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그너스 대륙전기-253화 (253/522)

# 253

리그너스 대륙전기 253

“그러다가 정말로 배신을 하면 어떻게 해요?”

“응? 그게 뭐 어때서?”

윤아의 말에 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이 참!”

그런 호의 반응이 윤아에게는 굉장히 답답하게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호는 정말로 리셴르나가 배신을 해도 큰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자신의 군대는 무사히 제덴 사막에 자리를 잡았고, 그런 까닭에 화이트베라는 곰 녀석은 아멘드마와 코르다를 노리지 못하고 제덴 사막에 발이 묶여 있었다. 하기야 공세를 취하기에는 뒤통수가 간질거리다 못해 뜨끔할 터였다.

“그런데 이런 곳에 군대를 숨길 생각은 어떻게 했어요?”

사방을 둘러보던 김유진이 호에게 물었다.

“너 리그너스 대륙전기 플레이 해봤다며? 이건 기본 중의 기본 아니야?”

그런 유진의 질문에 호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헤헤. 저도 윤아처럼 에디터를 써서 모든 기술 완료, 돈 무한으로만 게임을 플레이했거든요.”

“그러면 무슨 재미로 게임을 했냐…….”

“당연히 무쌍이죠! 나보다도 두, 세 단계나 기술력이 떨어지는 적들을 가지고 노는 그 재미!”

흥분한 유진의 목소리가 커다란 통로를 타고 울려 퍼졌다. 잠시 후 소리를 들은 개미들이 샤삭거리며 모습을 드러냈지만, 엄청난 수의 병사들과 마장기를 발견하고는 재빠르게 모습을 감췄다.

군데군데 밝은 빛을 내는 돌들이 박혀 있는 이 커다란 통로들은 제덴 사막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거대한 던전, 제덴 사막의 개미굴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 개미굴의 일부였다.

“쟤들이 저런 모습도 있었네. 호 오빠, 쟤네들 도망가는 거 조금 귀엽지 않아요?”

이빨을 들이밀며 모습을 드러냈다가 후다닥 몸을 돌려 도망을 가는 개미들을 가리키며 유진이 말했고, 호가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가까이서 보게 되면 그런 말은 안 나올 텐데?”

“저는 다리 많은 애들만 아니면 상관없어요. 바퀴벌레도 간단히 잡을 수 있는데, 개미쯤이야 뭐.”

“저는 싫어요. 개미는 진짜……”

유진과는 달리 윤아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몇 가닥 잡아 뜯었다.

크리솔라이트의 꿈 퀘스트를 위해 그린 드래곤 레피스트 퓨리온을 만나러 가던 도중 이 개미굴에서 경험치를 올렸던 경험이 있는 그녀는 개미라면 딱 질색인 모습을 보였다. 하기야 그때 사냥했던 개미의 수가 모르긴 해도 몇 천 마리 이상은 될 터였다.

“어쨌든 개미굴에 숨은 이상 수인들이 우리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을 거야. 아무리 리셴르나가 사막의 꾀주머니라고 해도 개미굴의 지리를 전부 꿰뚫고 있을 지는 못할 테니까.”

“그런데 오빠는 꿰뚫고 있죠.”

“아니,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엔딩을 본 사람들은 전부 오빠처럼 폐인이에요? 어떻게 이런 미로나 다름없는 지리를 전부 외우고 있는 거지?”

거침없이 자신을 폐인이라고 부르는 유진의 말에 호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구겨졌다. 이건 전부 지도 창과 공략본 덕분이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그 사실을 밝힐 수는 없던 탓에 어쩔 수 없이 입만 뻐끔거릴 뿐이었다.

“그런데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생각이지?”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세 남녀를 보던 브로리가 입을 열었고, 모두의 시선이 호에게로 쏠렸다. 그리고 팔짱을 끼고 있던 호는 자신의 팔꿈치를 손가락으로 몇 번 두드리고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화이트베라는 녀석이 우리를 찾아내면.”

“우리를 찾아내면? 사막의 꾀주머니라 불리는 리셴르나도 우리를 못 찾고 있는데 그 녀석이 우리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확신하지?”

“간단해.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면 돼.”

“알려준다고?”

브로리가 머리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 모습이 꽤나 귀여웠기에, 호는 잠시 브로리를 감상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응. 성 안에 틀어박혀 있는 녀석들을 끌어내야지. 힘들여서 공성전을 할 필요는 없잖아?”

“그럼…….”

여전히 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한 브로리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윤아나 김유진 역시 비슷한 모습이었다.

“이래서 전략 시뮬레이션을 야매로 플레이한 애들이란.”

하지만 니나 다니엘레 조차도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 순간, 호는 한숨과 함께 머리를 긁적였다.

“전장을 제덴 사막으로 만들 거야. 정확히 말하면 이 개미굴에서 전투를 벌일 생각이지.”

실내 구조가 복잡한 전장에서의 전투는 지리를 아는 쪽이 굉장히 유리했다. 특히나 여러 갈래로 통로가 나눠져 있는 개미굴은 포위하기에도 또한 포위당하기에도 딱 좋은 장소였다. 그리고 호는 이런 개미굴의 지리를 훤하게 꿰뚫고 있었다.

또한 개미 방 하나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은 탓에 수만의 대군이 한데 뭉쳐 있을 수도 없었다. 필연적으로 난전이 벌어질 테고 그렇게 되면 병사들의 클래스가 높은 호의 군대가 훨씬 유리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호는 잠시 말끝을 흐리며 아직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진을 바라봤다.

“개미를 좋아하는 유진이가 좀 힘내줘야겠다. 귀찮은 몬스터들과 여왕개미가 있으면 여왕개미까지 청소를 해야 하거든.”

그러고는 입 꼬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어차피 그녀는 B등급 클래스의 소환자. 이 참에 경험치를 채우는 것이 본인에게도 좋을 것 같았다.

* * *

벅벅벅!

한 묘인이 자신의 발톱을 나무 책상에 대고 거칠게 갈고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발톱을 갈았는지 책상 전체가 발톱자국으로 깊게 파여 있었다. 책상만이 아니었다. 방 안에 있는 나무로 만들어진 가구에는 전부 예외 없이 발톱 자국이 깊게 패여 있었다.

“젠장할. 젠장할! 캣닢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남은 것도 하나도 없고. 아! 캣닢 땡겨!”

짜증이 가득 담긴 묘인의 행동은 잠깐 멈췄다가 계속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책상에 발톱을 갈려는 순간이었다.

우지끈!

“흐냥?!”

요란한 소리와 함께 책상이 쩍 하면서 좌우로 갈라졌다. 덕분에 책상의 틈 사이로 손톱이 끼어 있던 리셴르나도 중심을 잃고 그대로 넘어졌다. 그렇게 넘어진 리셴르나는 얼굴을 구기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안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자 웅족 한 마리가 슬그머니 얼굴을 들이밀었다가 상황을 파악하고는 조심스레 사라졌다.

“빌어먹을, 감시자 새끼들. 이렇게 해서 내 영향력을 완전히 없애버리겠다 이거지?”

정보를 취급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이 조그마한 공간에 갇힌 것도 벌써 며칠 째, 온몸이 근질거려 죽을 것만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모조리 뒤집어엎어 버리고 싶었지만, 자신의 군대와 영토의 지배권은 이미 화이트베의 손아귀에 넘어간 상황이었다.

“캣닢 공방 부순 거 용서해 줄 테니까 제발 모습이라도 드러내라. 이 견인만도 못한 새끼야…….”

만약 호 녀석이 비밀 동맹을 기억하고 있다면 당장이라도 화이트베라는 곰탱이를 물리치고 자신을 구해줬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리셴르나가 길게 한숨을 내쉴 그때, 흑묘 한 마리가 다급하게 리셴르나가 머무르는 집무실로 모습을 드러냈다.

“리셴르나 님! 차, 찾았습니다!”

“누구를? 호 녀석?”

리셴르나가 퀭한 표정으로 흑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흑묘의 고개가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서?! 어디에 숨어 있던 거지?”

“그, 그게 놀랍게도 개미굴이었습니다.”

“……!”

흑묘의 대답에 리셴르나의 눈동자가 크게 치떠졌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 그녀가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제덴 사막의 개미굴은 사막에서 오랫동안 생활을 해 온 수인들도 그 크기와 지리를 파악하지 못하는 엄청난 규모의 던전이었다. 발견된 입구만도 백여 개가 넘었다. 더욱이 거대 개미들이 제덴 사막 전체를 누비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수십만의 대군이 숨을 수 있을 만한 장소였다.

“정말로 비상한 새끼네. 어떻게 개미굴에 숨을 생각을 했지?”

게다가 지하로 길게 연결되어 있는 던전인 만큼 보급만 충분하다면 사막의 뜨거운 햇살은 물론이고 거친 기후 변화에도 아무 영향을 받지 않고 몇 날 며칠을 버틸 수 있었다. 굴속의 개미에 대한 위협이 있기는 하겠지만 삼십만 이상의 대군이면 개미들 쯤은 가볍게 학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개미굴 안에 숨어 있는 것을 어떻게 발견한 거지? 설마 너희들이 개미굴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을 테고.”

흑묘들이 아무리 은밀하다 해도 개미들의 초감각을 속일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리셴르나의 질문에 흑묘가 고개를 한 번 좌우로 저으며 대답했다.

“갑작스럽게 개미들의 이동이 시작된 것에 이상함을 느끼고 따라갔는데 개미굴 입구에서 호의 병사들과 개미들이 싸우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쫓아낸 거대 개미들을 모조리 학살하고 사막의 모래에 묻은 후에야 개미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흥흥흥. 그렇단 말이지.”

리셴르나가 콧소리를 내었다. 드디어 꽁꽁 숨어 있는 녀석을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리셴르나는 곧바로 화이트베에게로 향했다.

“개미굴에 숨어 있었다고?”

“그래. 우리들이 붉은 핏빛의 대지로 진격하는 순간 타이밍을 잡고 기습을 할 생각이었던 모양이야.”

“그렇단 말이지?”

리셴르나의 보고를 받은 화이트베는 즉각 병사를 움직였다. 이미 티르거가 이끌고 있는 본대가 나크 평원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던 상황인지라 마음이 다급했다. 발이 묶인 자신과는 달리 티르거가 나크 평원의 방어선을 뚫어내고 림드산맥까지 진격해 모든 영토를 점령하게 되면 전투의 공이 전부 호인에게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웅족이 많은 병사들을 움직인 보람이 없었다.

“그런데 그 녀석들이 숨은 입구는 제대로 찾은 거지? 함정은 아니겠지?”

하지만 무턱대고 진격을 할 수는 없었다. 호의 전력 역시 자신 못지않을 정도로 대군이었던 탓이었다.

“당연하지. 흑묘들의 청각을 무시하지 말라고. 그리고 여섯 개의 통로를 이용해서 진격해 들어가면 단숨에 포위할 수 있을 거다.”

리셴르나가 종이에 개미굴의 대략적인 지형을 그리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화이트베가 지도의 내용을 자세히 보려는 순간 그녀가 휙 하고 그의 손에서 지도를 치웠다.

“이건 순전히 내 공이라는 거 알지?”

“……그래. 만약 티르거보다 내가 먼저 림드산맥을 점령하게 되면 바리안스의 대지에 대한 지원을 보내도록 하겠어.”

“전투가 끝나는 순간 영토에 대한 자치권을 내놓는 것도 잊지 마.”

“물론이지. 대 회의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십이멀의 권한을 빼앗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퍽이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리셴르나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화이트베에게 건네주고 있었다.

“드디어 사냥의 시작이로군. 어디 펄떡이는 사냥감들을 사냥해볼까?!”

개미굴의 지형을 자세히 살펴보는 화이트베의 입가로 잔인스러움이 느껴지는 미소가 떠올랐다.

* * *

“수인들의 움직임입니다.”

수인에게 흑묘가 있다면 호에게는 실버 문이 있었다. 숲 속의 조그마한 동물 소리조차도 잡아낼 수 있는 그들은 모래 폭풍 속에서도 움직이는 병사들의 발걸음을 순식간에 캐치할 수 있었다.

“이제야 온 건가? 느림보 녀석들.”

실버 문의 보고에 침낭에 누워있던 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수인족의 정찰병으로 보이는 녀석에게 자신들의 움직임을 노출시킨 지가 벌써 나흘째인데 이제야 선봉대가 도착을 한 모양이었다. 역시나 조심성이 많은 웅족 다웠다.

하지만 느긋한 것은 호뿐인 모양이었다. 지루함에 하품을 하고 있던 신윤아와 김유진은 실버 문의 보고에 긴장감으로 경직된 모습을 보였고, 브로리와 니나 다니엘레 역시 어느 샌가부터 자신의 마장기를 정비하고 있었다.

“어디로 들어올 것 같지?”

“A–2 와 3 지역의 입구로 판단됩니다.”

실버 문의 보고에 호는 잠깐 머리를 갸웃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미간을 찌푸렸다. A–2, 3 지역의 입구는 자신들이 있는 위치와는 제법 떨어진 입구였기 때문이었다.

“수인족의 군대가 도착했습니다! 현재 A–16 입구를 통해 개미굴의 내부로 진입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어지는 실버 문들의 보고에 그들의 움직임을 생각하던 호는 주먹을 쥐어 자신의 뒤통수를 몇 번 두드리고는 시큰둥하게 입을 열었다.

“무턱대고 쳐들어오거나 조심스럽게 접근하거나 그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과감하네. 이거 우리들을 개미굴 안에서 포위를 할 생각으로 보이는데 어디 개미굴에 대해 잘 아는 녀석이라고 있나 보지?”

브로리의 말에 떠오르는 영웅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런 정보를 알고 있을 만한 녀석은 분명 사막의 꾀주머니라 불리는 리셴르나 그녀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