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9
리그너스 대륙전기 249
“오랜만에 뵙는군요. 리셴르나 님.”
“전령이 왔다고 하던데 이거 놀라운걸? 그대가 직접 이 먼 곳까지 찾아올 줄이야.”
호인 남성의 포권에 리셴르나가 웃으며 말했다. 그녀를 찾아온 남성은 십이멀은 아니지만 호인 중에서는 이름을 날리고 있는 용맹한 전사로 리셴르나가 바리안스의 대지로 떠나오기 전 사파리에서 잠깐이나마 인연을 맺은 적이 있었다.
“사파리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봐?”
리셴르나가 웃음기를 머금으며 살살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 중앙에서 소외되고 있는 자신의 감정을 대놓고 드러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호인 남성은 그런 리셴르나의 말투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전달했다.
“예, 그렇습니다. 이번에 열린 대회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러 굳이 그대가 이 먼 바리안스의 대지까지 올 필요는 없을 텐데? 왜 예전에 내가 지원을 넣었던 마장기의 허가가 이제야 떨어졌나 보지?”
“비슷합니다.”
“비슷하다?”
호인족의 대답에 리셴르나는 미간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옆에 놓인 캣닢이 눈에 들어왔지만 지금은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 달 내에 화이트베님이 이끄시는 연합군이 바리안스 대지에 도착할 겁니다.”
“……연합군이라니?”
뜬금없이 이어지는 호인의 말에 리셴르나의 얼굴에 당황함이 떠올랐다. 대체 어떤 회의가 이뤄졌기에 종족 연합군이 움직이게 된 것인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화이트베라면 자신과 같은 십이멀인 웅족의 맹장이었다.
“마족과 전면전이라도 치를 생각인가?”
“아닙니다. 대 회의에서 논의가 된 것은 수인족의 자존심을 건드린 소환자 호의 말살입니다.”
“소환자 호의 말살?”
“그렇습니다. 아쉬토님께서는 소환자 호의 세력을 모조리 흡수하고, 그가 차지한 전설의 마장기 시바를 회수할 생각입니다.”
호인족의 대답에 당황스러움이 담겨있던 리셴르나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수인족의 십이멀로 산전수전을 겪은 만큼 대 회의에서 어떤 이야기가 논의됐는지 또한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알아챈 것이다.
“흐흥. 그래서 연합군이 움직인다? 내 생각으로는 쉽지 않을 텐데? 소환자라고 다 같이 허약한 녀석들은 아니거든.”
“논의된 병력만 백 사십 만 가량. 마장기의 수만 해도 C등급만 백 대 이상이 동원될 예정입니다.”
“이거……. 단단히 마음을 먹은 모양인데?”
리셴르나가 자세를 곧추세우며 말했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수인족의 연합군과 호의 군대가 맞붙는 광경이 빠르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곤란한데?’
리셴르나의 눈썹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호와 비밀동맹을 맺은 그녀였다. 그런데 이런 사단이 벌어질 줄이야. 하지만 의아한 생각도 들었다. 분명 중대한 사실이기는 했어도 눈앞의 호인이 직접 이 먼 곳까지 자신을 찾아올 필요까지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연합군은 두 갈래로 나눠 소환자를 공격할 겁니다. 티르거님이 이끄시는 본대와 오십만 가량의 병력으로 이루어진 화이트베님의 별동대죠.”
“흐흥. 설마 나보고 화이트베의 명령을 따르라는 것은 아닐 테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번 원정에서 묘인족은 십만의 병사와 마장기 열 기를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우리도 수인 왕국을 이루는 종족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그래서?”
“여기 묘인족의 장로이신 랙돌님의 편지가 있습니다.”
호인 영웅이 품속의 서신을 리셴르나에게 건넸고, 그녀가 서신의 내용을 확인한 순간 집무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하게 변했다. 그리고 편지를 구긴 리셴르나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보고 십만의 병사와 마장기 열 기를 내놓으라고?!”
“죄송하지만 리셴르나 님. 저는 단지 전령일 뿐 묘인족의 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질 경우 별동대의 군량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신경을 써주셔야 할 겁니다.”
은근한 목소리로 호인이 말했고, 으드득하는 이빨이 갈리는 소리가 집무실에 울려 퍼졌다.
“이는 대회의에서 결정이 된 일입니다. 십이멀이신 당신이라면 그 사실이 무엇을 의미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하실 수 있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감히……!”
이번 원정은 리셴르나 님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거라 생각합니다. 안테 로리를 점령하기는 했지만 결국 소환자를 놓치셨지 않으셨습니까?“
그제야 리셴르나는 어째서 저 호인 영웅이 이 먼 곳까지 자신을 찾아왔는지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떨어진 종족의 명예는 회복하셔야죠.”
눈앞의 녀석은 자신을 협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리셴르나가 분노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라.”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화이트베님의 별동대는 한 달 내에 바리안스의 대지에 도착할 겁니다. 그리고 리셴르나 님은 병력의 준비와 함께 별동대의 군량 역시 준비하셔야 합니다.”
호인 영웅은 포권을 하며 리셴르나를 쳐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렇게 집무실에서 호인이 사라지고 한참의 시간이 흐르자 리셴르나의 뒤쪽에서 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십이멀에 대한 대우가 너무한 수준인데? 대회의에 밉상이라도 보였나봐?”
“빌어먹을. 이래서 정치를 하는 새끼들이란. 우리 종족의 힘을 그렇게 깎아먹겠다 이거지. 랙돌 그 개만도 못한 녀석은 사파리에서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거야?!”
“글쎄다? 개랑 놀고 있나 보지.”
리셴르나의 말에 호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대회의에 참가할 수 있는 열두 종족을 포함해 수많은 군소 부족으로 이루어진 연합체가 바로 수인 왕국이었다. 힘의 논리가 펼쳐진다고는 하지만 각 종족들끼리 주도권을 잡기 위한 싸움 역시 장난이 아니었다.
덕분에 가상현실게임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하다보면 가장 쉽게 그리고 빠르게 무너지는 대표적인 세력이 수인 왕국이기도 했다. 그들의 특징을 이용하면 어렵지 않게 서로를 분열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방금 전 호인 영웅의 통보 역시 그들만의 정치적인 이유가 강하게 적용되었을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십이멀인 그녀에게 이런 불합리한 결정이 내려졌을 리 없었다.
“빌어먹을. 쯧!”
거칠게 혀를 찬 리셴르나가 캣닢을 쥐어 입으로 가져갔다.
“너는 어떻게 할 셈이지? 발등이 보아하니 불이 떨어진 것 같은데?”
“음.”
호는 눈을 감았다. 백오십 만의 병사와 백 기 이상의 마장기가 자신을 공격해 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듣자하니 한 달 이내에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될 것 같았다. 하지만 호가 눈을 감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티르거와 화이트베만 움직이는 건가? 아쉬토가 직접 친정하는 게 아니라?”
“그 녀석은 은근히 엉덩이가 무거운 녀석이라……. 하지만 팔쿤은 나설지도 모르지.”
“팔쿤? 아아. 조인족의 영토가 옆에 있었지.”
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리셴르나까지 포함되면 무려 네 명의 십이멀이 포함된 대군이었다. 연합군이라는 거창한 표현이 어울릴 만 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긴장은 되지만 걱정은 들지 않았다.
“……당분간 기술 공방이 미친 듯이 돌아가겠군.”
“어떻게 하려고?”
“그냥 물러날 수는 없잖아? 한 판 붙어줘야지.”
호의 말에 리셴르나는 입을 다물었다. 무려 백오십 만의 군대였다. 하지만 허세라고 생각하기에는 태도에 자신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제까지 싸운 모든 전쟁에서 승리를 거뒀다지?’
전부 호가 불리했던 전투였고, 그중에는 자신과의 전투도 있었다. 도시 하나를 폭발시키며 자신의 선봉대를 전멸시켰던 그 무시무시했던 사건은 아직도 리셴르나의 뇌리에 깊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나야 한 판 붙으면 되고 너는?”
“후우…….”
리셴르나는 호를 향해 미약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얼굴 가득 짜증이 담겨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슬퍼 보이는 모습이었다. 절대로 하고 싶지 않은 프로젝트를 강제적으로 해야 하는 직장인의 모습이 저러할까?
‘그것도 자신의 몸을 축내서까지 해야 하는 프로젝트지.’
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십만의 병사에 마장기 열 시. 그리고 몇십 만이 넘는 군대의 군량까지 그녀 혼자서 책임을 져야 했다.
모르긴 해도 전투가 길어지거나 패배라도 하는 순간 리셴르나의 영토는 분명 파산할 게 틀림없었다. 호가 아는 바리안스의 대지는 그 많은 병사들의 군량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풍족한 땅이 아니었다. 리셴르나의 눈동자가 가만히 호에게로 향했다. 그녀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터였다.
“리셴르나.”
“어, 어어?”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호의 목소리에 리셴르나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러고는 깊은 한숨과 함께 머리를 긁적였다.
“왜? 쓸데없는 소리 하려면 이야기 하지 마. 지금도 머리가 복잡하니까.”
“아니. 너무 기운이 없어 보여서 말이야. 캣잎이라도 먹는 게 어때?”
날카로운 그녀의 태도에 호는 뜨끔한 마음을 감추고는 미소와 함께 손가락으로 캣잎을 가리켰다. 다행히 리셴르나는 아무 의심 없이 의자에 앉아 천천히 캣닢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묘인족 특유의 늘어지는 목소리와 함께 리셴르나가 액체처럼 의자 위에서 흘러내렸다.
“아트리그의 발전은 언제부터 시작할까?”
“무슨 개 소리야? 흐냐앙. 너 말이야.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는 모양인데, 한 달 뒤면 백만이 넘는 병사들이 네 영토를 짓밟을 거라고.”
“그건 그거고 우리의 비밀 동맹은 비밀 동맹이지.”
“하?”
리셴르나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눈앞의 소환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고 있었다.
“내가 한 달만 버텨도 바리안스의 대지는 파산한다. 그건 알고 있지?”
“……씨발.”
“그리고 난 한 달 아니 그 이상이라도 버텨낼 수 있어. 아시다시피 B등급 마장기의 양산 체제도 들어갔고, 지금부터 죽어라고 기술 공방을 돌리면 다섯 기 이상은 더 만들어 낼 수 있거든? C등급 마장기? 림드 산맥에 배치된 것만 해도 백 대 가까이는 될 거다.”
호의 말에 리셴르나는 입을 다문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속으로 미소를 지은 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정 밀릴 것 같으면 성 두 개 정도는 버리면 되는 일이야. 알잖아? 안테 로리가 어떻게 됐는지.”
“……그랬지. 너에게는 특이한 힘이 있었어.”
“아니면 토갈론 요새를 내주는 대가로 엘프 왕국에게 병력을 요청해도 되고. 토갈론 요새의 가치와 엘프들이 느끼는 수인들의 위험성을 살살 건드려주면 최소한 엘프 장로 하나쯤은 끌어들일 수 있을걸?”
“…….”
“어라? 인간들도 있었네? 천족과의 전쟁에서 블루 스케일을 도와준 것도 있으니 내가 원군을 요구하면 그들 역시 가만있지는 않을 걸? 아니면 내가 껴서 팔 왕국이 아닌 구 왕국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아니, 아이리스 성국이 퇴출되면 다시 팔 왕국인건가?”
호는 자신의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리셴르나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방금 전 호가 꺼냈던 말들은 전부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내용들이었다.
“게다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묘인들은 아무래도 너를 이번 전쟁의 희생양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리셴르나는 멍청한 여자가 아니었다. 전쟁이 시작되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는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흘러나오는 리셴르나의 목소리에 호는 어느새 말라붙은 입술을 혀로 적셨다. 캣닢에 취해 흐트러진 몸짓 사이에서 그녀의 눈동자는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별거 없어.”
대답과 함께 호는 오른손으로 리셴르나의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반대쪽 손으로는 접시에 놓인 캣닢을 쥐었다.
“우리 둘이 비밀스러운 동맹 사이라는 것만 머릿속에 기억하면 돼.”
그러고는 리셴르나의 입에 천천히 캣닢을 가져다 대었다.
“……제길.”
자신의 입가로 다가오는 캣닢을 보며 잠깐 고민하던 모습을 보이던 리셴르나가 욕설과 함께 그대로 캣닢을 입에 물었다. 가만히 있다가는 영지가 망할 판인 그녀로써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리셴르나와 비밀 동맹을 맺은 호는 그 이후로도 사흘 가량이나 더 커티삭에 머물렀다. 행여나 리셴르나의 마음이 변할 것을 우려한 행동이었다. 다행히도 중앙에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리셴르나는 어느 정도 마음을 굳힌 것으로 보였다.
“조만간 병력을 보내도록 할게. 그때 또 보도록 하지.”
“빌어먹을, 젠장할. 이번 전쟁에서 이기면 알지? 만약에 배신이라도 하면 짐승신에게 맹세코 무슨 일이 있어도 복수할거다.”
“걱정하지 말라니까.”
“아트리그로 기술자들 바로 보내는 것도 잊지 말고.”
그렇다 해도 불안한건 어쩔 수 없었는지 리셴르나는 조금이라도 더 호가 커티삭에 있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수인 왕국의 움직임이 본격적인 만큼 호 또한 림드 산맥으로 돌아가서 전쟁을 준비를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