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7
리그너스 대륙전기 257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하면 되지?”
리셴르나가 호에게 물었다. 어차피 한 배를 타기로 한 상황.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그녀도 적극적으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커티삭의 마족은 아멘드마와 코르다에 있는 병력을 이동시켜서 막을 생각이야. 너는 군트락을 점령하고 나면 토슬치에 주둔해서 혹시나 모를 수인족의 도발을 막아줬으면 해.”
“……어렵지 않은 일이로군.”
군트락의 지리를 떠올리며 리셴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군트락과 붙어 있는 수인 왕국의 영토는 사파리의 열두 종족이 아닌 다른 군소 종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지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도발쯤은 한 손가락으로도 막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호가 바리안스의 대지에서 화이트베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반격을 꾀할 무렵, 나크 평원에서도 큰 이변이 벌어지고 있었다.
* * *
“거, 검은 악마! 크아악!”
데스 사이더의 낫이 카니앗산급 마장기를 스치고 지나가면서 그대로 조종석을 박살냈다. 카니앗산이 여덟 개의 다리를 이용해 데스 사이더의 공격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검은 악마는 자신의 먹잇감을 놓치지 않았다.
“빌어먹을! 마장기 편대는 죄다 어디로 간 거야! 꼬꼬댁!”
둠디스트 성을 공략하고 있던 포격 부대가 하얀 악마의 손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팔쿤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카니앗산으로 이루어진 포격 부대를 지켜야 할 마장기 편대는 온데간데없었고, 오히려 적들의 마장기가 아군을 유린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전력이 다른 종족이 아닌 조인들만의 힘이라는 점이었다.
펑! 콰쾅!
“적들이 돌격해온다!”
“방어진을 유지해! 밀리……. 커억!”
마장기뿐 아니라 실버 문, 할리온, 윙드 훗사르로 이루어진 적들의 공격도 이어졌다. 고위 병종들을 앞세운 상대의 맹공에 팔쿤은 둠디스트 성의 공략은커녕 어떻게든 병사들을 살리면서 물러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크와아아앙!
그리고 그런 팔쿤의 눈에 괴상한 광경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멀리서 티거알리카급 마장기가 수인 왕국의 마장기 편대를 이끌고 빠르게 지면을 달리고 있었다. 호인족의 십이멀인 티르거의 전용기로 수인들 사이에서는 타이완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있는 마장기였다.
“이런 X새끼……. 꼬꼭!”
하지만 티르거가 이끄는 마장기 편대는 적들의 맹공을 받고 있는 자신들을 돕기는커녕 적의 마장기 한 기만을 죽어라 쫓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쫓는 이는 소환자 윤호의 휘하에 있다는 호인족, 아쉬카로트가 탑승한 마장기였다.
“거기 서라! 이 배신자!”
티르거는 아군이 당하던 말던 아쉬카로트가 전장에 모습을 나타내기만 하면 미친 것처럼 눈이 돌아갔다. 물론, 처음에는 제법 효과도 보았다. 호인 마장기 편대의 가공할 돌진에 상대가 무너지면서 엑스칼리버를 다수 파괴하는 대승을 거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 두 번에 불과했다. 상대의 지휘관은 유능했고, 그녀는 호인들이 아쉬카토르만을 노린다는 것을 빠르게 알아챘다. 그리고 그것을 역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티르거가 아쉬카로트를 쫓고 있을 때마다 아군의 마장기 편대나 부대들이 소환자 군대의 맹공에 의해 하나둘씩 무너져 버렸다. 강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는 호인족의 마장기 편대가 빠져나가는 순간 검은 악마가 들이닥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티르거! 계속 그렇게 호인족의 배신자만을 쫓다가는 나크 평원은커녕 둠디스트 성도 점령하지 못할 것이오!’
‘흥! 우리는 수인 왕국의 대왕 아쉬토님의 명령을 따른다. 아쉬토님께서는 이번 전쟁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호인족의 배신자 아쉬카로트의 목을 베어오라고 하셨다!’
‘그것도 전쟁에서 승리를 거둬야지만 가능한 일 아니오?!’
계속된 패배에 팔쿤은 티르거를 찾아가 현재의 상황에 대해 경고를 했다. 하지만 티르거는 듣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다른 종족들의 피해가 아닌 호인족의 배신자를 처단하는 일이었다.
“꼭! 저 새대가리만도 못한 새끼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는 게 아니었어!”
팔쿤이 화를 내며 말했다. 하지만 전황은 이미 소환자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윤호의 전력은 자신들의 상상이상으로 강했고, 티르거는 그 이상으로 멍청했다. 전쟁 초반 돌격을 통해서 상대의 마장기 전력을 무너뜨렸던 우위 역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림드 산맥의 가공할 만한 생산력은 하루가 멀다 하고 마장기들을 생산해서 둠디스트와 파인플로 보내고 있었다.
‘장기전이라면 우리가 불리한 마당에……!’
결국 오늘도 아무런 성과 없이 병력만 날린 셈이었다. 그리고 이 피해는 고스란히 이들에게 병력 및 군량을 지원하는 조인들에게로 다가올 터였다. 그렇지 않아도 신성 폭발의 영향에서 이제야 회복을 한 페렛 습지대는 이들을 위한 군량을 쥐어짜내느라 또 다시 영지의 상태가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리셴르나와 연합한 화이트베만을 믿는 수밖에 없는 건가?”
전투가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만 흘러간다면 적들의 방어를 무너뜨리기는커녕 나크 평원의 영토 한 줌도 획득하지 못할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저들의 역습에 페렛 습지대가 당할 가능성도 있었다.
쿠우웅!
“오, 온닷!”
한 마장기사의 다급한 통신에 팔쿤이 정면을 바라봤다. 지면 위의 흙들이 하늘로 솟구쳐 오르면서 데스 사이더가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검은 악마?! 꼬오옥! 꼭! 어느새!”
자신을 노리는 데스 사이더를 확인한 팔쿤이 마장기를 움직였다.
콰지지직!
눈 깜짝할 사이에 접근한 데스 사이더가 팔쿤을 향해 자신의 낫을 휘둘렀고, 엄청난 힘이 팔쿤을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크으으윽!”
팔쿤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검은 악마 한시진. 윤호의 군대를 이끌고 있는 총사령관으로 소환자였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실력을 지닌 마장기사였다. 이번 전쟁에서 그녀의 손에 당한 수인 마장기만 하더라도 무려 열 기가 넘었다.
“빌어먹을! 이, 이 몸을 얕보지 말라고! 꼬끼오!”
웨어 타이거의 칼날을 이용해 검은 악마의 낫을 밀어낸 팔쿤은 포효와 함께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런 팔쿤의 돌진에 한시진은 다른 마장기들을 상대할 때와는 다르게 뒤로 몸을 피했다. 상대 마장기사의 실력이 이제껏 상대했던 녀석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전용기? 누구지?”
게다가 마장기의 생김새 역시 달랐다. 아무래도 수인 왕국의 고위 영웅들만 탑승한다는 특수한 마장기로 보였다.
‘어떻게 할까…….’
이번 전투의 최우선 목표였던 적들의 포격 부대는 궤멸시켰다. 자신과 마장기 편대의 돌격에 의해 살아남은 수인족의 카니앗산은 다섯 기가 채 되지 않았다. 그들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남은 거라고는 대 여섯 기의 마장기와 눈앞의 지휘관급 기체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들 모두를 전멸시키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자면 제법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피해 역시 만만치 않을 터였다.
“아쉬카로트. 그 쪽의 상황은 어때요?”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 같아요!”
통신구를 통해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에 한시진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고민은 길지 않았고, 판단 역시 쉽게 내려졌다.
“사기를 잃고 도망을 치는 녀석들을 굳이 끝까지 추격할 필요는 없겠지. 모두 퇴각해서 아쉬카로트를 지원한다!”
한시진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수인들을 공격하던 병사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엑스칼리버들 역시 뒤로 물러서면서 MLC 의 충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곧 이어질 다음의 전투를 대비하는 모습이었다.
“……후우.”
적들이 퇴각하는 모습에 팔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신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리는 데스 사이더를 바라봤다. 만약 저들이 끝까지 추격을 할 생각이었다면 자신은 여기서 뼈를 묻었어야 할 지도 몰랐다.
“이렇게 되면 저 멍청한 녀석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팔쿤의 시선이 티르거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에게 그런 말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물론, 적들이 그를 노리고 있다고 경고를 해줄 생각도 없었다. 그리고 전쟁은 다른 쪽에서도 시작되고 있었다.
* * *
촤아아악! 철썩!
파도를 가르며 배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 수는 약 오십 여척 정도 정도로 대다수가 대형 함선으로 이루어진 대함대였다. 그리고 그 뒤로 백여 척에 가까운 수송선들이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함선들의 메인 세일에 그려진 커다란 백조 그림이 그들의 정체를 알려주고 있었다. 해상 전력으로는 대륙 제일이라고 불리는 블루 스케일의 함대로 도베르만 후작이 이끄는 제1함대였다.
그리고 이 대함대를 이끄는 도베르만 제독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이유는 그의 옆에서 검을 붙잡고 서 있는 한 여인 때문이었다.
“상륙까지는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도베르만 제독?”
여인이 입을 열자 도베르만 제독이 주위를 살피는 것을 멈추고는 고개를 돌렸다.
“바람이 이렇게만 계속된다면 세 시간 이내로 디치 플레이스만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세 시간이라…….”
도베르만 제독의 말에 여인은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은 그녀의 행동에 도베르만 제독 역시 조용히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려야겠군요.”
“정비는 상륙 후에 하시는 게 병사들에게도 편할 거라 생각됩니다만?”
“기습은 상대가 대처할 수 없을 정도로 불시에 하는 것이 가장 효과가 좋다고 배웠습니다.”
빙긋 웃는 여인의 모습에 도베르만 제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언을 그만두었다. 눈앞의 여인은 자신의 알량한 조언 따위는 필요가 없는 인물이었다. 그녀의 정체는 팔 왕국의 수장인 골든 크로우의 지배자이며, 전장의 황금발톱 혹은 기사의 여왕이라 불리는 영웅 중의 영웅 이레네 아르티아였다.
그런 이레네 아르티아가 이끄는 골든 크로우의 1 군단이 블루 스케일의 해상 함대를 이용해서 수인족의 영토인 디치 플레이스만에 상륙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굳이 직접 출진을 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랜달이나 치토크도…….”
이레네 아르티아의 뒤에서 시립을 하고 있던 그나이 칼츠만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번 원정에는 골든 크로우의 황금기사인 그랜달이나 치토크도 함께하고 있었다.
“그나이 칼츠만. 그대가 나를 생각하는 그 마음은 고맙게 여기고 있다. 하지만 전장의 황금발톱이 기사들의 뒤에 숨을 수는 없지 않은가?”
“폐하에 대해 아는 이라면 그 누구도 감히 그런 생각은 하지 않을 겁니다, 폐하.”
“그런 이유만이 아니다. 그나이 칼츠만.”
이레네 아르티아의 말에 그나이 칼츠만은 입을 다물고는 이어질 그녀의 말을 조용히 기다렸다.
“골든 크로우에 닥친 악재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소환자 윤호의 도움이 무조건 필요하다."”
“이미 그는 골든 크로우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안다. 그대의 뛰어난 교섭능력 덕분이지.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그들이 주는 것을 받고만 있을 수는 없는 법. 나의 출진은 그에 대한 골든 크로우의 감사행위일 뿐이다.”
그나이 칼츠만은 입을 다물었다. 여왕 폐하의 결심이 세워진 이상 그녀를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랜달하고 치토크에게 여왕 폐하의 호위를 부탁해야겠군.’
황금 기사인 그 둘이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레네 아르티아의 안전만큼은 무사히 지켜낼 터였다. 대륙에 명성을 떨치며 수많은 적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는 이레네 아르티아였지만, 태어날 때부터 그녀를 지켜봤던 그나이 칼츠만에게는 어디까지나 지켜줘야 할 소녀였다.
“무슨 배지? 굉장히 많은데?”
“우리들에게 저런 배가 있던가? 다 물을 싫어하는 녀석들일 텐데?”
“백조 그림?! 저, 적이다! 블루 스케일……!”
해안을 가득 메우는 함대의 등장에 조인들에게 비상이 걸렸다. 하지만 해상 전력이라고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그들이 블루 스케일의 해상 함대를 막아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펑! 퍼퍼펑!
함선에 배치된 마력포가 불을 내뿜으며 해안가를 초토화시키며 방어 시설을 무력화 시켰다.
조인족의 비행병들이 함대를 막아서기 위해 날개를 펼쳤지만, 궁병들의 일점사로 인해 고슴도치가 되어 바다 속으로 떨어졌다.
“출진한다!”
그렇게 블루 스케일 함대의 지원을 받아 안전하게 상륙을 한 이레네 아르티아가 자신의 검을 높게 들어 올렸다.
“출진이다!”
“마장기! 마장기 부대를 가동시켜!”
“대열을 지켜라!”
이레네 아르티아가 탑승한 인간족의 A등급 마장기인 라이온레인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시작으로 쉰 기에 가까운 마장기가 가동을 시작했다.
덕분에 수인 왕국, 정확히 말하면 조인들은 난리가 났다.
나크 평원에 모든 병사들이 집결한 상황에서 이십 만에 가까운 대병력이 자신들의 영토인 디치 플레이스만에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병사들을 지휘하는 인물은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었다. 기사의 여왕이라 불리며 대륙 전역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영웅, 이레네 아르티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