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4
리그너스 대륙전기 234
“림드 산맥의 패자 윤호가 임명한 인물은 블루 스케일의 수도 스완에 거주하며 블루 스케일을 오가는 윤호의 백성과 그의 상단을 보호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블루 스케일의 모든 영토는 윤호의 상단이 자유롭게 상행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그들의 안전 및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블루 스케일의 국제적인 안전을 위해 블루 스케일의 모든 외교는 소환자 윤호와 의논하기로 한다.”
“소환자 윤호와 그의 군대는 본인들이 원할 시 블루 스케일의 던전을 공략할 수 있다.”
부드러운 천에 적힌 내용의 초반부의 읽어나가던 세이라 클리퍼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 정도라면…….’
예상외면 예상외랄까? 소환자 윤호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건 전부 무리가 없는 내용이었다. 덕분에 그녀의 마음은 처음과는 달리 한결 가벼워지고 있었다. 사실 이것은 윤호의 실책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을사늑약. 어떻게 보면 불평등조약이나 다름없는 내용이지만 그것은 그때의 시대를 기준으로 잡은 것이었다. 까닥하면 전쟁이 벌어져 나라를 이루는 백성의 대다수가 죽어나가고, 조금의 평화도 없이 서로를 적대하며 싸움을 벌어야 하는 이 리그너스 대륙에서는 을사늑약의 내용 정도는 별다른 거부감이 없는 평범한 조약에 불과했다.
최소한 영토의 반 이상을 빼앗고, 리스와 식량을 포함해 생산되는 특산품의 대부분을 착취하며 나라의 고귀한 존재들인 여왕이나 공주를 성노리개로 삼고 희롱 정도는 해야 나쁜 놈이 되는 세계였다.
세이라 클리퍼드 역시 윤호를 만나기 전, 카틀라스 항구를 포함해 영토의 반 이상을 내줄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조금 과하기는 했지만 자신들이 벌인 멍청한 실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라도 나라를 지켜야 했다. 행여나 윤호의 군대가 칼끝을 돌리면 블루 스케일은 막아낼 방도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이 분은!’
영웅이란 이런 사람을 나타내는 단어일까?
천족과의 전쟁에서 많은 피해를 입고 심지어 본인의 목숨도 위험한 상황에 빠졌으면서 그는 단순히 자국 내에서의 자유로운 상행위와 블루 스케일의 여왕인 자신의 권한 중에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외교권만을 원하고 있었다.
‘우리를 위해서……!’
그런 호의 마음을 읽은 세이라 클리퍼드의 얼굴이 홍조로 물들었다.
‘외교권 정도는 언제든지 내줄 수 있어.’
어차피 인간을 제외한 나머지 종족과는 서로 간에 사신을 보내지 않을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같은 팔 왕국끼리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종족의 대규모 침공으로 인해 나라의 운명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이상 굳이 사신을 보내거나 맞이할 일이 없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제안을 거부할 리 없었다.
“……실수했어.”
그리고 세이라 클리퍼드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떠나가는 모습을 보며 호는 눈을 감았다. 자신의 멍청함을 자책하기라도 하듯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름 불평등조약이라 생각하며 건넸던 내용을 세이라 클리퍼드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받아들였다. 그리고 호는 그제야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 시도 때도 없이 전쟁이 벌어지는 이 폭력적인 세계에서 을사조약 같은 건 정말 신사적인 내용이었어.”
하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뭐, 결국 얻은 것이라고는 블루 스케일에서의 상행 권리와 세이라 클리퍼드의 호감도 뿐이었다.
“이렇게 된 거 세이라 클리퍼드의 호감도를 높여 블루 스케일을 합병시키는 거다!”
호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런 생각이라도 해야 속이 쓰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호의 군대는 블루 스케일을 침공했던 천족을 격퇴하고 디르시나로 귀환했다.
라헬교의 준동과 함께 일어난 천족의 대규모 공격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골든 크로우를 침공한 천족들은 기사의 여왕이라 불리는 이레네 아르티아가 직접 나서 물리쳤고, 한때 수도를 제외한 모든 영토를 빼앗기며 멸망의 위기에 놓여 있었던 모에드 왕국 또한 군사강국인 바라테이온의 원군으로 인해 아이리스 성국을 물리치고 자신들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병사들이 비명과 함께 사라졌고, 수백억 리스의 가치를 지닌 마장기들이 고철로 변해버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번 전쟁으로 인해 많은 영웅들이 목숨을 잃었고, 또 명성을 떨쳤다. 그중 사람들의 입에서 가장 오르락내리락하는 인물은 바로 소환자 윤호였다.
“블루 스케일의 도움 없이 자신의 세력만으로 천족의 10 천사를 물리쳤다지?”
“그것도 무려 10 천사 중 둘을 상대했다고 하더군.”
“호의 부하로 있는 검은 악마가 모습을 드러내면 천족들이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고는 항복을 외쳤다고 하더군.”
“그것보다 알르드? 그곳에는 식량이 넘쳐난다고 하던데?”
전쟁으로 굶주리던 블루 스케일의 백성들 중 많은 수가 호의 병사들에게서 식량을 얻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삼십만이 넘는 대군의 보급을 유지하기 위해 대로를 빼곡 메운 호의 식량 수송부대들을 목격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에 반해 블루 스케일을 포함 전쟁의 참화를 겪은 나라의 사람들은 제대로 된 식량을 얻지 못해 많은 수가 기아로 죽어나가고 있었다. 거기에 나라의 치안도 무너져버려 까닭에 노예 상단이 횡횡하는 것은 물론이고 산적과 몬스터들이 등장하기까지 했다.
“알르드! 이상향이 있는 림드 산맥으로 가자!”
“강력한 군대를 지닌 호의 보호를 받자! ”
“이상향이 있는 곳에서는 굶지 않을 수 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림드 산맥을 비롯한 호의 영토로 향하기 시작했다.
* * *
디르시나에 도착한 호는 곧바로 전후 처리에 나섰다. 일단 총동원령이 내려진 영지들의 상황을 원래대로 되돌려야 했고, 충성도를 위해서라도 전쟁에 참가했던 영웅들과 병사들에게 포상도 내려야 했다. 해야 할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포로로 잡은 천족의 영웅들 역시 그 거취를 정해야 했다. 나름 이름이 있는 그러니까 A등급 영웅 같은 경우에는 교섭을 통해 많은 자원을 받고 돌려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C등급처럼 낮은 등급의 영웅은 돌려보내봤자 별다른 이득이 없었다.
“여신 라헬님께서 천벌을 내리리라!”
그렇게 여러 명의 천족 영웅이 저주의 말을 내뱉으며 목숨을 잃었다.
어차피 천족과의 관계는 돌이킬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천족들이 이 세계에서 모습을 감추거나 호가 죽지 않는 이상 둘의 사이는 좋아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호는 잠재적인 적이나 다름없는 천족의 영웅을 그냥 둘 생각이 없었다.
“굳이 동료로 삼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고 말이야.”
오너 시스템을 사용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그 횟수를 다시 충전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번에 붙잡은 천족의 포로 중 오너 시스템으로 등용을 할 정도로 가치 있는 영웅은 니나 다니엘레와 칸디르 밖에 없었다.
“자, 잠깐 살려줘! 난 소환자라고!”
그렇게 죽은 천족 영웅들이 치워지고 또 다른 남자가 병사들의 손에 질질 끌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끌려온 남성은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호를 향해 외쳤다.
“제발 살려줘! 무슨 일이라도 다 할께! 당신도 소환자잖아?! 동양인이지? 동양인 맞지? 나도 동양인이라고!”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은 괴성에 호가 스윽 손을 휘저었고, 병사 한명이 소환자의 배에 주먹을 휘둘렀다. 잠시 후 켁켁 거리는 소리와 함께 주위가 조용해졌다.
“몇 회 차 소환자지?”
“2, 2회 차…….”
다시 한 번 호의 손이 움직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병사의 구타에 남성이 풀썩 자리에 주저앉으며 외쳤다.
“2, 2회 차 소환자입니다! 제, 제발! 폭력만은!”
“이름은?”
“히후미! 히후미입니다!”
일본인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호의 시선이 어디로 향했다. 한때 천족의 소환자였던 유진이 있는 방향이었다. 히후미를 보는 그녀의 표정은 벌레를 보는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소환자라…….’
당연하겠지만 살려줄 생각은 없었다. 안면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규모 무효화와 같이 자신에게 꼭 필요한 스킬을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최근 을사늑약으로 한 방 얻어맞은 탓에 일본인은 더더욱 싫게 느껴졌다.
딱!
호가 손가락을 튕기는 것과 함께 실버 문의 검이 움직였다. 그렇게 천족의 소환자였던 일본인이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 일본인 소환자를 처리하고 난 후에도 몇 명의 천족 영웅과 소환자들의 처리를 결정한 호는 모든 결정을 마친 후 디르시나의 기술 공방으로 향했다.
띵동.
-기술 조건을 만족하여 이제부터는 인간의 C등급 마장기 자넷의 제작이 가능해집니다. 상위 등급의 마장기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C등급 마장기의 제작 노하우를 쌓아야 합니다.
-기술 조건을 만족하여 이제부터는 인간의 C등급 마장기 골드 이글의 제작이 가능해집니다. 상위 등급의 마장기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C등급 마장기의 제작 노하우를 쌓아야 합니다.
이번 전쟁의 대가로 블루 스케일의 연구원들이 림드 산맥에 도착했고, 호는 드디어 마장기를 제작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받을 수 있었다.
비록 C등급인 자넷과 골드 이글 급만 제작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리그너스 대륙을 대표하는 전쟁 병기를 제작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자넷(C등급 마장기-인간족)
인간을 대표하는 마장기 중 하나로 단순한 외형으로 인해 다루기가 굉장히 쉬운 마장기. 합금으로 만들어진 롱소드와 함께 원거리 공격이 가득한 권총을 주 무기로 사용한다.
양성 비용–1억 리스, 휴머니온 합금 100상자, 마정석 1000상자…….]
역시나 입이 쩍 벌어지는 수준의 비용이었다. 하지만 영지 특성화로 인해 메갈로폴리스나 에큐메노폴리스로 발전한 림드 산맥의 도시가 생산하는 자원은 C등급 마장기도 어렵지 않게 제작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어이! 빨리 빨리 옮겨!”
“휴머니온 합금은 취급을 조심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그 한 상자가 네놈의 연봉보다도 비싸단 말이다!”
커다란 수레가 공장 한 구석에 나무상자를 내려놓았고, 기술자들은 재료를 나르는 인부들에게 연신 소리를 질렀다. 다른 한 쪽에서는 마력의 칼날이 불꽃을 튀겨내며 휴머니온 합금을 두부처럼 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잘린 합금은 어디론가 옮겨졌다.
“드디어 우리도 마장기라는 병기를 제작할 수 있게 됐네요.”
먼저 기술 공방을 방문하고 있던 시진이 호를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10 미터 정도 크기의 거대한 기계 병기를 만들기 위해 최소 수 십 많으면 백 명 가까이의 인부들이 투입되고 있었다. 그런 마장기의 제작이 기술 공방 전체를 놓고 봤을 때 다섯 군데서 동시에 이뤄지고 있었다.
“우리를 지킬 수 있는 힘이 더욱 늘어난 거지.”
“그래도 오빠가 다치는 것은 싫어요.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제가 얼마나 놀랐는데요. 천족이란 천족들은 모조리 없애버릴 생각이었어요.”
“그러지 않았어? 아마 이번 전쟁에서 가장 이름을 떨친 영웅이 바로 너일걸?”
장난이 가득 담긴 호의 농담에 시진은 그의 옆구리를 쿡하고 찔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진의 눈동자가 다시 기술자들과 조립중인 마장기로 향했다. 이 대륙의 모든 기술력이 응집된 마장기의 제작과정은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에게도 장엄함을 안겨다주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한숨 돌릴 수 있겠네요. 계속해서 마장기를 제작할 수 있다면 다른 종족들도 우리를 노리지 못할 거 아니에요."”
한참동안 마장기의 제작과정을 살펴보던 시진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세계의 가장 강력한 전쟁 병기인 마장기가 보여주는 전쟁 억지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저런 병기가 국내의 성에 다수 배치되면 무시무시한 수인 왕국이나 마족 역시 쉽사리 자신들을 도발하지 못할 거라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과연 그럴까?’
그런 시진의 말에 호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전투에 나선 마장기가 보여주는 파괴력은 분명 엄청났다. 하지만 자넷 등급은 기껏 C등급에 불과한 마장기였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비교대상을 전용기를 삼는다면 그 위력은 초라한 수준에 불과했다.
원활한 보급과 최상의 컨디션만 유지할 수 있다면 저런 C등급의 마장기는 브로리의 골든 스테이트만 하더라도 수십 기는 격파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가 자넷급의 마장기를 다수 제작하는 것에는 다 그 이유가 있었다.
[숙련도
인간족 마장기–C등급(64 / 1000)
엘프족 마장기–제작 불가
마족 마장기–제작 불가
수인족 마장기–제작 불가
정령족 마장기–제작 불가
드워프족 마장기–제작 불가
천족 마장기–제작 불가
용족 마장기–제작 불가]
바로 마장기의 제작 숙련도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등급이 높아야 좋은 아이템을 가져다주는 상단의 평판처럼 마장기 역시 숙련도를 높여야지만 자넷 급과 골드 이글 급의 상위 기종인 엑스칼리버 등급의 마장기를 연구할 수 있었다. 덕분에 호는 자넷과 골드 이글급 마장기의 제작에 돈이란 돈은 모조리 쏟아 붓고 있었다.
‘최소 백 기. 아니 그 이상은 만들어야 되겠군.’
뭐, C등급이라고 해도 마장기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운용할 수 있는 영웅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남는 수량은 블루 스케일에 비싼 값을 받고 판매를 하면 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