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5
리그너스 대륙전기 245
푹! 푸욱!
S등급 던전의 보스답게 오거트의 피부는 상당히 질긴 편이었다.
하지만 마나의 힘이 실린 키마라이의 대검은 그런 오거트의 피부를 간단하게 뚫어버렸다.
녹색의 뜨거운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오며 키마리아의 동체를 흠뻑 적셨다.
크아아아아아!
비명과 함께 제왕 오거트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앞에 나타난 적들이 생각 이상으로 강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오거트의 눈에 들어오고 있는 적은 마장기로 보이는 이 둘이 전부가 아니었다.
적어도 만 명은 넘어 보이는 병사들이 자신을 향해 창칼을 겨누고 있었다.
데스 사이더와 키마라이의 합격에 제왕 오거트는 빠르게 지쳐갔다. 사신의 낫과 키마라이의 대검이 번쩍일 때마다 울컥울컥 피를 쏟아냈고, 강한 힘이 실린 몽둥이 공격은 계속해서 허공만을 갈랐다. 결국 만신창이가 된 오거트가 땅바닥으로 쓰러지면서 던전의 공략은 끝이 났다.
“수고했어요, 오빠.”
“응. 너도 고생했어. 전보다 더 강해진 거 같은데?”
“점점 익숙해지나 봐요.”
한시진의 목소리를 들으며 호는 천천히 목을 풀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격렬한 움직임을 보였던 전투였기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리고 키마라이의 조종석에서 나온 호는 곧바로 병사들이 모아놓은 전리품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투박하지도 않은 외형의 검 한 자루가 날카로운 예기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게 호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2 아르마다(S등급 무기)
효과-무력 88 증가(+4)
드워프들의 희귀한 금속인 미스릴로만 만들어진 이 검은 과거 무적의 육군을 이끌었던 블루 스케일의 공작 펠리오페의 애검이었습니다. 하지만 펠리오페의 사망 이후 내전이 벌어지면서 그의 분신이나 다름없던 명검 아르마다는 행방불명이 되었고, 블루 스케일 또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오. 단번에 나왔다!”
바로 S등급의 무기인 아르마다였다. 호가 출입 금지로 알려진 S등급의 던전, 숲속의 궁전을 찾은 이유는 이 아르마다를 얻기 위해서였다. 바로 리그너스 대륙의 위대한 검호가 될 한시진에게 줄 선물이었다.
“원하시는 건 찾았어요?”
“응. 마침 저 녀석이 가지고 있었나 봐.”
호는 혀를 빼물고 죽어 있는 제왕 오거트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돌려 검의 손잡이를 시진에게로 향했다.
“이건?”
“아르마다라는 이름의 검이야. 지금 쓰고 있는 우스바 에스테리온 보다는 훨씬 좋을 거야.”
강화 수치가 조금 아쉽긴 했지만 해양석과 마정석을 쏟아 붓는다면 쓸 만한 수치까지는 어렵지 않게 강화시킬 수 있었다.
“제가 가져도 돼요? 오빠는요?”
“나는 그 우스바 에스테리온을 쓰면 돼.”
“어? 이거 제대로 관리도 못했는데.”
호의 말에 한시진이 부끄럽다는 듯 허리춤에 걸린 검을 뒤로 숨겼다.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전투를 치른 까닭에 검의 날이 크게 상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대장간에 가서 드워프들에게 맡기면 새로 제작한 것처럼 말끔하게 만들어줄걸? 그리고 전직 해야지.”
“전직? 아아!”
"응. 말했다시피 이 아르마다는 S등급의 무기야.“
한시진의 눈동자가 반사적으로 아르마다로 향했다.
그렇게 S등급의 무기인 아르마다를 획득하면서 전직 조건을 모두 갖춘 한시진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전직에 성공했다. 이제부터는 인피니티 소드가 아닌 S등급 클래스 천본앵이 된 것이다. 그렇게 천본앵으로 승급한 한시진을 보던 호는 자신의 정보를 확인했다. SS등급의 클래스인 오버 로드의 승격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조건들을 달성해야만 했다.
제왕 오거트를 쓰러뜨리면서 그중 하나가 달성되기는 했지만 전직에 필요한 조건 전체에 비하면 티도 나지 않는 수준이었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해야지.’
워낙에 많은 조건을 달성시켜야 하는 만큼 서두른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한시진이 S등급의 클래스를 획득한 것에 만족을 해도 충분했다.
* * *
“……진짜야? 블루 스케일이 카틀라스 군항, 아니 항구를 고작 마장기 열다섯 대에 팔아넘겼다고?”
“네. 그런 연유로 인해 당장 카틀라스 항구의 책임자를 임명해야 돼요. 물자는 그저께부터 수송을 시작했고요.”
놀란 호를 향해 아스트리드 벨이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갑작스럽게 카틀라스 항구의 소유권이 넘어오면서 본의 아니게 디르시나를 포함해 카틀라스 항구까지 신경을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영주로 임명할 녀석들이야 많긴 하지만…….”
호는 말끝을 흐렸다. 대충 등급이 높고 능력치가 전체적으로 고른 영웅 중 한 명을 골라서 영주로 임명하기에는 카틀라스 항구의 중요성이 너무나도 높았다. 자신들의 수도나 다름없는 림드 산맥과 직접적으로 이어진 도시였기 때문이었다.
바로 옆 도시인 에스트라다만 봐도 그랬다. 에스트라다에는 리그너스 대륙의 방어 시설 중 최종 병기라 할 수 있는 마동포 이제르론 배치되어 있었다. 거기에 오너 시스템으로 인해 호에게 충성을 맹세한 영웅인 리아 캬베데가 영주로 있었다. 또한 카틀라스 항구는 항구 도시인 만큼 해상 쪽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그나저나 지상군이면 몰라도 해상군은 없으나 마나한 수준인데.”
“고민 할 필요 있어요? 그런 면에서 뛰어난 인물이 한 명 있잖아요.”
벨의 살짝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카틀라스 항구를 얻었다는 사실에 놀란 호는 벨의 목소리에 담긴 가시를 알아채지 못했다.
“뛰어난 인물?”
“네. 한시진이요. 요즘 아주 둘이 좋아 죽으시던데요? 블루 스케일까지 가서 데이트도 하고?”
호를 향해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은 벨은 이어서 뾰로통한 표정으로 조그마한 목소리로 뭐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들려오는 데이트, 휴식 이라는 단어에 호는 민망한 느낌과 함께 자신의 뒤통수를 긁적였다. 데이트가 아닌 던전 공략이기는 했지만, 이제껏 벨에게 과중한 부담을 안겨준 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기야 벨은 디르시나의 영주 대리로 임명된 이후 하루도 쉬지 않고 영지의 업무를 처리했다. 디르시나의 폭발적인 성장에는 이런 벨의 헌신적이 노력이 있던 것이다. 한시진이 군사적인 면에서 큰 도움이 된다면 아스트리드 벨은 빼놓고서는 내정을 이야기 할 수가 없었다.
‘이거 많이 미안한데?’
이제껏 하루의 휴식도 주지 않고 일만 떠넘기다니 정말 악덕 영주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리그너스 대륙에 노동부가 있었다면 백 번 신고를 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자세히 보니 머릿결도 많이 상했고, 피부도 많이 푸석푸석해진 모습이었다. 벨기에 연합의 공주였던 여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관리가 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내가 신경을 쓰지 못한 것 같아서 많이 미안하네.”
“미안한 건 알아요? 정말 당신을 대신해서 디르시나의 영주 대리로 임명된 이후 성 밖을 나가본 적이 없어요. 그 시현이도 성 밖을 나갔었는데…….”
최근 강다리의 무덤을 함께 공략했을 때를 말하는 것 같았다.
“시현이가 그러던데 림드 산맥에 경치가 좋은 곳이 그렇게 많다면서요?”
은근한 벨의 목소리에 호가 눈을 번쩍였다. 저 말에 담긴 여자의 언어를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조만간 아니, 일주일 내로 휴가를 줄게.”
“정말요?”
환한 표정을 짓는 벨의 모습에 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머릿속에 있는 계획들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소소하게 시간을 보내도 상관은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카틀라스 항구의 영주는 한시진이 임명되었다. 영지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그녀밖에 맡길 수 있는 인물이 없었다.
“정말 제가 가야 돼요?”
“미안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너 밖에 없어.”
한시진은 다시 호와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카틀라스 항구의 군사적인 중요성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후우. 어쩔 수 없죠.”
그나마 다행인 것은 디르시나와 카틀라스 항구의 거리가 탈 것을 이용하면 사흘거리 밖에 되지 않는 점이었다. 그 점을 강조하면서 한시진은 호에게 자주 찾아오지 않으면 영지를 때려치우고 다시 오겠다는 귀여운 협박과 함께 오 천의 실버 문을 이끌고 카틀라스 항구로 향했다.
라헬교의 준동으로 발발했던 인간과 천족의 전쟁이 끝난 이후 리그너스 대륙은 평화 모드에 들어갔다. 대륙의 동쪽에서 마족과 정령과의 전투가 몇 번 벌어졌다는 이야기가 상단을 통해 들려오기는 했지만 국지전 수준에서 그쳤다고 했다.
림드 산맥을 포함해 붉은 핏빛의 대지, 나크 평원으로 이루어진 호의 영토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낡고 오래된 건물들은 모두 부서지고, 튼튼한 새 건물이 우후죽순으로 올라왔다. 시장, 대장간, 병영 등 각 영지마다 영지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주요 시설들이 큼지막하게 세워지고 있었다.
블루 스케일에게서 구입한 카틀라스 항구 또한 마찬가지였다. 천족들의 공격에 잔해가 되어버린 항구 시설들의 철거가 끝이 났고, 현재는 커다란 조선소가 건설 중에 있었다. 디르시나에서 대량의 수송 물자가 이동되면서 디르시나와 카틀라스 항구를 연결하는 대로에도 조그마한 마을들이 하나씩 생겨났다.
‘디아린이 있다고 해도 해군 전력 자체가 없는 상황에서 본격적으로 해상 무역을 시도하는 것은 무리야. 일단은 토리아 항구와 카틀라스 항구를 연결하는 근해 무역부터 시작해야겠어.’
그리고 호는 카틀라스 항구의 조선소 건설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해군을 양성할 생각이었다.
호와 경계를 맞닿고 있는 엘프 왕국과 수인 왕국은 딱히 어떤 액션을 취하고 있지 않았다.
과거에 벌어졌던 전쟁의 여파 때문에 두 종족 다 호를 향해 강한 적대감을 드러내고는 있었지만 계속해서 성장한 호의 군사력이 점점 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군사적으로 도발을 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엘프 왕국의 영토와 가장 가까이 있는 토갈론 요새는 현재 많은 엘프 여행자들이 머무르는 도시가 되었다.
특별한 관광 시설이나 명승지도 없는 토갈론 요새가 엘프 여행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게 된 것은 조금은 황당한 이유에서였다.
“소문이 사실이었어! 달의 여신님을 모시던 존재들이라니!”
“엘 유스타시아 여왕님의 부름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그들을 이곳에서 뵐 수 있다니 믿기지나 않네요.”
“세계수의 축복이 이 도시에서도 강하게 느껴지군요!”
바로 SSS랭크의 엘프 보병 실버 문 때문이었다.
특히나 오백의 실버 문들이 절도 있는 모습으로 만들어내는 토갈론 요새의 교대식은 엘프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토갈론 요새의 명물이 되었다.
덕분에 실버 문 교대식이 이뤄지는 장소인 토갈론 요새 북문은 교대식의 시간만 되면 구경을 온 엘프들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라고 했다.
그리고 이는 윤아가 런던 여행에서 봤던 것을 생각하며 만들어낸 아이디어이기도 했다.
“분위기가 계속 이렇게 평화적으로 흘러간다면 엘프 여왕은 무리라도 장로 정도와는 교류 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엘프 왕국과 교류를 할 수만 있다면 영지의 기술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될 터였다.
특히나 윈드라이더가 박살이 난 이후 엘프 영웅들이 사용할 마장기가 완전히 사라진 상황이기도 했다.
그에 반해 영지에 마장기가 넘쳐나는 인간 영웅들은 현재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