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1
리그너스 대륙전기 241
“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행군을 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며 시현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디르시나를 떠난 지 벌써 며칠이 흘렀지만 그 누구도 피로를 호소하지 않고 있었다.
가벼운 대화가 여기저기서 이어지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군율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의 대화였다. 시현은 문득 멍멍아 야옹해봐에서 만났던 재야 영웅들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윤호 님의 군대? 솔직히 말해서 직접 보지 않고서는 그런 군대가 있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지. 다양한 종족의 병사들이 한데 모여 함께 움직인다? 알르드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실버 문? 어휴. 그 무시무시한 병사들 말이야? 우리 같이 이름 없는 영웅들은 그 녀석들 한 두 명도 당해내기 힘들다고.’
그들은 호의 군대를 가리켜 엄청난 수준의 정예병이라고 했다. 그리고 시현은 그 말이 모두 진실이었다는 사실을 요 며칠 사이에 몸소 체감하고 있었다.
“호 오빠는 참 신기해. 어떻게 이런 병사들이 자신을 따르게 만들었을까?”
“멍멍. 그것이 호 님의 능력이죠.”
한시현을 등에 태운 사드나인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 역시 호와 함께 원정을 나선 것은 오랜만이었다. 천족과의 전쟁에서는 디르시나를 방어하느라 출진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호의 군대는 괄목상대했다. SSS랭크의 병종인 실버 문으로 주력이 바뀐 것은 물론이고, 윙드 훗사르, 할리온과 같은 최고급 병종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뿐인가? 마장기의 수 역시 크게 늘었다.
“알르드를 만드신 호 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입니다. 멍멍.”
“맞아. 그러니까 언니가 오빠를 좋아하는 거겠지?”
시현의 눈동자가 선두에서 나란히 말을 타고 가고 있는 호와 한시진에게로 향했다. 서로 대화를 나누는 둘의 모습은 누가 봐도 사이가 좋은 연인으로 보였다.
“히히히.”
그래서일까? 시현은 지금의 시간이 멍멍아 야옹해봐에 있었을 때보다도 훨씬 행복했다.
원정길은 순탄했다. 림드 산맥의 치안이 워낙 좋은 터라 몬스터들의 습격도 그 흔한 산적조차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킬리드에 도착한 원정대는 이틀간 보급을 마친 후 곧바로 강다리의 무덤으로 향했다.
“이 정도라면 굳이 걱정할 필요는 없겠어.”
싸늘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호의 얼굴은 상당히 편안해 보였다. 림드 산맥이 점점 다가올수록 덩달아 마음이 불안해지던 호였다. 가상현실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에서 유저의 발길을 거부하는 험준한 지형이 과연 이 세계에서는 어떻게 다가올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정도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마음에 걸리는 거라면 현재 자신의 위치가 아직 림드 산맥의 초입이라는 점이었다.
‘그래도 강다리의 무덤은 초입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으니.’
큰 문제는 없을 터였다. 관우는 내 여자의 공략본에도 견인족의 무덤이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위치에 던전이 존재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호가 안도의 표정을 짓고 있을 무렵 한시진이 조용히 말을 걸었다.
“오빠. 이제부터 정찰대를 보낼까요? 혹시 몬스터들이 등장하기라도 한다면…….”
“아니야. 괜히 병사들의 피로를 높일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이미 다크엘프들을 통해 이 주변의 지리를 파악해 놨거든. 몬스터들은 나타나지 않을 거야.”
한시진의 말에 호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대답했다. 지금의 위치는 킬리드의 영향권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당연히 킬리드의 치안에 영향을 받는 만큼 몬스터들이 등장할 일이 없었다.
그렇게 산맥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지형이 점점 험해지기 시작했다. 수풀 또한 우거지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 쨍쨍 내리쬐던 햇볕도 조금씩 사라지더니 이제는 빛조차 희미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 때문에 병사들은 조금씩 간격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험준한 지형으로 인한 인명 피해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 때였다.
“적이로군.”
이상한 감각을 느낀 브로리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견인들인가?”
호 역시 어렵지 않게 브로리가 말한 적을 찾을 수 있었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붉은 눈동자를 한 괴물들이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럴 꺼다. 견인족 특유의 비린내가 나는군.”
“수가 그렇게 많아보이지는 않는데요?”
“아마 정찰병 정도가 아닐까 싶네. 강다리의 무덤에서 나온 녀석들일 거야.”
호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지도 창을 열어보니 지금 위치에서부터 세 시간 남짓 떨어진 곳에 강다리의 무덤으로 향하는 입구가 있었다.
“크르르르릉”
“왈왈! 멍멍!”
게다가 타이밍 맞춰서 들려오는 울음소리는 누가 들어도 견인 특유의 개소리였다.
“슬슬 준비를 해도 되겠군.”
소수로 보이는 몬스터들이 오 만이 넘는 대군을 향해 덤비는 무모한 짓은 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전투준비를 갖추고 유적 안으로 들어서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쿠쿠쿠쿵!
마력로가 돌아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세 기의 마장기가 몸을 일으켰다. 누워있던 거대한 동체가 일어나면서 자연스레 하늘을 가리는 굵은 나뭇가지들을 박살냈고, 그 사이로 밝은 빛이 지면을 비추기 시작했다.
“어두워서 밤인 줄 알았는데 낮이네.”
갑작스런 환한 빛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시현의 말에 사드나인도 같은 생각이라는 듯 멍하고 대답했다. 그렇게 마장기를 앞세운 호의 군대는 별다른 일 없이 유적의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자신들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위해 나온 녀석들인지 붉은 눈동자의 견인들은 호의 군대와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움직이다가 유적지가 가까워질 무렵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몬스터 녀석들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네요.”
한시진이 조용히 중얼거렸고, 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함정이 있을 수도 있었다.
“다크엘프들의 정보에 따르면 유적 내부에는 B등급으로 추정되는 고대의 마장기 여섯 기가 있다고 해.”
“장식용은 아니겠지?”
“그랬으면 좋겠다만.”
그렇지는 않을 터였다. 호에게 정보를 보내온 다크 엘프들은 유적 내부에서 마장기가 움직이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방금처럼 자신들이 접근하는 것을 눈치 챈 녀석들이 맥없이 당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물며 관우는 내 여자의 공략 본에도 견인족의 무덤에는 마장기 여섯 기가 적으로 나타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일단은 유적이 얼마나 위험한지 시험을 좀 해봐야겠어.”
호는 곧바로 실버 문 다섯 부대를 유적에 투입했다. 타락한 견인족의 위험도는 A랭크 수준. 실버 문이라면 어렵지 않게 이겨낼 수 있었다. 그렇게 실버 문들이 유적으로 진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띵동 거리는 벨 소리가 울려 퍼지며 메시지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실버 문과 타락한 견인들이 격돌했다는 메시지였다.
띵동.
-제32 실버 문 부대가 타락한 견인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습니다.
-제33 실버 문 부대가 혼란스러운 견인족 영혼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습니다.
실버 문 부대는 랭크의 차이를 보여주며 파죽지세로 견인 영혼들을 청소했고, 유적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호의 지도 창에도 유적 내부의 지리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희생자가 늘어나기는 했지만 계속된 전투로 인한 피해일 뿐 위험한 상황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도중 이제까지와는 다른 메시지가 호에게 날아들었다.
띵동.
-제35 실버 문 부대가 과거의 견인족 마장기와 전투를 시작합니다.
“찾았군.”
역시나 마장기는 장식이 아니었다. B등급 마장기라는 사실도 거짓은 아닌 모양인지 제35 실버 문 부대의 병력이 천천히 줄어들고 있었다. 아무리 SSS랭크의 병사라고는 해도 버프의 영향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마장기를 상대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적들의 마장기와 마주쳤다는 보고다.”
“……그래?”
호의 말에 브로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호의 바로 옆에 있으면서 호에게 누군가가 보고를 하는 모습을 전혀 보지 못한 그녀였다. 그런데 유적 내부에 있는 병사들에게서 어떻게 보고를 받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브로리는 길게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하긴 짐승신의 축복도 내리는 녀석인데.”
자신이 알고 있는 소환자 윤호는 창조신 리그로우와 세리너스의 특권이라고 알려진 짐승신의 축복을 내리는 인물이었다. 처음 그 모습을 보았을 때 대체 얼마나 놀랐던가? 그의 그런 특이한 능력을 생각해 봤을 때 유적 안의 병사들에게서 보고를 받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유적지의 입구를 지키는 일 만의 병력을 제외한 나머지 병사들과 세 대의 마장기가 유적 내부로 들어섰다. 견인족의 전설적인 영웅이라고 알려진 강다리의 유물을 찾을 시간이었다.
“가자.”
호가 선두에 섰고, 브로리와 한시진이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피라미드의 내부가 이와 비슷할까? 직사각형의 커다란 바위들을 쌓아 올려 만든 유적은 희한하게도 지상이 아닌 지하로 연결이 되어 있었다. 당연히 호가 가려는 목적지는 과거의 견인족 마장기와 전투를 벌이고 있는 제35 실버 문 부대가 있는 곳이었다.
“저건가?”
그렇게 이십 분 정도 이동하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실버 문들과 전투를 벌이는 괴상하게 생긴 마장기가 셋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견인족들이 사용하던 마장기인가? 정말 구식이잖아, 저건.”
마장기를 보며 브로리가 실망스럽게 뇌까렸다. 눈앞의 마장기는 수인족의 C등급 마장기인 카니앗산이나 캣츠, 메카리자드 보다도 약해보였다. 느린 움직임과 투박한 외형은 마장기라기 보다는 돌로 만들어진 마법 생명체, 골렘에 가까웠다.
그것도 상체는 인간형에 가까웠지만 다리는 세 개인 이상한 모습이었다.
“그렇군.”
그런 브로리의 말에 호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하지만 우습게만 볼 수는 없었다. 외형은 저래도 공략본에는 B등급의 마장기라고 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캣 타워 때의 경험을 생각하면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그럼 어디 한 번 놀아볼까?”
신난 목소리가 통신구를 통해 울려 퍼지면서 골든 스테이트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특유의 폭발적인 스피드를 이용해 순식간에 상대 마장기에 접근한 브로리가 그대로 상대 마장기의 다리 하나를 물었다. 그러고는 잡아 뜯으려고 했다.
“어……?”
이제까지 브로리가 보여준 위력이었다면 간단히 뜯겨져 나갔어야 할 다리였다. 하지만 상대 마장기는 눈에 띄는 흠집만이 났을 뿐 멀쩡한 상태였다. 오히려 구식으로 보이는 마장기는 브로리를 향해 반격을 날리기까지 했다.
구우우우웅!
마장기의 가슴 언저리에 있는 원형 크리스탈에 마력이 모이기 시작했고, 정확한 사격이 골든 스테이트를 향해 덮쳐들었다. 마치 명중한 것처럼 보였지만 브로리의 골든 스테이트는 어느새 뒤로 물러난 상태였다.
“위력은 제법 있어 보이는데?”
상대의 측면을 따라 달리던 호가 상대 마장기의 공격을 보고는 말했다. 골든 스테이트가 있던 자리에 생겨난 크레이터는 제법 큰 편이었다.
“그래도 공격 자체는 단순해 보여요. 마력을 모으는 것도 너무 쉽게 눈에 띄고요.”
한시진이 덧붙였다. 추가하자면 장갑 역시 단단해 보였다.
그렇지 않다면 골든 스테이트의 이빨은 막아내지 못했을 터였다. 상대 마장기의 공격은 가슴의 원형 크리스탈을 이용하는 방법이 전부인지 굉장히 단조로웠다.
위력은 좋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눈을 감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피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