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1
리그너스 대륙전기 251
띵동.
-라 엑스트가 조종하고 있던 B등급 마장기 엑스칼리버가 파괴되었습니다.
-라 엑스트가 경상을 입었습니다.
-어빈 아마추가 조종하고 있던 B등급 마장기 엑스칼리버가 파괴되었습니다.
-운이 좋게도 어빈 아마추는 무사히 퇴각했습니다.
“뭐야 이건?”
눈앞으로 갑자기 떠오르는 메시지에 호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서 메시지의 내용을 확인하고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름들이 낯이 익은 게 며칠 전 브로리가 실전 경험을 시키겠다고 데리고 간 햇병아리 마장기사들이었다.
‘실전 경험을 쌓으러 간 것 같은데, 마장기들을 다 박살 내면 어쩌란 말이야…….’
호는 한숨과 함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어쩐지 의욕이 너무 넘쳐보이더니만.
B등급 마장기 한 대의 가격은 수 억 리스 이상. 게다가 전쟁이 다가오고 있는 지금 마장기 한 기의 중요성은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나마 마장기 오너들이 멀쩡하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만약 중상 이상의 부상을 입었다면 전쟁이 시작해도 꼼짝없이 병원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 아무래도 브로리 역시 그런 걸 염두하고 무언가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괜찮은가?”
그런 호의 귀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괜찮습니다. 그나이 칼츠만님.”
“갑자기 표정이 안 좋아져서 말이야. 혹시 우리의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싶었네.”
“아, 그런 건 아닙니다. 갑자기 안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그랬습니다.”
그렇게 얼버무린 호는 자신에게 말을 건 중년 남성을 바라보았다.
단정한 옷차림과 젤과 비슷한 물품으로 반듯하게 머리 모양을 낸 오십 대 후반의 남성은 호에게 하여금 중후한 인상을 안겨다주고 있었다.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유저들에게 ‘이레네 아르티아의 양아빠’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는 S등급의 영웅 그나이 칼츠만이었다. 또한 그는 인간들의 팔 왕국을 대표하는 국가 골든 크로우의 재상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디르시나에 도착한 게 바로 조금 전의 일이었다.
‘군사 동맹이라…….’
수인 왕국의 도발이 코앞까지 다가온 지금의 상황에서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갑작스러운 골든 크로우의 제의가 의아하기는 했지만 천족들과의 전쟁에서 자신이 보여줬던 무력시위가 골든 크로우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하기야 천족의 10 천사 중 둘을 패퇴시키고, 블루 스케일을 무사히 지켜냈으니 그럴 법도 했다. 게다가 아이리스 성국의 문제도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 그뿐인가? 최근에는 인간 세력의 주력이자 B등급 마장기인 엑스칼리버를 양산할 수 있는 기술력과 생산 체제도 갖추는 데 성공하기까지 했다. 이런 소식을 골든 크로우가 모를 리 없었다.
모르긴 해도 림드 산맥의 진실을 알게 된 귀족 중에서는 분명 거품을 문 녀석이 한, 둘은 있을 터였다.
‘한 편으로 만들겠다는 건가?’
골든 크로우가 이렇게 호의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보나마나 뻔했다. 자신의 애매한 포지션 때문이었다.
마족의 소환자였지만 현재는 별개의 세력을 이끌고 있는 무소속이나 다름없는 세력이었다. 게다가 붉은 핏빛의 대지와 림드 산맥이라는 각 종족의 경계선에 위치한 지리적으로 중요한 장소에 터를 잡고 있었고, 군사력 또한 막강했다. 당연히 아이리스 성국 문제로 전력이 눈에 띄게 줄어든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탐이 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겉보기에 호는 블루 스케일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레네 아르티아님께서는 자네가 아이리스 성국을 대신해 인간들의 새로운 힘이 되어 주기를 바라네. 뭐, 소환자들 역시 인간이나 다름없는 존재 아닌가?”
“그렇긴 하죠.”
따지고 보면 이 세계의 인간들과도 다른 존재였다. 적어도 호가 있던 세계에서는 검으로 강철을 베어내고 마법을 뻥뻥 쏴대는 인간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그런 이야기를 꺼내 분위기를 불편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제가 그런 만한 깜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당장 눈앞에 닥친 일도 해결하느라 벅차서 말입니다.”
그렇다고 순순히 그나이 칼츠만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인간과 동맹을 맺게 된다는 것은 인간들을 제외한 나머지 종족들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군사적인 면에서 인간 세력은 그다지 매력적인 종족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호의 생각을 그나이 칼츠만이 알 리 없었다.
“수인 왕국의 움직임 때문이로군.”
“그렇습니다.”
수인 왕국들이 백 만이상의 병력을 동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주변 국가들에게 파다하게 퍼진 상황이었다. 워낙에 큰 움직임이기도 했고, 그들 역시 자신의 세를 과시하기 위해서인지 병사들의 움직임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수인족의 공격 대상이 바로 소환자 호라는 것이 밝혀지자 다른 종족들은 현재 흥미진진하게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판국이었다.
“우리가 도와주도록 하지. 최소한 오십 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도록 하겠네.”
“…….”
“블루 스케일에도 이미 언질을 넣었네. 지상군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해상으로 넘어오려는 수인들은 그들이 막아줄 수 있을 걸세.”
그나이 칼츠만의 말에 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처음부터 꺼내드는 패가 자신의 상상을 훌쩍 뛰어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매력적인 제안이라고 느껴지기 보다는 저렇게 무리를 해서까지 자신을 끌어들이려고 하는 이유가 더욱 궁금했다. 그런 호의 떨떠름함을 눈치 챈 모양인지 그나이 칼츠만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인간들의 중심이 무너지고 있네.”
* * *
“골든 크로우가 흔들리고 있다라…….”
그나이 칼츠만이 떠난 후 호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 보았던 기사의 여왕 이레네 아르티아의 카리스마를 생각하면 쉬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그나이 칼츠만의 말에 따르면 그런 일이 현재 골든 크로우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골든 크로우의 상황이 제법 심각한가 봐요?”
그런 호의 뒤로 벨이 다가와 물었다. 자신과 그나이 칼츠만의 대화를 들은 모양이었다.
“음. 전쟁의 피해가 계속해서 누적되고 있던 모양이야.”
팔 왕국의 중심인 골든 크로우는 인간들을 지키기 위해 엘프, 정령, 천족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나갔다. 기사의 왕국이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영웅들과 막강한 지상군 전력을 보유하고 있는데다가 후방의 국가들에게서 리스를 비롯한 군량을 지원받을 수 있던 탓에 그들의 전쟁에는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팔 왕국의 중심이라는 이유로 너무나도 많은 적들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던 게 문제였다.
‘아무리 기사의 여왕이라 해도 그녀 혼자서 모든 것을 해낼 수는 없지.’
골든 크로우의 전력은 강력했다. 하지만 다른 종족들에게도 이레네 아르티아 못지않은 영웅들이 존재했다. 그렇게 계속되는 전쟁으로 골든 크로우 출신의 많은 영웅들이 자신의 재능을 만개하기도 전에 목숨을 잃어야 했고, 막강했던 정예군들 또한 하나둘씩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골든 크로우의 위기에 불을 지핀 것이 바로 이번 라헬교의 준동 이었다.
“라헬교의 준동과 천족들의 대대적인 공세로 인해 골든 크로우에 리스와 식량을 지원하던 국가들이 큰 피해를 입었어. 모에드 왕국과 블루 스케일은 아예 나라가 무너질 뻔했지.”
“아이리스 성국은 적이 되었고요.”
“응. 거기에 바라테이온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은 가봐.”
그나이 칼츠만의 말에 따르면 골든 크로우 다음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는 군사강국인 바라테이온 왕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했다. 아무래도 이 위기를 틈타 자신들의 영향력을 넓히고 팔 왕국의 중심을 차지하려는 모양이라고 했다.
확실히 바라테이온을 다스리는 패트릭 바라테이온은 제법 야심이 있는 영웅으로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설정에도 호시탐탐 골든 크로우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고 나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레네 아르티아를 노리는 거지만…….’
이레네 아르티아의 양 아빠라 불릴 정도로 그녀를 끔찍이도 아끼는 그나이 칼츠만의 앞에서는 차마 그런 내용을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일단은 보류.”
“보류요?”
아스트리드 벨의 반문에 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인 왕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나면 골든 크로우에게 리스와 식량을 지원해주기로 했어.”
지원 국가들이 모조리 무너지면서 군사력의 유지가 힘들어진 골든 크로우에게 리스와 식량의 지원은 해주기로 했다. 하지만 대규모 군사원조는 받지 않을 생각이었다. 굳이 다른 종족들과 적대하면서까지 팔 왕국의 일원이 되기에는 자신이 얻을 수 있는 메리트가 전혀 없었다.
“아무리 림드 산맥이 발전했다고 해도 너무 막 퍼주는 거 아니에요? 게다가 전쟁이 끝난 후면 돈이 들어갈 게 한, 두 군데도 아닐 텐데.”
벨이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었어. 골든 크로우가 무너지면서 종족의 균형이 깨지게 되면 우리도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거든. 게다가 골든 크로우에 리스와 식량을 지원하면서 이레네 아르티아의 마음에 빚을 쌓아둘 생각이야.”
“다른 무언가는 안 받기로 했어요?”
“어떤 거?"”
잠시 고민을 하던 아스트리드 벨이 입을 열었다.
“예를 들면 상권이라던가? 블루 스케일처럼요.”
“아니, 아직은.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전쟁이 끝난 후 조약을 체결할 때 정할 생각이었는데?”
“……그렇다면 그 건 저한테 맡겨주실 수 있어요?”
호의 대답에 벨은 잠시 주저하는 태도를 보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그녀의 행동에서 드러나는 자신감에 호는 미미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트리드 벨의 행정적인 능력은 호도 인정하는 바. 괜찮은 결과물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한시진이 일군의 총사령관을 맡을 정도로 성장한 이상 그녀에게도 어느 정도의 권력은 쥐어줘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그나이 칼츠만이 디르시나를 방문하고 열흘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무렵, 전령 하나가 호의 집무실로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사파리에서 수인족의 대군이 출진했다고 합니다! 그 수는 백 오십만 이상입니다!”
전령의 보고에 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의 시작이었다.
“좋아! 병력을 편성한다!”
나크 평원은 한시진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이미 그 쪽의 지휘권은 그녀에게 임명한 상황이기도 했다.
천족과의 전쟁에서 자신들을 도와줬던 사실을 잊지 않은 모양인지 해상 쪽으로 넘어오는 수인들은 블루 스케일이 상대하기로 했다. 블루 스케일의 여왕 세이라 클리퍼드는 이번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되면 그 대가를 단단히 받아낼 모양새였지만 한 손이 아쉬운 상황인 만큼 호는 가볍게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물을 싫어하는 몇몇 수인들의 특성상 수인 왕국의 해상군 전력은 형편이 없는 수준이었기에 블루 스케일이 공을 세울 만한 일은 별로 없을 터였다.
“목표는 아트리그!”
삼십만의 병력을 끌어 모은 호는 바리안스의 대지로 출진을 시작했다. 하지만 수인들과는 달리 호의 출진은 비밀스럽게 이뤄졌다. 부대를 나눠서 이동한 것은 물론이고, 이미 아트리그에 잠입해 있는 부대도 여럿 있었다. 마장기 역시 야음을 틈타서만 운반되었다.
“별동대를 이끄는 십이멀이 화이트베라고 했던가? 아마 깜짝 놀랄 거다.”
호가 그렇게까지 은밀하게 병력을 이동시키는 이유는 간단했다. 리셴르나와의 비밀 동맹을 수인들에게 알리지 않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