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4
리그너스 대륙전기 254
“좋아. 우리들도 움직인다. 지금부터 병력을 나누도록 하지. 통신은 마장기를 통해서 연결한다.”
아무래도 리셴르나는 이번 전쟁이 끝나고 나면 조금은 혼을 내줘야 할 것 같았다. 자신을 귀찮게 한 이유로 말이다.
“그러면 귀여운 곰돌이와 앙칼진 고양이를 잡으러 가볼까?”
화이트베를 상대로 한 개미굴에서의 패배란 호의 머릿속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을 해봤고 또한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도 수없이 경험을 했던 전투였다. 게다가 자신에게는 수인들의 감각 따위는 결코 따라올 수 없는 절대적인 무기도 있었다.
제덴 사막의 개미굴에 도착한 화이트베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다름 아닌 개미굴의 입구를 파악하는 일이었다. 이 주변의 지리에 빠삭한 리셴르나가 있던 탓에 화이트베가 입구를 파악하는 일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파악한 개미굴의 입구를 물 샐 틈 없이 포위를 한 화이트베는 아래로 정찰대를 내보내 호의 군대가 숨어 있을 만한 위치를 하나하나씩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개미굴로 내려간 정찰대들은 시시각각으로 내부의 정보를 화이트베에게 알려주었다.
“이 녀석들 전부 A 지역에만 숨어 있는 모양인데?”
“개미굴에 숨는다는 기발한 방법을 쓰기는 했지만 어설퍼. 역시 소환자인가? 속셈이 뻔히 보이는군.”
리셴르나의 말에 화이트베가 거친 콧김을 내쉬며 말했다.
A 지역의 개미굴 입구는 아트리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 몰려 있었다. 호는 자신들이 붉은 핏빛의 대지로 움직이려는 순간 아트리그를 공격해 보급을 끊을 생각이 분명했다.
“그래도 만약 저들의 의도가 제대로 먹혀들었다면 곤란했을 거야.”
리센르나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뻔히 보이는 속셈이지만 만약 그 속셈에 넘어갔더라면 큰 일이 벌어질 뻔했다.
“맞습니다. 보급이 부족한 상황에서 합동공격을 당했을 겁니다. 화이트베님께서 적들의 의도를 파악했으니 이제는 공을 세우실 일만이 남았군요.”
“……!”
화이트베의 부관인 리저드맨이 손뼉을 짝 치며 말했고, 리셴르나가 눈을 부릅떴다. 호가 A 지역에 숨어 있다는 것은 자신이 밝혀낸 정보였다. 심지어 개미굴로 내려간 정찰대의 대부분이 묘인족의 흑묘들이었다.
단지 화이트베는 자신이 얻어내고 밝혀낸 정보를 토대로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을 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 리저드맨의 발언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모든 공이 화이트베에게로 넘어가고 있었다.
‘빌어먹을 새끼. 진짜 마음에 안 드네.’
리셴르나는 눈을 감으며 참을 인 자를 세 번 그렸다. 저 도마뱀의 날름거리는 혀를 당장이라도 뽑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면 개미굴에 유충처럼 숨어 있는 녀석들을 모조리 소탕할 만한 작전을 짜볼까?”
화이트베가 두꺼운 손바닥을 비비며 말했다. 상대가 어디 숨어 있는지도 알아냈고, 병력 또한 많았다. 남은 것은 개미처럼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적의 숨통을 서서히 죄는 일 뿐이었다.
그리고 사흘 뒤, A 지역에 위치한 개미굴의 입구를 모조리 포위한 화이트베의 병사들이 신호와 함께 천천히 개미굴 내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단숨에 상대를 포위해 동시다발적인 공격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만든 후 몰살을 시킬 계획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작전의 세부 계획들은 전부 리셴르나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리셴르나 만큼 제덴 사막 개미굴의 지형에 잘 앍고 있는 인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 * *
콰직!
마장기의 육중한 발이 거대 개미를 내리 밟았다. 짤막한 비명과 단단한 갑각이 부셔지는 소리와 함께 마장기의 발밑에서 진한 녹색 체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귀찮게도 달려드네.”
C등급 마장기, 메카리저드의 오너인 게코는 계속해서 달려드는 개미떼들을 바라보며 불평을 터뜨렸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흙으로 만들어진 벽과 여기저기 나 있는 구멍 통로 그리고 마장기의 장난감 축에도 끼지 못하는 허약한 개미들뿐이었다.
“소환자 새끼는 대체 왜 이런 곳에 숨어가지고는 우리들을 귀찮게 만드는 거야?”
“자기 딴에는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모양이겠지. 그렇다고 놀 생각은 하지 말라고. 이 개미 녀석들 수가 제법 많아서 병사들에게 달라붙었다가는 피해가 생길지도 몰라.”
“아니, 왜 우리 쪽에는 빼액곰 같은 SS랭크 보병의 배치가 없는 거야? 걔네들이 있었으면 굳이 마장기를 움직일 필요도 없었잖아?”
“멍청한 놈. 그런 고위 병종이 남아 돌리가 없잖아. 이번 원정에도 고작 천 마리만 동원된 녀석들이라고. 아, 거기 아니다. 이쪽으로.”
동료의 말에 게코는 정면의 통로로 향하려는 것을 멈추고는 우측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니, 틀기 직전이었다.
“어?”
정면의 통로에서 푸른빛이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졌다. 거대 개미의 눈동자는 아니었다. 그 녀석들의 눈은 노란색이었고, 어둠 속에서 빛이 나지도 않았다.
“왜 그래?”
가만히 서 있는 게코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낀 동료가 통신을 보냈다.
“아니, 안 쪽에 뭐가 있는 것 같아서.”
“안 쪽에 뭐가 있다고?”
게코의 말에 동료 오너가 무엇을 확인하는 듯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통신구를 통해 울려 퍼졌다.
“이상하다? 그 쪽에는 아무것도 없을 텐데? 24 연대는 11 시 방향 쪽에서 25 연대는 9 시 방향 쪽에서 움직이고 있으니까…….”
“그래? 내가 잘 못 봤나? 몬스터는 아닌 것 같았는데. 분명 빛 같은 게…….”
게코는 머리를 갸웃했다. 분명히 본 것은 같았지만 너무나도 짧게 나타났다 사라진 터라 착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때였다.
“차원의 문 소환. 디멘션 게이트!”
인간의 목소리와 함께 푸른 실선이 하나의 그림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마법진이 새겨진 커다란 문의 그림이었다. 그렇게 그림이 게코의 눈앞에서 완성되었고, 그려진 문은 강렬한 빛을 발산하며 사방팔방으로 마력을 쏘아 보내기 시작했다. 군단의 소환사 신윤아의 스킬 차원의 문 소환이었다.
“가랏! 빼액곰!”
쿠워어어어어엉!
그리고 차원의 문에서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수인의 SS랭크 보병 빼액곰들이었다.
“어, 어어?!”
우렁찬 고함과 함께 자신을 향해 흉흉한 기세로 돌진하는 빼액곰을 보며 게코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소환 마법을 보는 것도 드문 일이었지만 차원의 문에서 나타난 게 다름 아닌 수인, 그것도 자신들을 지휘하는 십이멀 화이트베의 종족인 웅 족의 병사였기 때문이었다.
“이 병신아! 뭐하는 거야! 적이잖아!”
통신구를 통해서 들려오는 경고에 게코는 빠르게 마장기를 움직였다.
반응이 조금 늦었던 모양인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빼액곰과 부딪치는 느낌이 들었지만 마장기의 피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런, 젠장할! 내 애기에 기스가 났잖아!”
SS랭크라지만 고작 일반 병사를 보고 당황한 것이 부끄러웠던 모양인지 게코가 모두가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고는 상대를 찔러 죽이기 위해 메카리저드의 창을 높게 들어 올렸다.
투쾅! 투쾅!
그리고 그런 메카리저드를 향해 두 줄기의 빛이 순차적으로 발사 되었다. 골드 이글과 엑스칼리버의 공격이었다.
“크아아아아아악!”
순식간에 메카리저드의 머리가 날아갔고, 안에서도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골드 이글의 공격이 조종석의 반을 녹인 탓이었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골드 이글의 정밀 사격은 게코가 탑승하고 있던 조종석을 완전히 녹여버렸다.
“게, 게코!”
자신의 동료가 죽는 것을 본 마장기의 오너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들을 따르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빛이 몇 번 반짝이는가 싶었더니만 든든한 아군이었던 메카리저드가 반파 된 것이다. 그런 적들의 모습에 신윤아가 사납게 손을 떨치며 외쳤다.
“한 명도 살려 보내지 말아요!”
그 말을 끝으로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실버 문들이 빠른 속도로 쇄도했고, 주문을 마친 할리온의 마법이 수인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이런 공격은 개미굴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끄아아아악!”
“적?! 적이다! 적습이다!”
“마장기의 공격이다! 엑스칼리버! 엑스칼리버가 포함되어……?! 빌어먹을! 천족! 천족이다! 상대는 세인테르 등급!”
“황금색 마장기가 아군을 학살하고 있다! 무시무시한 녀석이! 으아아아악!”
갑자기 마장기를 통한 통신들이 연달아서 들어오고 있었다. 워낙에 많은 통신이 동시에 몰려드는 터라 통신구가 잠깐이나마 방전이 될 정도였다. 공통점이라면 전부 적습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씨, 씨발. 이건 또 뭐야?!”
여느 부대와 다름없이 천천히 행군을 하고 있던 리셴르나는 통신이 들어온 순간 재빠르게 진군을 멈췄다. 일단 먼저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쉽게 당할 녀석이 아니라니까.’
보아하니 아무래도 아군의 포위가 끝나기 전에 호가 먼저 움직인 모양이었다.
지금 이 순간 고래고래 욕과 소리를 지르고 있을 화이트베와 재수 없는 도마뱀을 떠올리며 리셴르나는 지도를 펼쳤다. 그러고는 통신이 들어온 마장기의 위치를 확인해 그려놓은 지도에 점을 찍기 시작했다. 호의 병사들이 어디에 있을지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아군이 공격당한 지점을 토대로 범위를 넓히다보면…….
“…….”
지도를 보고 있던 리셴르나가 펴고 있던 손바닥을 움켜쥐었다. 더운 것도 아닌데 손에는 땀이 축축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대기를 하고 있는 아군의 병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 본인이 타고 있는 웨어 타이거와 캣츠 두 기 그리고 흑묘 천 마리를 포함한 잡다한 병과로 이루어진 오천의 병사가 그녀가 지닌 전력의 전부였다. 커티삭에 주둔하고 있던 병사들이었다.
그렇게 잠시 부하들을 바라보던 리셴르나가 통신을 열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 비밀 동맹. 유지되고 있는 맞…….”
리셴르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면의 어둠 속에서 여러 개의 빛이 동시다발적으로 밝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빛의 정체를 확인한 리셴르나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키마라이 한 기와 B등급 마장기인 엑스칼리버 세 기, 자넷과 골드 이글 편대가 자신을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는 실버 문을 비롯한 호의 고위 병종들이 언제든지 돌진한 기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언제?!’
척! 척! 척!
후방으로도 호의 병사들이 진군해오는 모습을 보며 리셴르나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방금 전, 자신이 지나왔던 길임에도 불구하고 저들의 기척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흑묘들 역시 다들 당황한 모습이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들은 호의 병사들에게 포위되고 있던 모양이었다.
“역시 수인족의 십이멀. 감이 좋은데?”
그런 리셴르나의 귀로 호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지은 죄가 있던 터라 리셴르나는 그런 호의 장난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혹시 오해가 있다면 우리 대화로 푸는 게 어때? 냐앙?”
자신도 모르게 묘인족 특유의 애교가 튀어 나왔다. 입에서는 내본지 오래된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애교였다.
‘빌어먹을…….’
아니나 다를까 전투를 준비하고 있던 수인족들은 아까보다도 더욱 당황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의 상황에서 호와 전투를 벌이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이나 다름없었다. 괜히 명예를 지킨답시고 헛된 죽음을 맞아봤자 짐승신은 자신들을 반기지 않을 터였다.
“캣닢 공장을 박살낸 것에 화가 조금 나기는 했지만 이미 다 잊었다고. 그리고 이 개미굴까지 수인들을 유인하지 않았느냥?”
리셴르나가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사실 호에게 갖다 바칠 의도는 아니었지만, 보아하니 돌아가는 상황이 그렇게 되고 있었다. 통신구를 통해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아군이 공격을 당하는 소리들뿐이었다.
그런 리셴르나의 귀로 호의 웃음이 들려왔다.
“유인이라.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뭐, 너무나도 단순하게 밀고 들어온 감이 없잖아 있지. 그러면 말해.”
“뭐, 뭐를?”
리셴르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분위기는 이미 호에게로 넘어 있던 탓에 어떤 조건을 내밀어도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뭐기는? 개미굴에 들어온 수인들의 병력과 위치지. 분명 니가 작전을 짰을 텐데? 다 기억할 거 아냐.”
“후우. 꼭 그래야 되겠느냥?”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저 영악한 소환자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저 녀석의 손에서 놀아난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냥 이야기를 해 줄 수는 없었다. 적어도 자신과 이 병사들의 안전은…….
“십 분 안에 모든 걸 말해주면 아트리그의 자치권과 병사들의 생명은 보장하지. 아, 캣닢 공장도 크게 만들어 줄게. 알잖아? 우리 비밀 동맹.”
리셴르나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화이트베는 지금의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없을 터였다. 설령 무사히 퇴각을 한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보여준 저 녀석의 영악함에는 당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젠장. 이러다가 저 소환자 녀석이 망하면 진짜로 빼도 박도 못 하고 완전히 끝인데…….”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리셴르나는 지도를 움켜쥔 채 마장기의 조종석을 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