.
“그대도 고생했다.”
이레네 아르티아는 가벼운 한숨을 흘린 후 몸을 돌렸다. 그나이 칼츠만의 말에 의하면 소환자 윤호의 군대는 화이트베와 리셴르나의 연합군을 제덴 사막에서 전멸시켰고, 바리안스의 대지와 군트락을 점령한 후 디치 플레이스만에 주둔하고 있다고 했다.
윤호군의 또 다른 사령관인 한시진 이라는 소환자 역시 빠른 속도로 페렛 습지대를 점령하고 자신들과 사흘 남짓한 거리까지 진군한 상태라고 했다.
‘후후. 놀라운 전과로다.’
백오십 만이 넘는 수인 왕국의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고, 백여 기가 넘는 마장기가 파괴됐다. 이 정도의 큰 피해는 아무리 수인 왕국이라 해도 쉬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사파리는 현재 난리가 났을 게 분명했다.
‘내분이라도 일어나면 좋겠군.’
그리고 이번 원정은 전적으로 아쉬토의 결정으로 인해 일어난 일이라고 했다. 분명 그에게 이번 원정의 책임을 묻는 자가 있을 테고, 아쉬토는 자신의 힘으로 그런 이들을 찍어 누를 게 틀림없었다.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도베르만 제독에게 연락병을 보내도록.”
“그냥 돌아갑니까?”
“그렇다면?”
“저희들도 피를 흘린 만큼 윤호라는 소환자에게 감사의 인사라도 받아야…….”
그랜달의 말에 이레네 아르티아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리스와 식량을 지원해주기로 하지 않았던가?”
“그, 그거야 그렇지만.”
단호하게 느껴지는 이레네 아르티아의 말에 그랜달이 뒷말을 흐렸다. 골든 크로우의 여왕이 직접 원정에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소환자의 인사 한 번 듣지 못하고 떠난다는 게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랜달의 행동에 이레네 아르티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선택의 신전에서 만났던 그와 나와의 인연은 아쉽게도 이어지지 못했다. 그렇기에 지금은 당장 우리들에게 급한 식량과 리스의 지원만으로 만족하겠다.”
“……알겠습니다.”
이레네 아르티아의 대답에 그랜달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그녀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골든 크로우의 1 군단은 티르거의 부대를 전멸시킨 후 간단한 보급만을 마치고는 아무런 언질도 없이 도베르만 제독의 함대를 이용해 자신들의 영토로 떠났다.
“뭐야? 부담스럽게? 왜 이렇게 쿨하게 나와?”
“와아. 그 언니 걸크러쉬 매력 터지네요.”
그리고 이런 이레네 아르티아의 행동은 그녀가 의도했던 그렇지 않았던 호에게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고, 결국 호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디아린 상단을 통해 리스와 식량을 골든 크로우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허, 허억?! 이게 전부 리스란 말인가?!”
그렇게 디아린 상단이 수송한 리스와 식량은 골든 크로우의 재상 그나이 칼츠만이 기함을 질렀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 * *
“벨님. 여기 결제하셔야 할 서류입니다.”
“아스트리드 벨님. 마장기가 곧 완성됩니다.”
“새로운 연구의 개발이 끝났습니다. 벨님!”
최전선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것만큼이나 그들을 지원해야 할 후방도시 역시 바쁜 건 매한가지였다. 특히나 디르사니의 영주 대리로 호의 권한 대부분을 위임받은 벨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주, 죽을 것 같습니다. 벨님!”
“더 많은 행정관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휴식이 아니면 죽음을!”
많은 수의 영웅들이 전쟁에 투입된 탓에 과중한 업무량을 담당하게 된 내정 영웅들의 불만은 하루가 멀다 하고 하늘높이 치솟아 올랐다. 하지만 그런 영웅들의 불만에 아스트리드 벨은 코웃음과 함께 자신의 책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쨌든 이러한 전쟁 경험은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군사 부분에 관해 여러 기술의 개발을 이룩해냈고, 벨에게도 엄청난 양의 경험치를 안겨다 주었다.
“그래서 전직한 거야?”
“네. 조금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이제 저도 A등급 클래스예요.”
아스트리드 벨은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바이스로이. 지력, 정치, 매력에 보너스를 받는 내정형 클래스였다. 거기에 통솔 수치도 약간이지만 보너스를 받았다.
‘바이스로이? 레어 클래스네?’
관우는 내 여자의 공략본을 통해 바이스로이에 대한 정보를 살펴보던 호는 벨을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바이스로이는 동급의 내정형 클래스 중에서는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좋은 클래스였다.
“그러게. 축하해, 벨. 마침 잘 됐다.”
“……? 왜요?”
호의 말에 불안감을 느낀 아스트리드 벨이 몸을 흠칫 떨었다. 그러고는 그녀가 침을 한 번 삼켰을 때 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벨, 당신에게 림드 산맥을 맡기려고 해.”
“잠깐, 림드 산맥을요? 디르시나가 아니라?”
“응. 이번 전쟁의 결과로 영토가 확 넓어진 것은 알고 있지?”
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윤호와 수인 왕국의 연합군이 벌인 대규모의 전쟁은 이 주변의 세력도에 큰 변화를 만들어 냈다. 서로가 양패구상이라도 했으면 모르겠지만, 한 쪽이 완벽한 대승으로 전쟁을 마무리 지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호는 바리안스의 대지, 군트락, 페렛 습지대 그리고 디치 플레이스만까지. 원래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던 영토보다도 훨씬 큰 땅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번 전쟁을 시작으로 우리와 수인 왕국과의 싸움이 본격화 될지도 몰라.”
림드 산맥을 시작으로 수인 왕국은 무려 여섯 개나 되는 영토를 호에게 빼앗긴 상황이었다. 그 결과로 원인과 조인들이 자신들의 터전을 잃고 몰락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수인 왕국이 자랑하는 용장들인 십이멀 중 무려 다섯 명이 죽거나 호에게로 붙었다. 티르거, 화이트베 그리고 조인족의 십이멀인 치크니가 죽었고 리셴르나와 팔쿤이 투항했다. 적어도 수인족의 세력 중 30% 가량이 날아간 것이다.
‘내가 아는 아쉬토라면 분명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 거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라도 그는 분명 복수를 부르짖으며 군대를 일으킬 게 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당장 새롭게 손에 넣은 영토를 발전시키고, 방어체제를 갖춰야만 했다.
“그런 탓에 나는 군트락으로 시진이는 디치 플레이스만으로 보낼 생각이야.”
“대충 무슨 뜻인지는 알겠어요. 림드 산맥을 운영하면서 물자와 병사들을 계속해서 그쪽으로 보내달라는 건가요?”
“맞아.”
이제까지 보여준 아스트리드 벨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림드 산맥의 발전 역시 대부분이 마무리가 된 상황이었다.
“바이스로이. 이번에 새롭게 얻은 클래스지? 내가 살던 세계에서 바이스로이는 군주의 지휘 아래에 특정 지방을 다스리는 총독을 의미했어.”
“저보고 림드 산맥의 총독이 되라는 말씀이네요.”
자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호를 보며 벨은 자신의 이마를 꾹꾹 눌러댔다. 막중한 책임감에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해온 경험이 있는 만큼 문제없이 영토를 다스릴 자신은 있었다.
“림드 산맥은 우리의 세력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도시야. 그만큼 내가 벨 당신을 신뢰하는 거 알고 있지?”
“하아……. 알고 있어요.”
한숨을 쉬기는 했지만, 벨의 얼굴에는 희미하게 미소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렇게 아스트리드 벨에게 림드 산맥을 맡긴 호는 각 영토를 다스리는 권한을 가진 군주 급의 영웅들을 임명하기 시작했다.
“붉은 핏빛의 대지의 군주이자 아멘드마의 영주로 엘 라스엘을 임명하고 칸디르를 커티삭의 영주로 임명해 그녀를 보좌하도록 한다.”
둘 다 S등급의 영웅인데다가 칸디르는 전용기까지 보유하고 있는 만큼 행여나 볼 붸르니체스의 도발이 있어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터였다.
“냐아앙! 캣닢 공장을 짓는 거다!”
바리안스의 대지는 약속대로 리셴르나가 맡았다. 그녀가 할 일은 예전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드워프들의 동태를 감시하면서 바리안스의 대지를 발전시키는 게 그녀의 임무였다.
“우끼긱?! 호 님과 탄트라만 가문에 영광 있으라! 앞으로도 충성! 충성하겠습니다!”
나크 평원은 하이 폴리션인 타레스 탄트라만이 군주로 임명이 되었다. 자신을 군주로 임명했다는 사실을 들은 타레스는 하늘 높이 바나나 껍질을 던져 대며 기쁨의 춤을 추었다. 수인 왕국의 영토 다수와 경계를 맞대고 있는 군트락은 호가 직접 통치하기로 했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 만큼 호는 군트락에서 직접 주변의 움직임을 확인할 생각이었다.
그와 더불어 디치 플레이스만은 한시진이 군주로 임명이 되었다. 그녀는 천족과 디치 플레이스만과 붙어 있는 우(牛)인들을 감시하며 그들의 도발을 막아낼 예정이었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인정을 하는 인사 배치였다.
타레스 탄트라만의 군주 임명이 조금 의외라면 의외였지만 마웅키를 잘 다스렸던 그의 능력을 생각해보면 안전한 후방이나 다름없는 나크 평원 역시 충분히 잘 통치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나크 평원에 원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것도 장점으로 적용이 되었다.
“페렛 습지대는 이번 전쟁에서 투항을 한 조인 영웅 팔쿤을 군주로 임명하도록 하지.”
“……네?!”
모두가 놀랐던 충격적인 인사였다. 팔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당연히 이런 인사에 불만을 가지는 영웅들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