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그너스 대륙전기-248화 (248/522)

# 248

리그너스 대륙전기 248

“…….”

호의 말에 니나 다니엘레는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오너 시스템의 영향으로 호를 따르고는 있지만 이제까지 절대적으로 믿고 있었던 신앙을 깔아뭉개는 호의 말에 무언가 반박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라헬교는 그냥 광신도에 불과해. 그들은 여신 라헬을 제외한 다른 것들을 배척하지. 그런 라헬이 이 대륙에 평화를 안겨다준다고? 웃기는 소리가 따로 없네?”

“그렇지만 라헬을 믿는 우리들은 다른 종족들이 라헬교도가 되면 차별 없이 하나로 대우한다. 그뿐 아니라 소환자들도 잘 대우해주고…….”

“그럴 바엔 차라리 이 세계로 데리고 오지 말았어야지. 우리들의 모든 것을 박살 내고 난 이후에 대우를 잘 해준다고?”

개소리나 다름없는 이야기였다. 호는 혈관이 튀어 오르려고 하는 기분에 이마를 꾹꾹 눌렀다.

“머리가 있으면 그런 헛소리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리고 너도 슬슬 눈치채고 있을 텐데? 니가 생각하기에 프리테븐이 있는 가드랜드와 이 림드 산맥. 어느 쪽이 더 행복해 보이지?”

호의 말에 니나 다니엘레는 입을 다물었다.

여신 라헬의 아래에서 언제나 평화로웠던 가드랜드. 그리고 다양한 종족들이 공존하면서 생활을 하고 있는 림드 산맥. 전자는 강제적이고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평화라면 후자는 정말로 이 대륙이 원하는 모습과도 같았다.

“라헬교를 믿어야 차별을 하지 않는다? 조건이 있어야지만 유지되는 평화라니. 창조신 리그로우가 세리너스가 통곡을 하고 있겠군.”

계속되는 호의 말에 니나 다니엘레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자신의 신앙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프리테븐에서 보냈던 기억들이 하나하나 이상해져 가고 있었다.

“그래서 커티삭으로 가는 이유는 뭐지?”

결국 자신이 믿고 있던 신앙이 무너지는 것을 견딜 수 없는 그녀가 취한 행동은 바로 화제를 돌리는 것이었다.

“가는 이유라니? 당연히 리셴르나를 만나러 가는 거지.”

“나는 그대가 왜 갑자기 그것도 직접 리셴르나를 만나러 가는지 궁금한 것이다. 그대는 이 영토의 주인이 아닌가?”

“그건 그렇긴 한데. 내가 아니면 진행을 할 수가 없는 일이거든.”

“진행을 할 수가 없는 일?”

아직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니나의 모습에 호는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슬슬 비밀친구 하나쯤 만들려고.”

영지의 발전은 격정 할 게 없었다. 특성화 개발이 끝난 도시들은 자신들의 잠재력을 폭발시키며 수많은 리스와 특산품을 호에게 안겨다 주었고, 이런 자원들은 더욱 더 영지를 발전시켜 주고 있었다.

그뿐인가? 이상향 알르드를 지키려는 병사들의 충성심은 높았고, 리그너스 대륙의 강력한 전투 병기 중 하나인 마장기 엑스칼리버의 양산 체제도 갖췄다. 이 대륙의 한 세력으로 자립할 수 있을 만한 최소한의 조건은 갖추게 된 셈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걸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평화를 얻으려면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라는 모순적인 말처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힘의 균형이 이루어져야만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림드 산맥을 둘러싼 힘의 균형은 유지가 되면서도 또한 그렇지 않은 상황이기도 했다.

블루 스케일, 엘프 왕국의 군단장 엘 키세스, 조인족 그리고 리셴르나까지. 이렇게 자신을 둘러싼 왕국과 영주들은 감당할 수 있었다. 지금의 전력으로도 충분히 힘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속해 있는 인간의 팔 왕국, 엘프 왕국, 수인 왕국을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림드 산맥이 발전했고, 군대를 정예병으로 무장했다 하더라도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그들이 지니고 있는 힘은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하물며 한 손이 열 손을 당해낼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런 면에서 호는 리셴르나와는 아주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 *

“호오……. 블루 스케일이나 엘 키세스도 있을 텐데?”

리셴르나가 눈앞의 남자를 향해 말했다. 림드 산맥의 패자. 그가 갑자기 커티삭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로 오늘 아침에 일어난 일이었다. 덕분에 커티삭은 아침부터 뒤집어졌다. 윤호가 마족의 마장기 키마라이에 탑승했던 탓이었다. 덕분에 C등급 마장기 캣츠의 엔진이 돌아가기 일보직전까지 갔었다.

“왜 나죠? 냐앙?”

호를 바라보고 있던 리셴르나의 시선이 흘깃 호의 옆으로 향했다. 천족의 10 천사이자 수인들에게는 심판관이라는 별명으로 더 알려져 있는 주디케이터 니나 다니엘레가 고상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마족의 소환자였던 인간과 천족을 대표하는 10 천사의 조합. 이상하게 보이는 광경이지만 리셴르나는 그런 둘의 모습이 어디선가에서 이미 봤던 것처럼 익숙하게 느껴졌다.

“블루 스케일은 일단 약합니다. 굳이 경계를 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말이죠.”

천족과의 전쟁에서 큰 피해를 입은 블루 스케일은 전후피해를 극복하지 못하고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전부 무능한 귀족들 때문이었다. 세이라 클리퍼드가 과거의 성세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분발은 하고 있었지만, 그녀 혼자서는 한계가 있었다.

“엘 키세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로얄 센티널인 그녀는 분명 위협적인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세력이 이곳에 있는 건 아니죠.”

또한 엘프 왕국의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호가 신경 써야 할 외부의 적은 조인족과 리셴르나. 정확히 말하면 리셴르나 밖에 없었다. 조인족은 적이었지만, 리셴르나는 아직 확연이 아군인지 적인지 구별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게 제가 리셴르나 당신에게 비밀 동맹을 요청하는 이유입니다.”

말을 마친 호는 리셴르나를 바라봤다.

“그래서 나보고 수인 왕국을 배신하라고?”

“그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우리 둘이 그들이 모르는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자는 것뿐이죠.”

수인 왕국을 이루는 종족 중 하나인 묘인족은 왕국 내부의 일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기로 유명한 종족이었다. 고양이의 특성이 그러한지 모르겠지만 다른 종족과 힘을 합치기보다는 홀로 있으려는 성격이 더욱 강했다.

“……내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당연히 그만큼 왕국에 충성심도 높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설정집에 나오는 내용들이었다.

“군사적인 지원을 해드리겠습니다. 윙드 훗사르 부대를 포함해 수인 마장기들을 지원해드리죠.”

라홀로프 상단을 통한다면 적당한 수준의 마장기 몇 기 정도는 구입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디르시나에서 출발하고 난 며칠 후가 라홀로프 상단의 방문 일이었다. 그때 이야기를 꺼내고 확답을 받았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잠깐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거 민감한 얘기가 될 거 같은데…….”

“나는 내 방에 먼저 가있겠다.”

리셴르나의 말에 니나 다니엘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니나 다니엘레의 모습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리셴르나가 호에게 가까이 의자를 끌어당기며 물었다.

“우리 종족의 마장기를?”

“이미 카니앗산 열여섯 기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부족하다면 인연을 맺고 있는 수인족의 상단인 라홀로프 상단을 통해 구입해 드리지요.”

“흥, 흥흥.”

생각보다 많은 숫자에 리셴르나의 목울대가 꼴깍꼴깍 움직였다. 길고 날카로운 그녀의 손톱이 탁자 위에 놓인 우유 잔을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다.

“돈이 정말 많은 모양이야? 그 정도의 리스를 순식간에 내놓을 수도 있고?”

어느새 리셴르나의 말은 짧아져 있었다. 하지만 호는 그런 리셴르나의 변화가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만큼 자신의 제안에 관심을 보이는 게 행동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역시 내가 예상한 게 맞았어.’

영토의 대부분이 제덴 사막으로 이루어진 바리안스의 대지를 거점으로 삼고 있는 그녀는 십이멀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홀로 상급 마족인 볼 붸르니체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인 왕국의 수도인 사파리는 물론이고 묘인 족들조차도 그녀에게 별다른 지원을 하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지크 로리, 커티삭이라는 두 영지를 빼앗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당연히 불만이 없을 리가 없었다.

“림드 산맥의 급격한 발전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그런 리셴르나의 변화에 호 역시 편안한 태도를 취했다. 자신이 그녀와 동등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들을 때마다 믿기지 힘들 정도지. 페이샬의 말에 의하면 캣닢과 우유가 흐르는 땅이라고 하던데?”

말과 함께 리셴르나는 탁자 위에 놓인 캣잎을 살짝 집어 올리고는 코에 가져다 대었다. 잠시 후 야릇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추욱 늘어지기 시작했다.

“흐냐앙. 역시 내가 이 영토를 떠날 수 없는 건 이 아트리그의 캣닢 때문이라니까.”

그런 리셴르나의 모습에 호는 피식 웃었다. 눈앞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마약에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흥흥흥. 카니앗산 열 기. 그리고 또 하나의 조건을 붙이도록 하지.”

“조건?”

호의 반문에 리셴르나는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펼쳤다.

“림드 산맥을 폭발적으로 발전시켰던 그 노하우. 나에게도 조금 알려줬으면 해. 뭐, 곤란하다면 아트리그만이라도 크게 키우고 싶어.”

“아트리그라? 그렇게 큰 장점이 있는 도시 같지는 않은데. 차라리…….”

“무슨 소리?! 캣닢이 생산되는 땅은 우리 묘인들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는 곳이라고! 제길! 매일 캣닢 속에 빠져서 살고 싶은데! 아쉽게도 아트리그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캣닢은 몇 상자가 되지 않는단 말이지.”

감정적으로 화를 버럭 내는 리셴르나의 행동에 호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가슴으로는 충분히 공감이 되고 있었다. 뭐, 군대와 관련된 일이었다면 곤란하겠지만 특산품 개발을 위한 발전이라면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좋아. 아트리그를 리그너스 대륙의 가장 큰 캣닢 생산도시로 만들어주지.”

“흐냐앙!”

“그래서 동맹에 대한 대답은?”

“안 그래도 아쉬토나 랙돌 녀석에게도 불만이 많았는데 말이야. 그 비밀 동맹? 친구? 충분히 해주도록 하지.”

리셴르나가 눈을 요사스럽게 빛내며 말했다. 어차피 바리안스의 대지는 수인 왕국의 수도인 사파리와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영지. 그런 만큼 자신이 무엇을 해도 잘 모를 게 틀림없었다.

띵동.

-‘바리안스의 대지’의 패자 리셴르나와 비밀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 비밀 동맹은 서로의 상황에 따라 쉽게 깨어질 수 있습니다.

-‘캣닢의 왕국’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캣닢은 묘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풀입니다. 아무리 성격이 사나운 묘인이라도 캣닢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죠. 그런 연유로 바리안스의 대지를 지배하는 리셴르나는 비밀 동맹의 대가로 자신의 소유 하에 있는 도시 중 유일하게 캣닢을 생산할 수 있는 아트리그의 발전을 의뢰했습니다.]

눈앞으로 떠오른 메시지를 확인한 호는 속을 쾌재를 불렀다. 커티삭까지 직접 몸을 움직인 보람이 있었다. 이젠 리셴르나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캣닢의 왕국 퀘스트를 진행하는 모습만 보여도 그녀는 비밀 동맹을 파기하려고 들지 않을 터였다.

‘좋아.’

신경이 쓰이던 후방을 정리한 만큼 이후로는 블루 스케일의 경제를 조금씩 잠식하는 것과 동시에 페렛 습지대의 땅을 야금야금 뺏을 생각이었다. 로랜드의 무덤이 있는 리저리안까지 말이다.

“흐냐아아아앙…….”

옆에서 늘어지는 신음소리가 들려오자 호는 생각을 멈추고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리셴르나는 한 손에는 어느새 캣닢이 가득 들려 있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힐링이다냐앙”

마약과도 같은 캣닢의 향기에 취한 그녀가 쇼파 위에서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 때였다.

“리셴르나 님! 사파리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이런 썅…….”

갑작스러운 부하의 보고에 한창 캣닢의 즐거움을 느끼던 리셴르나가 얼굴을 팍하고 구겼다.

‘사파리에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건가?’

덤으로 그녀와 함께 있던 호 역시 표정을 굳혔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수인 왕국의 대회의에서 무언가가 결정된 게 아닌 이상 이 먼 곳까지 사파리의 사자가 올 일은 없었던 탓이었다.

하지만 일단 자리를 피해야 했다. 사파리에서 왔다는 전령과 마주쳐서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