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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너스 대륙전기-258화 (258/522)

# 258

리그너스 대륙전기 258

검게 탄 대지에 수많은 수인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방금 전 있었던 전투의 흔적이었다.

다람쥐족의 영토 군트락에 도착한 호는 니나 다니엘레를 지휘관으로 하는 또 다른 군대를 편성, 병력을 두 갈래로 나눠 빠른 속도로 군트락이라 불리는 수인 왕국의 영토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자신들을 막을 수 있는 병사들을 없을 거라는 판단에서 나온 과감한 결정이었다.

“어떻게 엘프가?!”

“소, 소환자다! 천족이 엘프 병사들을 이끌고 있다! 찌이익!”

“강하다! 찍! 우리의 공격이 통하지 않아!”

호의 예상대로 군트락을 지배하고 있던 다람쥐족은 부족이 보유하고 있던 다수의 마장기를 포함해 많은 병사들을 원정에 보낸 상황이었다. 비록 호의 영토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십이멀 중 두 명이 이끄는 군대가 호에게 허무하게 무너질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던 것이 그들에게는 재앙으로 다가온 것이다.

순식간에 세 개의 성이 호의 손에 들어갔고, 다람쥐족들 사이에서는 도토리의 성지라 불리는 최후의 보루 토슬치 마저도 압도적인 화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대지에 쓰러진 수인들의 시체는 마지막까지 토슬치에 남았던 최후의 다람쥐족 전사들이었다.

“골든 크로우가?”

그리고 막 토슬치의 점령을 끝낸 호는 골든 크로우의 군단이 디치 플레이스만에 상륙, 수인들을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보고받을 수 있었다. 그것도 다른 영웅도 아닌 이레네 아르티아가 이끌고 있는 1 군단이라고 했다.

“이거 좋지 않은데.”

“왜요? 골든 크로우라면 팔 왕국의 수장 아니에요? 그 전에 오빠보고 자기네 편으로 들어오라고 했던…….”

호가 인상을 찌푸리자 김유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김유진의 말에 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 전쟁에서 나는 군트락을 포함해 디치 플레이스만과 페렛 습지대를 손에 넣을 생각이야.”

“그러면 더욱 잘된 거 아니에요? 이제 막 군트락의 점령을 끝냈으니 북상해서 디치 플레이스만의 남쪽을 치면 되잖아요. 골든 크로우 애들이 위에서 시선을 끌어주고 있겠…….”

“걔네들이 디치 플레이스만의 영지를 점령하면 점령할수록 우리가 먹을 수 있는 파이가 줄어들겠지. 그리고 말이야.”

호는 품속에 보관하고 있던 지도를 펼쳤다. 이 근방의 지형이 그려져 있는 지도였다. 지도 맵을 공유할 수 있다면 간단하게 해결이 되겠지만, 상태 창을 포함한 시스템 창은 자신만이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디치 플레이스만의 한 영지를 손가락으로 가리킨 호가 말을 이었다.

“여기 페리카나라고 적혀 있는 이 마을. 이 마을을 이레네 아르티아가 점령하게 되면 골치 아픈 상황이 벌어져.”

“페렛 습지대와 연결되는 유일한 도시네요……. 림드 산맥의 에스트라다처럼요.”

“그래. 만약 저 도시를 우리가 차지하지 못할 경우에는 림드 산맥에서 디치 플레이스만으로 향하는 물자들은 모조리 바리안스의 대지 쪽으로 돌아서 가야 돼. 엄청난 수송 비용은 물론이고, 시간도 어마어마하게 소요되겠지. 그만큼 방어도 어려워질거야.”

“아……!”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깨달은 유진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된다면 기껏 점령하게 된 영토의 지배력이 상당 부분 약화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우리가 먼저 페리카나를 점령해야겠네요.”

“헤헷. 우리 치킨 한 번 뜯어봐요!”

언제부터 듣고 있었는지 윤아가 고개를 슬쩍 들이밀며 말했다. 그런 윤아의 대답에 호는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페리카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추억 속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바로 디치 플레이스만으로 출진을 할 수는 없었다. 아직 토슬치의 안정화가 끝나지 않았고, 남쪽에서부터 서서히 올라오고 있는 니나 다니엘레의 군대와도 합류를 해야 했다. 게다가 이곳을 지켜야 하는 리아 캬베데 역시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빌어먹을.’

지도를 보며 호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깊게 숨을 내뱉다가 들이마시기를 반복했다. 정말로 골든 크로우가 페리카나를 점령하게 된다면 기껏 빼앗은 영토 중 일부를 도로 토해내야 할지도 몰랐다. 불필요하게 길어지는 보급로와 방어선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그나이 칼츠만 영감 새끼. 분명 도움은 필요 없다고 했는데 어째서 이레네 아르티아가 움직인 거지?’

그것도 듣자하니 블루 스케일의 대함대를 이용해서 병력을 상륙시켰다고 했다. 결국 이 말은 골든 크로우의 독자적인 행동이 아닌 팔 왕국 아니 아이리스 성국을 제외한 칠 왕국 전체의 의지라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그런 호의 걱정은 이틀 후, 골든 크로우에서 보낸 인물이 토슬치에 도착하고 난 순간 사라지고야 말았다.

“골든 크로우가 저, 점령한 모든 영토를 우리들에게 넘겨주겠다고요?”

자신이 들은 이야기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던 까닭일까? 신윤아가 멍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윤아만이 아니었다. 브로리나 니나 다니엘레도 얼굴에 나타난 감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호도 비슷했다. 그만큼 골든 크로우가 보낸 인물, 그나이 칼츠만의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그렇네. 이레네 아르티아 폐하께서는 이번 전쟁에서 점령한 수인 왕국의 영토를 자네에게 넘겨주겠다고 했네. 천족과의 전쟁에서 블루 스케일을 도왔던 은혜를 비롯해 그대에게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폐하의 호의일세.”

“……그렇군요.”

잠시 뜸을 들인 호는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골든 크로우는 자신에게 빚을 지워놓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레네 아르티아가 이렇게나 나한테 관심을 보일 줄은 몰랐는데.’

어떻게든 자신이 칠 왕국과 밀접한 관계라는 사실을 어떻게든 대륙에 알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저 쪽 부터 스무 명을 데리고 돌아가도록 합니다.’

‘나이트 딕스. 목숨만 살려도 됩니다.’

선택의 신전에서 봤던 기사 여왕의 차가운 모습을 떠올리며 호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이 대륙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영웅들이 자신을 주목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만은 금물이었다.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영지의 힘과 군사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호는 이런 골든 크로우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행여나 골든 크로우가 페리카나를 점령한다면 정말로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이레네 아르티아 여왕 폐하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자네가 아이리스 성국을 대신해 새로운 팔 왕국의 일원이 된다면 폐하께서는 정말 기뻐하실 걸세.”

“그 건에 대해서는 심사숙고 해보겠습니다.”

그나이 칼츠만의 말에 호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서 날로 먹으려고!’

마음 같아서는 코웃음을 치고 싶었지만, 받은 게 받은 지라 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이었다. 그런 호를 뒤로 한 채 그나이 칼츠만은 집무실에 모인 호의 영웅들을 바라보았다. 수인, 천족, 소환자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집무실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니나 다니엘레 그리고 리셴르나인가?’

그나이 칼츠만의 얼굴에 미미한 감정이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수인족의 십이멀이자 바리안스의 대지를 지배하고 있던 리셴르나가 호에게 붙었다는 사실은 널리 퍼진 상황이었다. 그와 함께 화이트베의 전사 소식 역시 모르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소환자의 능력이 이렇게나 뛰어났던가?’

림드 산맥의 패자 윤호의 등장은 이 대륙을 지배하고 있던 여러 지배자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안겨다주고 있었다. 1회 차 소환자로 다른 소환자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 그는 현재 자신의 세력을 이끌며 리그너스 대륙을 진동시키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엘프 왕국, 마족, 천족들이 이미 한 방씩 얻어맞았고, 수인 왕국은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던 영토의 상당수를 빼앗기는 치욕을 맛보기도 했다. 게다가 이번 종족 연합군 역시 실패로 돌아갈 상황이었다. 그런 탓에 꿍꿍이를 알 수 없는 마족과 호의 세력이 있는 림드 산맥과는 거리가 제법 있는 정령들을 제외하면 이 대륙을 지배하는 대부분의 종족이 그에게 관심 및 경계를 보내고 있었다.

‘과연 펑 요가 이자만큼 성장할 수 있을까?’

골든 크로우에도 제법 유능한 소환자가 있었다. 윤호와 마찬가지인 1회 차 소환자로 이 세계에 빠르게 적응해 현재는 자유자재로 검기를 사용하기까지 했다. 아직 실전 경험은 부족했지만, 그래도 경험만 쌓으면 전장에서 한 사람 몫은 할 수 있을 거라는 게 골든 크로우 무장들의 평가였다.

하지만 그나이 칼츠만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펑 요이름의 소환자가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눈앞의 소환자는 격 자체가 달랐다.

* * *

펑! 퍼퍼펑!

빛의 줄기들이 지면으로 떨어져 내리며 사방에서 커다란 폭발을 만들어 내었다. 엑스칼리버와 골드 이글이 만들어내는 마력의 포화였다.

“반격! 반격해라!”

요란한 포격 속에서도 전의를 잃지 않은 수인 영웅이 자신의 무기를 빼들고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런 영웅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이는 거의 없었다. 적의 마장기를 견제해야 할 카니앗산 부대는 대부분이 파괴되거나 도망을 친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돌격! 나크 평원을 침략한 수인들을 몰아낸다!”

둠디스트와 파인플의 높은 성벽을 믿고 거북이처럼 방어에만 열중하던 한시진은 이레네 아르티아가 이끄는 인간들의 부대가 적의 후방을 교란하고, 호가 화이트베를 무찔렀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성문을 활짝 열었다.

티르거의 습성을 역이용해 상대의 마장기 전력을 무력화 시켰고, 림드 산맥을 통해서 계속해서 수송되고 있는 엑스칼리버를 다수 모은 터라 마장기 전력에서도 압도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정한 공격이었다. 그리고 이런 한시진의 공격은 믿기 힘든 소식들이 부대를 휩쓴 상황에서 사기가 급격하게 떨어진 수인들에게 치명타로 작용하고 있었다.

“크아아악! 아악!”

“젠장! 꼬꼭!”

폭발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들려오는 수인 병사들의 비명에 팔쿤은 얼굴을 찌푸리고는 자신의 귀를 틀어막았다. 수많은 병사들과 그들을 지휘하는 영웅들이 상대의 공격에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있었다.

눈으로 보이는 적의 마장기만 스무 기가 넘었다. 듣자하니 쉰 기가 넘는 마장기가 이번 공격에 동원되었다고 했다.

‘대체 언제 이런 전력을!’

상대의 무시무시한 전력에 팔쿤은 온몸이 오싹했다. 소환자의 힘은 자신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실수였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소환자의 날개를 꺾었어야 했다. 원인들이 소환자 윤호와 대치하고 있었을 때만 하더라도 어렵지 않게 그를 제압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소환자들의 무기력하고 무능력만 모습에 시선을 빼앗긴 게 실수였다.

그런 알량한 생각이 윤호에게 시간을 주었고, 그에게 이런 힘을 키워낼 수 있게끔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날카롭게 세워진 소환자의 칼날은 수인들의 심장으로 향할 터였다.

콰아아앙!

마력의 빗줄기가 팔쿤의 근처에 떨어지며 커다란 구덩이를 만들었다. 포격에 당해 신음하는 병사들의 모습에 팔쿤은 고개를 돌렸다.

불과 보름 전만 하더라도 두려울 게 없었던 대군이 적의 공격에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모습은 보고 있는 것이 괴로울 정도였다.

“티르거! 티르거는 어디 있냐?! 꼬옥!”

팔쿤은 온몸을 떨 만큼 강한 분노를 담아 외쳤다. 이런 상황을 만든 이는 다름 아닌 호인족의 십이멀 티르거였다.

그의 멍청한 행동만 아니었어도 마장기 전력이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테고, 그랬다면 적들의 포격에 어느 정도는 반격을 하며 무사히 뒤로 물러났을 터였다.

하지만 자신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통신구에서는 다른 마장기 오너들의 비명만 들려올 뿐 티르거나 호인족 마장 기사들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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