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3
리그너스 대륙전기 223
“그에 반해 아군의 전력은 다들 아는 상황. 곧 지원군이 도착할 예정이지만 정면으로 윤호의 군대와 부딪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은 힘들다고 봅니다.”
계속해서 말을 이은 칸디르의 시선이 상민과 유진이 있는 자리에 머물렀다.
“소환자 박상민.”
“네? 네. 칸디르 님.”
“여신의 축복을 받아 이 세계를 찾은 그대들 중 몇몇이 특수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나는 저번 전투 이후 그대가 말한 대규모 무효화 마법을 이번 전투에서 사용했죠.”
칸디르가 자신의 실책을 지적하는 것으로 느껴졌는지 상민의 표정이 미미하게 찡그려졌다.
처음 호의 군대와 전투를 벌인 이후 상민은 호의 병사들에게 각종 버프 마법이 걸려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아니,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제대로 플레이 해본 적이 있는 유저라면 병사들을 휘감고 있는 빛들이 무엇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그 탓에 그는 칸디르에게 대규모 무효화를 통해 상대의 버프를 제거해야 된다고 조언을 했다. 다행히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소환자가 대규모 무효화 스킬을 사용할 수 있기에 나온 계획이었다. 어쨌든 대규모 무효화 스킬은 반은 성공, 반은 실패였다. 무려 A랭크의 스킬이 발동되었지만, 적군의 버프가 모조리 사라지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분명 저번 전투와 비교하면 상대에 공세가 줄어든 차이는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군이 막아낼 수 없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대규모 무효화는 성공했습니다. 다만, 적들에게 걸린 버프 중 해제되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잠시의 머뭇거림이 있었고, 상민이 칸디르를 향해 말했다.
“그렇군요. 어떤 능력을 알 수 있습니까?”
“아, 아뇨. 그것까지는…….”
상민은 고개를 저었다.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등장하는 스킬들의 숫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 모든 효과를 기억할 수 있는 인물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뭐,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엔딩을 수도 없이 본 폐인들이나 관우는 내 여자와 같은 네임드 급 플레이어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만 자신의 능력이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A랭크 대규모 무효화에 해제되지 않는 스킬은 S랭크 이상. 적어도 상대는 S등급 클래스를 지니고 있는 영웅입니다.”
“그 영웅이 윤호라는 소환자 입니까?”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아니, 아닐 겁니다.”
상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저런 군대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S등급의 클래스까지 지니고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네임드라고 해도 그건 불가능해. 이 세계는 게임이 아니라고. 게다가 소환자는 게임 속의 유저가 아니야. 마음대로 세력을 키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자신 또한 윤호라는 인물과 같은 1회 차 소환자였다. 그것도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알고 있는 소환자. 아무리 상대가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잘 알고 있는 인물이라 하더라도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은 그 경우가 다르다는 게 상민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마친 상민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윤호 라는 소환자의 능력은 아닐 겁니다. 제 생각으로는 황금색 마장기를 조종하는 영웅의 능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황금색 마장기를 조종하는 영웅이라……. 웨어 타이거급 마장기였죠. 수인 영웅이겠군요.”
상민의 말에 칸디르는 손끝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두드렸다. 기억을 떠올릴 때 나오는 그녀의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상민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 중에서 천족의 부대를 이끌고 있는 소환자는 A등급 클래스를 보유한 그뿐. 그래서인지 다른 소환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적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웨어 타이거를 조종하는 마장기사를 무력화 시켜야 합니다. 그와 함께 적의 주축인 실버 문을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좋은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자신을 쳐다보는 칸디르의 심상치 않은 눈빛에 상민은 그녀가 어째서 이 자리에 소환자들을 불러 모았는지 알 수 있었다. 상대는 일반적인 이 세계의 영웅이 아닌 소환자. 자신들과 같은 소환자인 만큼 그의 생각을 알아내고 무력화 시키는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자신들을 이 자리에 모은 게 분명했다.
상민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다른 소환자들도 마찬가지인지 고민을 하는 모습이었다. 다행히 적의 전력은 어느 정도 밝혀진 상황이었다.
‘객관적인 전력은 아군이 밀려. 일단 병사들의 수준이 차이가 크게 나. 게다가 상대에게는 지휘관 버프를 사용할 수 있는 영웅이 있다. 그것도 S랭크 이상.’
거기에 황금색 마장기라는 변수도 있었다. 아군 마장기사들을 손쉽게 무력화 시키는 그 마장기는 최소 S등급 이상의 영웅이 조종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으음…….”
상민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객관적으로 따져봤을 때 상황이 굉장히 좋지 않았다. 칸디르가 황금색 마장기를 상대로 동수를 이룬다 하더라도 상대의 마장기 전력을 막아낼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병사들끼리의 전투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대의 주공 중 하나인 윙드 훗사르에 대한 대책은 어렵지 않았다. 윙드 훗사르가 기병이라는 점을 이용해 최대한 기병이 힘을 쓸 수 없는 지형에서 전투를 벌이면 되는 일이었다. 거기에 천족들이 자랑하는 비행병을 이용해 피해를 주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실버 문이 문제였다.
실버 문은 리그너스 대륙전기에 등장하는 최종 병기인 SSS랭크 병종. 게다가 엘프족 보병은 날랜 몸놀림과 뛰어난 검술도 장점이었지만 다양한 보조마법과 회복 마법까지 사용할 수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미친 듯이 해보는 건데…….’
시간이 지날수록 상민의 이마에는 주름만이 깊게 파이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 여러 스킬들을 이용해 지금의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려 봤지만, 자신의 능력으로는 획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뾰족한 수가 나지 않았다.
“방비를 단단히 갖추고 지원군이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어찌어찌 상대의 마장기 전력을 막아낸다 하더라도 실버 문으로 구성된 병사들은 막는 게 굉장히 힘들 것 같습니다.”
결국 상민은 한숨과 함께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그때였다. 한 소환자가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렸고, 칸디르의 눈동자가 그에게로 향했다.
“그쪽 소환자. 좋은 방법이라도 있나요?”
“그렇습니다. 칸디르 님.”
자리에서 일어난 이는 상민이 유진이 막사에 들어섰을 때 둘을 노려보던 일본 소환자였다. 히후미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그는 상민과 유진을 흘깃 노려보며 얼굴을 이죽이고는 입을 열었다.
“칸디르 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여신 라헬님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이 세계에 오기 전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일본이라는 나라였죠.”
“그대들이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그 이야기를 왜 꺼내는지 이유를 듣고 싶군요.”
일본 소환자의 말에 칸디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호기심이라는 감정이 번지고 있었다. 다른 소환자들도 마찬가지인지 다들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칸디르 님 앞에서 이 이야기를 꺼낸 까닭은 지금의 상황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의 적인 윤호라는 인물이 저기 있는 두 남녀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죠.”
“이런 미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히후미의 말에 상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상한 오해를 사는 것만큼은 피해야 했다.
“칸디르 님! 저희는 윤호라는 소환자와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굳이 연관을 찾자면 그가 우리와 같은 나라 출신이라는 것 정도입니다! 그것도 확실하지 않은 사실입니다!”
“마, 맞아요! 우리가 그 사람을 알 리 없다고요! 우리나라 인구수가 오천만인데 그 오천만을 누가 다 알고 있어? 그렇게 따지면 너는 일본 사람들 죄다 알고 있냐?! 일본 인구수가 1억 넘지? 그 1억 명 이름 다 대봐! 이 자식아!”
상민과 흥분한 유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 둘의 말에 주위 소환자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칸디르는 침착한 표정으로 말을 꺼낸 일본 소환자와 상민과 유진 그 두 소환자를 바라보았다. 그 둘의 말이 맞았다. 일본 소환자의 말처럼 따진다면 천족들 역시 자신들의 세력을 이루는 구성원 모두를 알고 있어야 했다.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인연의 끈이 희박한 확률도 이어질 수 있다고는 하지만…….’
가능성이 너무 낮았다. 더욱이 둘의 반응을 보아하니 윤호라는 인물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였다. 어쨌든 그녀가 알고 있는 윤호의 전력은 엄청난 수준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소환자들에게는 전해지지 않은 정보지만 그녀의 정보망에 따르면 윤호의 힘은 블루 스케일의 국력을 뛰어넘는다고 밝혀졌다.
자신과 같은 10 천사 정도의 수준이라는 말이었다. 단순히 영토만 넓은 게 아니었다. 군사력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는 최근 두 번의 전투를 통해 칸디르도 느끼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윤호가 천족에 귀화하기라도 한다면 블루 스케일을 점령하는 것은 물론 인간들의 팔 왕국 중 반 수 이상을 자신들의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이번 전쟁을 굉장히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소환자 박상민, 그리고 김유진. 그에게 여신 라헬님의 믿음을 전파할 수 있겠습니까?”
칸디르가 손깍지를 끼며 말했다. 큰 기대는 없었다. 하지만 소환자들 중 몇몇에게는 자신들이 모르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 칸디르는 그게 소환자들만의 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소환자들의 감은 지금의 상황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낼지 몰랐다.
그런 칸디르의 말에 히후미를 향해 삿대질을 하던 유진이 입을 다물었다. 상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난처한 표정을 짓던 둘이 서로를 바라보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그게…….”
“불가능 할 것 같습니다. 정말로 저희와는 전혀 연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맞아요. 같은 나라 출신이라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대답을 하며 상민과 유진은 적의를 담아 히후미를 노려보았다. 저 빌어먹을 녀석이 되도 않는 얼토당토한 말을 꺼낸 까닭에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해버렸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아닙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한국인에게는 정이라는 게 있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자신들을 걸고넘어지는 히후미의 행동에 상민의 입이 쩍하고 벌어졌다. 유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 빌어먹을 쪽바리가 만들어내는 어이없는 상황에 말도 나오지 않는지 어버버하는 소리와 함께 손가락질을 하던 유진은 히후미를 향해 버럭하고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행동은 의지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정?”
천족의 사령관이자 10 천사 중 하나인 칸디르가 히후미의 말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칸디르의 관심에 용기가 솟아났는지 히후미는 한민족의 정이라는 것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과 포장을 더해 칸디르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마치 한국인들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를 버리지 않고 의지하며 함께하고 도와주는 존재로 착각할 정도였다.
“좆됐다.”
“아, 윤호나 저 새끼나. 도움이 안 되네.”
문제는 칸디르가 그 개소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전투 중에 저 새끼 사고사 시킨다.”
“저도요. 진짜 이게 뭐람.”
히후미를 바라보는 유진의 눈은 어느새 붉게 변해 있었다. 연신 거친 숨을 뿜어내는 게 칸디르가 이 자리에 없었다면 당장 무기를 들어 그에게 휘둘렀을 터였다. 결과만 말하자면 칸디르는 그런 히후미의 개소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행여 윤호를 설득하려고 해도 접근할 수 있는 수단이 없기 때문이었다.
히후미는 그런 칸디르의 반박에 전투 중 난전 상황에서 상대에게 접근하는 방법이 있다고 열을 올렸지만,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오히려 난전 상황에서 실버 문의 칼에 두 소환자가 죽을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그리고 칸디르는 그런 결과는 피하고 싶었다. 박상민과 김유진은 천족들 사이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유능한 소환자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칸디르는 윤호의 군대와 전면전을 벌이는 것은 승산이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군대를 뒤로 물렸다. 다행이 본토에서 해상을 통해 지원군이 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시간이 조금 필요하기는 했지만, 블루 스케일의 성을 방패삼아 방어전을 치르면 시간을 끄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본토에서 보내온 서신에 따르면 수송부대에는 다수의 마장기를 포함해 그녀의 전용기도 실려 있었다.
“화이트 윙만 도착하면.”
10 천사의 전용기는 모두가 천족의 A등급 마장기인 세인테르 등급이었다. 그런 세인테르 등급 마장기는 전쟁의 천사라는 위명으로 적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으로 잘 알려져 있었고, 칸디르의 화이트 윙 역시 인간들 특히 골든 크로우와의 전쟁에서 수많은 승리를 가져다 준 적이 있었다.
“믿기 싫은 사실이지만 적들의 능력은 우리보다 강력합니다. 로얄 소벨리온 들만으로는 실버 문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필히 마장기의 지원이 있어야 합니다.”
“회전이 벌어질 수 없는 곳을 전장으로 삼아야 합니다. 윙드 훗사르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서죠. 비행병을 통한 게릴라전으로 상대를 지치게 만드는 것도 괜찮습니다.”
“계속해서 시간을 끌 수 있다면 우리들의 승리입니다. 아이리스 성국의 군대가 모에드 왕국을 함락하기 직전입니다. 바라테이온에서 지원군을 보냈다고는 하지만 시간문제일 겁니다.”
전략과 전술을 짜는 참모부는 계속해서 들어오는 정보들을 토대로 호를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을 계획했다. 소환자들 역시 자신들이 아는 정보를 이야기하며 그들의 작전에 살을 보탰다.
다행인 것은 두 번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기 때문일까? 호의 군대가 더 이상 진군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런 호의 움직임은 천족들에게 있어서는 분명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