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
리그너스 대륙전기 225
띵동.
-제16 실버 문 부대가 전투에 돌입했습니다.
-제12 실버 문 부대가 전투에 돌입했습니다.
-제3 리치 부대가 전투에 돌입했습니다.
리치들의 공격 마법이 단단히 잠긴 성문을 향해 날아들었고, 잽싼 몸놀림으로 성벽 타고 오른 실버 문들이 성벽 위에 자리를 잡은 로얄 소벨리온들을 밀어 붙이면서 여기저기서 난전이 펼쳐졌다. 그런 가운데 호 역시 MLC를 이용해 전과를 올리고 있었다.
투쾅! 쾅!
성벽 위 실버 문 부대를 노리고 무기를 휘두르던 엔젤급 마장기가 호가 발사한 마력포에 얻어맞으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C등급이라지만 그래도 단단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마장기. 연기가 피어나는 와중에도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보니 전투력을 상실할 정도의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도 마장기에 탑승한 오너의 충격은 가볍지 않을 터였다. 운이 나쁘면 조종석 구토로 범벅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마장기의 움직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콰아아앙!
엑스칼리버의 마력포가 엔젤급 마장기를 관통하며 요란한 폭발을 만들어 냈다. 마력포에 관통된 마장기가 침묵한 것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제법인데?”
마장기를 침묵시킨 것은 호가 아니었다. 호의 MLC 는 충전 중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주인공은 호와 함께 이번 전쟁에 참여한 A등급 인간 영웅이었다. 휘하의 다른 인간 영웅들에 비해 등급이 높은데다가 다른 능력에 비해 통솔력과 무력능력이 월등하게 높은 일명 맹장형 영웅인 까닭에 엑스칼리버의 오너로 임명했는데, 마장기 조종술에도 재능이 있는 모양인지 제법 쏠쏠한 활약을 보이고 있었다.
콰드득! 콰직!
하지만 이번 전투에서도 가장 큰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브로리의 골든 스테이트였다. 포효와 함께 골든 스테이트가 몸을 날릴 때마다 그녀를 맞상대하는 천족 마장기의 사지가 연달아 하늘 위로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마장기들만 활약하는 것도 아니었다. 실버 문을 비롯한 병사들의 활약도 대단했다. 그리고 그 한 축에는 호의 약자멸시 효과가 있었다. 스킬을 보유한 대상보다 통솔력이 낮은 경우에는 혼란 효과를 무력이 낮을 경우에는 사기를 감소시키는 약자멸시. 그리고 호의 통솔력은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한계치를 뛰어넘은 1070 이었다.
그에 반해 성을 지키는 천족의 지휘관은 케이 윌라슨이라는 A등급 영웅에 불과했다. 정보창을 통해 알아낸 그의 통솔력은 고작 242. 무려 800 의 차이를 보이는 통솔력 차이는 약자멸시 효과가 수백 번 발동하고도 남았다.
* * *
콰드득!
절로 몸이 굳을 정도로 서늘한 눈빛을 한 실버 문이 검을 휘두르자 로얄 소벨리온이 그대로 무너져 내린다. 단 일 검. 천족이 자랑하는 S랭크의 병사가 그렇게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
각종 버프를 몸에 두르고 있는 SSS랭크의 병사들은 하나하나가 일기당천의 정예병이었다. 그런 실버 문들은 자신들이 자랑하는 날카로운 검술을 앞세워 로얄 소벨리온을 비롯한 천족들을 거침없이 몰아붙였다.
티티티팅!
천족의 화살은 리치가 사용하는 뼈의 방패를 뚫어내지 못했다. 설령 뚫어냈다 하더라도 화살조차 베어버리는 실버 문의 검술에 무기력하게 떨어질 뿐이었다. 비행병이 사용하는 날카로운 장창이나 마법사의 광역 마법도 마찬가지였다. 세 단계나 차이가 나는 랭크도 문제였지만 버프의 효과 덕이 컸다. 설령 실버 문에게 부상을 입혔다 해도 끝이 난 게 아니었다.
“생명의 빛이여!”
주문과 함께 연녹색의 빛이 피를 흘리고 있는 실버 문의 몸을 휘감았고, 부상을 입은 실버 문의 상처가 빠른 속도로 치유되기 시작했다. 실버 문의 장점은 검술실력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엘프들의 보조 마법과 세계수의 의지가 담긴 회복 마법 역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실버 문들의 모습을 보며 천족의 병사들은 진심으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괴물…….”
이번 방어전에 참여한 천족의 소환자 중 하나인 유진도 그런 감정이었다.
적들이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로얄 소벨리온을 비롯한 천족의 병사들이 낙엽처럼 스러지고 있었다. 아무리 실버 문이 최종 랭크라 불리는 SSS랭크 병종이라지만 저 검술 실력은 정말로 반칙이었다. 그뿐일까?
투쾅!
요란한 소리에 유진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멀찍이서 천족 병사들이 공중으로 치솟아 오르는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부서져 버린 성문을 통해 윙드 훗사르가 진입한 것이다. 저 돌파력 역시 말이 되지 않았다.
‘이건 답이 없어.’
윤아의 눈동자가 죽어가기 시작했다. 전투는 패배했다. 주변에서는 여전히 난전이 펼쳐지고 있었지만, 오래가지 못할 게 분명했다. 저번 전투에서 효과를 봤었던 대규모 무효화 스킬이 이번에는 실패를 한 탓에 적들은 온몸으로 버프를 휘감고 있었다. 그에 반해 아군은 사기가 떨어지는 상황. 최악의 상황이었다.
‘도망쳐야 하는데…….’
하필이면 대규모 무효화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번 공성전에 차출된 그녀였다.
함께했던 상민은 이미 후방으로 퇴각한 상황. 지금 이 자리에서 믿을 만한 건 자기 자신밖에 없었다.
그리고 유진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승산이 전혀 없는 싸움이었다. 솔직히 그녀에는 이번 전투가 패배해도 상관이 없었다.
여신 라헬의 뜻 따위? 다 필요 없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살아남는 것이었다.
“크아악!”
“아악!”
천족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며 유진은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주변에는 천족 영웅과 몇몇 병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는 난전 때문이었다.
그리고 유진은 힐끗 천족의 영웅을 바라봤다. 은빛의 투구를 쓴 채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남성 영웅은 자신의 상관격인 영웅이었다. 그가 있는 이상 자신은 지금의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도망치는 건 불가능해. 조금이라도 수상한 낌새를 보인다면.’
적들을 향해 있는 로얄 소벨리온들의 검이 자신을 향할지도 몰랐다. 한둘이라면 모를까 열 명에 가까운 로얄 소벨리온들을 상대로 무사히 도망칠 자신은 없었다. 거기에 천족의 영웅도 있었다.
유진은 살짝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만 이런 상황인 것은 아닐 터였다.
모르긴 해도 이번 공성전에 참여한 소환자들 전부가 강제로 전투에 나서거나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모두가 허무하게 목숨을 잃겠지.’
총사령관인 칸디르는 이번 전투 참여했던 소환자 중 누가 목숨을 잃는지 별다른 관심도 없을 게 분명했다.
다른 천족 영웅들도 그녀와 크게 다르지 않을 터였다. 그나마 자신의 죽음에 슬퍼해 주는 사람이라면 친분이 있는 1회 차 소환자인 박상민 정도. 하지만 유진은 그마저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같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점과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한 경험이 있다는 공통점으로 친하게 지내기는 했지만 단지 그뿐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인간이 얼마나 냉정해질 수 있는지는 이미 눈으로 많이 본 바 있었다.
‘겉으로는 소환자라고 추켜 세워주고 있지만, 실상은 완전히 달라. 천족들에게 있어 소환자는……. 도구에 불과하니까.’
선택의 시전에서 선택된 천족의 소환자들은 강제적으로 여신 라헬을 믿어야만 했다.
반항하거나 거부하는 기색을 보이는 소환자들은 가차 없이 독방 행이었다. 그렇게 독방으로 끌려갔던 소환자들 중 몇몇의 행방이 불분명하다는 건 알음알음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런 탓에 처음 천족의 도시에 도착한 소환자들은 여신 라헬의 말이 담긴 책을 달달 외우고 라헬을 향한 맹목적인 믿음을 보이고 나서야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세뇌가 따로 없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그 증거도 있었다.
천족과 함께 생활하면서 같은 대한민국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녀와 친하게 지내던 상민은 여신 라헬만이 진리이며 그녀의 말을 전 대륙에 퍼뜨려야 한다는 이상한 사명감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라헬의 믿음을 증명하고 자유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족들의 관심과도 같은 감시는 계속되었다.
그렇게 웃는 가면을 쓴 것 같은 천족들의 행동에 위화감을 느꼈던 유진은 한때나마 진리처럼 느껴졌던 라헬의 믿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겉으로는 라헬을 믿는 척하며 천족들과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소환자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대략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던 데다가 천족을 떠나서는 이 세계에서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믿음이 최근에 깨져버린 상황이었다.
‘림드 산맥의 패자라고 했지?’
그 역시 자신과 똑같은 소환자였다. 차이가 있다면 자신은 2회 차 소환자인 것에 반해 그는 1회 차 소환자라는 점에 불과했다.
무지막지하게 큰 차이는 아니었다. 기껏해야 이 세계에서 몇 달 더 일찍 소환된 것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호라는 인물은 마족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했다.
어정쩡한 세력도 아니었다. 그녀는 쳐다보지도 못하는 천족의 10 천사 중 하나인 칸디르를 몰아붙이고 있을 정도의 강력한 세력이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를 뒤로 한 채 유진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무언가를 결심한 그녀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천족 영웅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자일 케사르님. 저도 전투에 참가하겠습니다.”
“으음?”
뜻밖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천족 영웅의 눈동자가 위아래로 유진을 훑었다.
“진심인가? 적은 강력하다. 라헬님의 뜻을 펼치기도 전에 허무하게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보잘 것 없는 제 목숨보다는 여신 라헬님의 뜻을 펼치는 게 중요합니다. 조금이라도 라헬님의 뜻을 알릴 수만 있다면 저는 그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후우. 칸디르 님께서는 어떻게든 자네들을 무사히 지키라고 했다만.”
천족 영웅의 무거운 목소리에 유진은 속으로 거짓말이라고 외쳤다.
“어쩔 수 없지. 건투를 비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천족 영웅은 흔들림이 없어 보이는 유진의 태도를 확인하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소환자의 손을 빌려야 할 정도로 돌아가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여신 라헬을 위하여.”
“여신 라헬을 위하여.”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유진은 양손으로 깍지를 끼고는 여신 라헬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누가 봐도 독실한 라헬교도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기도를 끝낸 유진은 수분을 흡수한 붕대를 빠르게 손에 감고는 철로 만들어진 건틀렛을 끼기 시작했다.
몽크라는 클래스를 보유하고 있는 그녀는 특기는 다름 아닌 근접전이었다. 사실 특기라고 할 만 한 건 아니었다. 단지 가상현실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즐겼을 때 몽크 계열의 클래스로 플레이를 했던 기억 때문에 선택한 직업이었다.
어쨌든 화려한 근접 기술과 자신의 신체를 강화해 타격을 주는 몽크는 유진의 성격에 딱 맞는 직업이었다.
“그럼 부탁한다.”
천족 영웅의 말에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전투가 벌어지는 장소로 달리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자신을 쳐다보는 천족 영웅의 눈길에 뒤통수가 따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