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2
리그너스 대륙전기 252
“제덴 사막?”
“그래.”
병사들과 함께 비밀스럽게 아트리그에 도착한 호가 가장 먼저 찾은 이는 리셴르나였다.
커티삭에서 아트리그로 본거지를 옮긴 그녀는 이번 원정에서 쓰일 군량들을 모으는 데 열심이었다. 그녀의 집무실 창문을 통해 수많은 수인들이 군량을 나르는 모습을 보며 호가 말했다.
“농사도 척박한 곳에서 열심히 모으는군. 영지민들의 불만이 말이 아니겠어.”
“후우. 그렇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야.”
리셴르나의 대답에 호는 창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몇 십만은 되어 보이는 식량이 한데 모여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바리안스의 대지로 오는 녀석에게 내가 배신했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최소한 이정도의 모습은 보여줘야 되거든.”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렇게 창문에서 시선을 돌린 호는 리셴르나의 꼬리가 살랑거리는 걸 볼 수 있었다.
병사들의 이동은 순조로웠다. 아트리그에 몸을 숨기고 있는 병사만 십만이 넘었으며, 열기가 넘는 마장기들이 도시 이곳저곳에 비밀스럽게 보관이 되어 있었다. 지크 로리에도 오 만 가량의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제덴 사막이라니?”
“요격에 나설 거야.”
“요격? 설마 화이트베를 상대로 전면전을 벌일 거라고?!”
리셴르나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리셴르나의 반응에 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응. 제덴 사막의 지리적인 이점을 사용해서 공격할 거야.”
“……너 말이야. 이제까지 승승장구를 거듭해 온 것은 잘 알겠는데 사막전을 우습게보면 곤란해.”
리셴르나가 경고하듯 말했다. 하지만 호 역시 사막전에 대해 우습게 보지 없었다.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엔딩을 본 유저라면 필수적으로 고통을 받는 전장 중 하나가 바로 사막이었다. 하지만 리셴르나의 눈빛이 워낙에 진지했던 터라 호는 대답 없이 이어지는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아니, 왜 멀쩡한 성을 두고 요격에 나선다는 거야? 사막이 얼마나 척박한 장소인지, 또 모래밖에 없는 장소에서 보급을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알아?”
“음.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
“어느 정도? 하아. 난 지금 너랑 같은 배에 올라탄 상황이라고. 네가 잘못되면 나까지 망하는 거야. 냥!”
리셴르나의 짜증에 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막의 꾀주머니라고 불리는 여인인 만큼 사막전이 얼마나 위험하고 힘든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호가 그런 선택을 한 이유는 화이트베라 불리는 십이멀 때문이었다.
“너, 그 녀석이 얼마나 신중한 녀석인지 잘 알지?”
“……참을성이 많기는 하지.”
리셴르나는 화이트베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호의 말투에 이상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이 꼬리를 잇기 전에 호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 녀석의 손발톱을 잘라내려면 평범한 방법 가지고는 안 돼. 니 말대로 방어전? 나쁘지는 않아.”
“그런데 왜?”
“하지만 그렇게 되는 순간 바리안스의 대지는 정말로 아무도 살지 못하는 땅이 되어버릴 거다. 성을 제외한 나머지 영토를 화이트베가 가만히 둘 거라고 생각해?”
사막이라는 가뜩이나 보급이 힘든 영토에서의 전쟁이었다. 약탈이 일어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리고 십이멀 정도의 영웅이면 자신들의 보급을 위해 조그마한 마을들까지도 완전히 씨를 말려 버릴 게 틀림없었다. 적어도 수인들은 그럴 게 분명했다.
“그리고 방어전에 메리트가 있을 정도로 네 영지의 성벽이 높은 것도 아니고.”
호의 말에 사례가 들린 리셴르나가 거칠게 쿨럭였다. 그러고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호를 쳐다봤다.
“그래! 너 잘났다!”
“뭐, 꼭 그런 것 때문은 아니야. 제대로 한 방을 먹이기 위해서는 상대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공격을 해야 하는 법이야.”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공격?”
“그래.”
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리셴르나가 어떻게? 라며 궁금해 했지만 호는 그 방법에 대해서는 바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조금은 힘들지도 몰라. 근데 알지? 우리 비밀동맹? 꼭 기억하라고.”
그 날 밤, 마장기의 기습을 받은 아트리그가 화염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주 뒤, 사파리에서 출발한 군대가 조인족의 땅에 발을 디딜 무렵, 웅족의 십이멀 화이트베가 이끄는 군대 역시 리셴르나의 지배하에 있는 바리안스의 대지에 도착했다.
“척박한 땅이로군. 크흥.”
흰털이 매력적인 커다란 곰이 사각 얼음을 아득 깨물며 앞을 바라봤다. 이제 반나절만 더 가면 바리안스의 대지의 주도 이스파한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화이트베가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뜨거운 태양과 모래밖에 없었다.
“영토의 대부분이 제덴 사막으로 이루어진 곳입니다. 지리적인 이점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장점이 없는 동네죠.”
“이런 땅을 다스리다니. 리셴르나도 골치 꽤나 썩겠어.”
“글쎄요? 묘인들의 성격을 생각하면 오히려 이런 땅이 만족스러울지도 모릅니다.”
리저드맨의 말에 화이트베는 입을 다물었다. 다분히 정치적인 내용이 섞인 그의 말이 재미없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최소한 늪지대에 박혀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녀석들 보다는 낫지.”
“…….”
“적어도 그녀는 우리들을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는 여인일세. 괜히 앞에서 무례한 행동을 할 생각은 마. 십이멀의 자리를 괜히 꿰차고 있는 여자가 아니다.”
“……알겠습니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야 흘러나온 대답이었지만 화이트베는 만족스러운 듯 음 하고 콧소리를 내었다. 어차피 눈앞의 도마뱀 녀석이 리셴르나를 견제하는 건 자신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똑같은 십이멀 사이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단단히 화가 났을 테지?’
화이트베는 사파리에서의 결정을 그 앙칼진 고양이가 순순히 받아들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잔뜩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이는 십이멀의 자존심을 깎아내리는 행위였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이스파한에는 리셴르나가 아닌 다른 묘인 영웅이 그들을 반겨주었다.
“뭐? 리셴르나가 그 호라는 녀석의 군대를 뒤쫓고 있다고? 제덴 사막에서?”
“그렇습니다, 냥.”
묘인 영웅의 말에 따르면 호가 별동대를 이끌고 아트리그를 박살냈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리셴르나가 현재 호를 추격중이라고 했다. 보고를 받은 화이트베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녀석. 미쳐버린 건가?”
“그렇지 않습니다. 소환자 윤호의 저력은 리셴르나 님도 인정할 정도입니다.”
“리셴르나가 인정할 정도?”
“지크 로리와 아트리그를 공격한 그는 최소 삼십만 이상의 병력을 이끌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마장기 또한 일곱 편대 이상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뭐? 고작 별동대가?”
상상 이상의 전력에 화이트베는 잠깐 입술을 짓씹었다. 소환자 녀석 주제에 원인들을 몰락시켰다고 하더니만 제법 능력이 있는 녀석이었다.
“하기야 그러니 시바를 찾아내기도 했겠지.”
하지만 담담히 고개를 끄덕인 화이트베는 곧바로 병사들에게 휴식 명령을 내렸다. 소환자 윤호가 제덴 사막에서 발견되었다고는 하지만, 오랜 행군으로 지친 병사들을 이끌고 급하게 사막으로 나설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사흘간이나 이스파한 머무르는 그는 제대로 된 보급선을 확보하고 난 이후에야 병사들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호의 군대가 제덴 사막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 만큼 전장은 붉은 핏빛의 대지가 아닌 이 바리안스의 대지부터 시작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먼저 리셴르나와 합류해야겠군.”
정보원의 내용에 따르면 그녀는 현재 제덴 사막에서 호의 군대를 추적하고 있다고 했다. 사막의 꾀주머니가 불리는 여인인 만큼 적의 동태에 대해서는 이미 파악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 * *
검은색 천으로 온몸을 둘둘 감은 묘인 병사들이 사막의 모래 위에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리셴르나의 지휘를 받는 흑묘들이었다.
“소리는?”
“여기는 없는 것 같다냥.”
모래 위에 귀를 대고 있던 묘인 하나가 동료의 말에 손을 좌우로 저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개미굴의 소굴이야. 이제 물러나야 된다냥.”
“이 자식들은 대체 어디로 도망을 친 거지?”
“사막 어디에 있지 않겠냥?”
“그렇다 해도 그 많은 녀석들이 코빼기도 안 보이는 것은 이상해. 분명 물이 있는 장소는 우리들이 전부 파악하고 있을 텐데?”
“제덴 사막을 건너 드워프들이 있는 곳으로 넘어갔을 수도 있다냥.”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흑묘들은 사막이 꿀렁꿀렁 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집중을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미미한 움직임이었지만 흑묘들의 감각은 그보다도 훨씬 더 예민했다.
“제덴의 개미들이 나타나려는 모양이야.”
“오늘도 추적은 실패다. 일단 본진으로 돌아가자냥.”
그렇게 흑묘들이 모습의 사라지고 몇 분 후, 거대한 개미들이 떼로 모여 우르르 이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단순히 먹이를 구하러 나가는 것이 아닌 무언가에 쫓겨 도망을 치는 것에 가까웠다.
“후우. 머리가 다 지끈거리네.”
호를 찾지 못했다는 흑묘의 보고를 받은 리셴르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막사 주위를 돌아다니는 이들이 그녀의 눈에 비쳤다. 대다수가 리저드 맨과 웅족들이었다.
‘빌어먹을. 내 꼴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아트리그를 공격한 호를 추격하던 그녀는 중간에 바리안스의 대지에 도착한 화이트베와 합류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화이트베와의 합류는 리셴르나의 입장에서는 결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병사들의 지휘권을 화이트베님에게 주셨으면 합니다.”
“리셴르나 님도 알다시피 이는 대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입니다.”
화이트베의 부관이라는 리저드맨이 대 회의의 낙인이 찍혀 있는 문서를 들이밀며 그녀의 지휘권을 모조리 빼앗아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리셰르나는 그런 명령을 거부 할 수 없었다. 만약 그랬다가는 사십만이 넘는 병사가 자신을 공격할 게 분명했다.
그렇게 리셴르나의 지휘권을 모조리 빼앗은 화이트베는 이틀 뒤, 그녀에게 정보부에 관한 일을 맡겼다.
“내가 공을 세우는 꼴은 보지 않겠다, 이거지.”
손톱을 꺼낸 리셴르나는 나무로 만들어진 책상에 대고 짜증을 내며 벅벅 갈았다. 중요한 일이라며 선심을 쓰듯 맡기는 모습이었지만, 화이트베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있는지 모를 그녀가 아니었다. 문제는 자신의 거지같은 상황을 만든 녀석이 바로 윤호라는 점이었다.
‘대체 이 새끼는 어디로 숨은 거야?’
‘조금은 힘들 거다.’라는 암호 같은 말만 툭 던지더니 갑작스럽게 아트리그의 캣닢 공방을 박살 내고는 병사들과 함께 사라졌다. 캣닢 공방이 모조리 박살이 났다는 소식에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그를 쫓아가긴 했지만, 생각해보니 이상한 점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 녀석. 난 내가 자신을 쫓아오기를 바란 게 틀림없어.”
자신이 캣닢을 사랑한다는 것은 몇 번이나 그에게 밝혔던 내용이었다. 게다가 전시 상황에서 다른 중요한 군사시설도 아닌 캣닢 공방만을 박살냈다는 게 이상했다. 더욱이 호는 식량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전쟁이 어떻게 끝나던 간에 그 녀석만큼은 가만 두지 않을 거야.”
문제는 이러한 사실들이 화이트베로 하여금 의구심을 품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리셴르나는 알게 모르게 웅족과 도마뱀들의 감시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