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7
리그너스 대륙전기 227
‘그나저나 블루 스케일의 해군은 대체 뭐하고 있는 거야? 저런 천족들의 수송부대 하나 막아내지 못하고.’
뭐, 그쪽도 그쪽 나름대로 분전을 하고 있겠다만 리그너스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해군력을 지녔다는 명성치고는 계속해서 천족의 상륙을 허용하고 있다는 게 실망스럽기는 했다. 하물며 육상 전력은 있으나마나한 수준이면서 말이다.
결국 따지고 보면 이 나라는 자신이 지키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장기 그것도 고작 C등급 마장기 제작 기술과 토리아 항구라는 소소한 대가를 받고 군사를 움직이고 있다는 게 손해 같았다.
그렇게 괜히 가슴이 쓰려오던 와중 주위를 훑던 브로리가 호를 향해 말했다.
“슬슬 후퇴해야 될 것 같다. 천족 정찰대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어.”
“그래? 빨리 튀어야겠는데?”
어쨌든 직접 몸을 움직인 보람은 있었다.
A등급 마장기를 포함해 다수의 마장기가 합류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고 칸디르를 제외하고도 또 다른 천족의 10 천사, 그것도 니나 다니엘레라는 존재를 발견하기도 했다.
‘그나저나 이거 쉽지 않겠는데? 난이도가 꽤 높아졌어.’
주둔지로 돌아가면서 호는 자신이 확인했던 천족들의 전력을 떠올렸다.
요새에 주둔해 있던 병사는 최소 10만 이상. 현재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병사보다 세 배 가량이나 많은 수였다. 아무리 실버 문이 SSS랭크라고해도 상대 역시 A, S랭크도 이루어져 있었다.
그래도 랭크의 차이와 자신의 버프로 강력해진 실버 문이라면 병사들끼리만 정면으로 부딪쳤을 경우 패배보다는 승리할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하지만 상대에게는 10만이라는 병사만이 있는 게 아니었다. 다수의 마장기 역시 배치되어 있었다.
이번만큼은 브로리의 무력에 기대어 마장기 전력을 처리할 수도 없었다. 전투가 시작되면 분명 브로리는 니나 다니엘레와 칸디르에게 묶여 아무것도 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제까지 해왔던 전술로 똑같이 나선다면 단단히 이를 갈고 나온 천족들에게 치명타를 얻어맞을게 뻔했다.
“행여나 내가 나선다고 해도…….”
머릿속으로 모의전을 그리던 호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졌다.
브로리의 무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그녀 혼자 10 천사 중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자신이 돕는다고 해도 상황이 크게 나아질 것 같지는 않았다. 운이 나쁘면 다른 아군이 합류해야 할 상황이 나올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남은 마장기들이 천족의 마장기 전력을 전부 감당해야 했다.
그뿐일까?
천족의 마장기 오너 역시 머리가 돌은 아닐 터. 그들도 자신들의 지휘관들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할 게 틀림없었다.
결국 병력의 수도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마장기전까지 답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블루 스케일의 귀족들이 있기는 한데.’
안타깝게도 그들의 실력은 믿을 수 없었다. B등급 마장기도 없는 그 녀석들이 천족의 마장기 오너들을 상대로 이긴다는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게 가능했다면 블루 스케일이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으리라. 그리고 호는 그런 희박한 확률에 자신의 운명을 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제대로 준비를 갖춰서 오는 건데…….”
핑계를 대자면 블루 스케일의 상황이 워낙 풍전등화인 탓에 시간이 부족했다. 어쨌든 SSS랭크 병종인 실버 문의 존재에 전쟁을 조금 쉽게 전쟁을 생각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실제로 브로리를 제외하면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최정예 전력을 구성한 것도 아니었다. 현재의 전력으로 천족의 군대를 상대하는 건 위험부담이 너무나도 컸다.
그렇다고 블루 스케일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후퇴하면 블루 스케일은 결코 천족의 군대를 막아낼 수 없었다. 여신 라헬을 생각하면 천족의 세력이 늘어나는 것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했다.
결국 고민을 거듭한 호는 자신의 명령이 담긴 서신을 윙드 훗사르를 통해 디르시나로 보내기로 했다.
“나 참. 갑자기 이렇게 입장이 바뀔 줄이야.”
그리고 떠나는 윙드 훗사르를 보며 호는 허탈하게 웃었다. 서신에 담긴 내용이 전달되고 그대로 실행이 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천족이 지원군을 기다리며 시간을 끌었다면, 이제는 자신이 천족을 상대로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무, 무엇이?! 10 천사 중 두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고?!”
“아아! 블루 스케일의 운명은 여기까지인가!”
“천족의 수송함대가 상륙할 때까지 도베르만 제독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수도 스완에 머무르면서 천족의 병력이 늘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블루 스케일 귀족들의 표정은 사정없이 구겨져 있었다. 여왕인 세이라 클리퍼드의 얼굴 역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여왕이라는 자리에 생각 없이 앉고 있지는 않은지 그녀는 해군을 지휘하는 도베르만 제독을 탓하는 멍청한 귀족들과는 다른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소환자 윤호의 군대는 어찌하고 있나요?”
병사를 향해 말하는 세이라 클리퍼드의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 그의 군대가 블루 스케일을 떠나기라도 하면 이 나라의 운명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사태를 파악한 몇몇 귀족들 역시 창백해진 표정으로 소식을 전해온 병사를 바라보았다.
“현재 천족들과 대치중입니다만 계속해서 후퇴 중에 있습니다. 제가 떠나오기 전까지는 수복했던 국토 중 20%는 다시 빼앗긴 상황이었습니다.”
병사의 보고에 세이라 클리퍼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족의 전력이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소환자 윤호는 블루 스케일을 포기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림드 산맥의 패자가 불리한 상황에서도 블루 스케일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것을 보며 세이라 클리퍼드는 그런 그의 행동이 굉장히 고맙게 느껴졌다. 비록 소환자이기는 했지만 구국의 영웅이 따로 없었다.
“지금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왕실군은 얼마나 되죠?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대들 역시 병사들을 내어 놓아야만 할 겁니다!”
하지만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는 없었다. 이 나라는 윤호의 나라가 아닌 자신들의 나라였다.
서릿발과 같은 세이라 클리퍼드의 명령에 귀족들이 어수선하게 움직였다. 세이라 클리퍼드는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안위를 생각하는 그들의 행동에 속으로 천불이 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강제할 만한 수단이 없었다.
그녀의 힘이나 다름없는 왕실군은 이미 대다수가 전쟁터에 나가있었고, 충성을 맹세하는 귀족들 역시 목숨을 걸고 천족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귀족들은 귀족이라는 말 자체가 아까운 쓰레기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쓰레기들 역시 목숨은 아까운 모양인지 귀족들은 그 자리에서 논의를 거듭하고는 오천의 병사를 만들어 내었다.
그렇게 스완에서 오천의 왕실 군을 포함해 도합 일만의 병사들이 최전선으로 향하는 동안 호가 보낸 서신을 받은 디르시나에서는 격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 * *
전쟁을 치르는 데 있어 군대를 지휘하는 장군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은 굉장히 많다. 정보 역시 그중 하나였다.
현대전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리그너스 대륙 역시 정보의 존재를 가벼이 여기지 못했다. 아니, 현대 문물이 없는 세계인만큼 정보의 중요성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간단히 전화 하나만으로 대륙 건너편까지 연결되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상대방이 몇 기의 마장기를 보유하고 있는지 그 등급은 어떻게 되는지 또한 적을 지휘하는 지휘관이 어떤 인물이며 전용기를 보유할 정도로 이름 있는 영웅인지의 여부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만큼 정보의 존재는 간단한 것만으로도 전황을 유리하게 혹은 불리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가상현실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유저처럼 상대의 정보와 전력을 세세하게 알아낼 수 있는 호의 능력은 사기나 다름없었다. 정보창의 내용을 통해 어떠한 상황에서도 최선의 해결책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호에게는 공략본이라는 리그너스 대륙의 만능백과사전도 가지고 있었다.
호는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토대로 자신이 보유한 군대가 10 천사 중 둘이 포함되어 있는 천족의 군대를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런 내용들이 적힌 서신이 윙드 훗사르의 손을 통해 디르시나의 회의실에 도착했다.
“호 님께서 지원을 요청했어요. 천족의 전력이 만만치 않은 모양이에요.”
“당장 지원군을 보내야 합니다!”
“실버 문과 윙드 훗사르로 구성된 부대를 보내야 합니다!”
“시간을 좀 더 벌 수 있다면 리치의 상위 병종인 할리온으로 이루어진 마법 부대를 보낼 수도 있습니다.”
덕분에 디르시나의 회의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분주해졌고 곧바로 병사들이 편성되었다. 하지만 서신에 적힌 내용은 단순히 지원 병력만을 보내달라고 적혀 있는 게 아니었다.
“빨리빨리 움직여! 하루라도 빨리 데스 사이더를 디르시나까지 수송해야 한다!”
“알르드를 세운 우리의 영웅이 위험에 처해 있다!”
“호 님을 지켜라!”
둠디스트에서 조인족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던 한시진이 비밀리에 자신의 전용기와 함께 디르시나로 향했다. 조용히 모습을 감춘 영웅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티거알리카를 보유한 S등급 영웅 아쉬카로트는 물론이고 영토의 특성화 개발에 열중하던 로우덴 셰필드 또한 행동을 멈추고는 디르시나로 향했다.
“호 님께서?! 그의 안전을 위협하는 적들에게 우리 엘프들의 분노를 보여주겠다!”
S등급의 엘프 영웅, 엘 라스엘도 B등급 마장기인 윈드 라이더를 이끌고 디르시나의 행렬에 동참했다. 군단의 소환사라는 클래스를 보유하고 있는 신윤아 역시 자신을 호위하는 병력과 함께 토갈론 요새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우거 슬레이어 컹컹이와 묘인족 리아 캬베데까지. 호의 휘하에서 한가락 한다고 알려진 영웅들은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디르시나로 향하고 있었다.
특성화가 끝난 림드 산맥의 도시들도 넘쳐나는 리스와 자원들을 제물로 삼아 병력의 양성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규합하기 위해 정부는 적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천족이라는 적으로 인해 모든 도시에 동원령이 발동된 것이다.
“디르시나로 가자!”
“호 님을 지켜라! 천족들의 날개를 꺾어버리자!”
“호우! 호우! 호우!”
각 도시에서 훈련을 마친 부대가 하루가 멀다 하고 편성되어 디르시나로 향했다. 식량을 가득 실은 수레의 행렬도 끊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디르시나 아니, 자신의 영토에 큰 변화를 일으킨 주인공인 호는 현재 천족의 추격을 피해 죽어라고 달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귀족 새끼들!”
호는 천족들을 상대로 정면으로 맞붙는 것이 패배의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더욱이 디르시나로 보낸 서신도 있었기에 직접 상대를 물리치는 것보다 시간을 끄는 것을 목적으로 군대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상대를 가장 괴롭힐 수 있는 방법은 역시나 치고 빠지기였다. 날랜 몸놀림의 실버 문과 윙드 훗사르가 있는 만큼 게릴라전을 펼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브로리의 전용기인 골든 스테이트 역시 기동력이 뛰어난 웨어 타이거급 마장기였다.
“천족의 수송대를 전멸시켰습니다!”
“두 기의 마장기가 포함된 천족의 병사를 점령했습니다!”
“천족의 영웅 페리뇽이 사망했습니다.”
게릴라전을 펼치기로 한 호의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제법 성과도 있었다. 본진과 따로 떨어진 소규모 부대나 수송대 혹은 정찰을 나온 천족의 부대들은 소수라고는 해도 SSS랭크의 병사인 실버 문이 주축이 된 게릴라 부대를 막아내지 못한 것이다. 그런 게릴라 부대가 피해야 할 것은 마장기나 A등급 이상의 영웅이 포함된 부대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 사고가 터지고야 말았다.
“쓰레기 같은 놈들! 그 새끼들은 목숨을 두 개나 달고 있는 건가? 진짜 도움이 되지 않는다니까!”
호가 게릴라전을 벌이는 동안 천족들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용도로 성들을 방패삼아 천족들의 병력을 막아내는 임무를 맡던 블루 스케일의 귀족들이 다들 무슨 깡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는지 성문을 열고 나섰다가 대패를 한 것이다. 덕분에 다섯 개의 영지가 순식간에 천족의 손에 넘어가버렸다.
블루 스케일의 군대가 전멸한 것은 딱히 별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도움도 되지 않는 버림 패였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전멸을 당한 타이밍이 너무나도 공교로웠다.
그들의 패배로 인해 천족의 세력권 깊숙이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게릴라전을 펼치던 호가 천족의 영토에 고립되어 버린 것이다.
덕분에 호는 천족들에게 사방으로 포위를 당한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