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
리그너스 대륙전기 220
천족의 대군이 블루 스케일의 해상 방어를 뚫고 그들의 영토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들려온 순간 아이리스 성국을 제외한 나머지 인간들의 국가들은 낭패한 기색을 보였다.
단단한 보병과 뛰어난 비행병 그리고 마법 사제들을 보유하고 있는 천족의 군대를 허약한 육상 전력을 지니고 있는 블루 스케일이 막아낼 수 있을 리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더욱이 블루 스케일에 상륙한 천족들을 이끄는 영웅이 천족의 10 천사 중 하나라는 소식도 들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왕국 연합은 블루 스케일을 위해 지원을 보낼 겨를이 없었다.
팔 왕국의 맹주인 골든 크로우는 엘프 왕국을 견제하는 한편 본국을 공격하는 천족들의 대공세를 막아내느라 정신이 없었고, 다른 나라들 역시 라헬교의 잔당을 토벌하거나 아이리스 성국의 공격을 막아내느라 병력의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블루 스케일의 북동쪽 평원에 상륙한 천족들의 군대는 손쉽게 블루 스케일의 군대를 물리치며 그들의 영토를 점령해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파죽지세와도 같았던 그들의 진군은 예상치 못한 군대의 등장으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띵동.
-<침착하라!> D랭크가 발동되었습니다.
-<지휘관이 독려> B+랭크가 발동되었습니다.
-<아크 스피릿> A랭크가 발동되었습니다.
-<전장의 노래> S랭크가 발동되었습니다.
스킬이 발동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벨소리가 호의 귀로 들려왔다. 이어서 하늘에서 빛 무리들이 화려하게 휘날리며 병사들을 감싸기 시작했다.
호의 클래스인 제네시스–전장의 마에스트로의 스킬이 발동한 것이다.
“가라! 너희들은 강해졌다!”
그리고 정면에 보이는 천족들을 향해 호가 적들을 향해 검을 내뻗었다. 정확히 말하면 엑스칼리버의 보조무기인 단검이었지만 효과만큼은 확실했다. 각종 스킬들이 적용되어 평소보다도 배 이상 강해진 실버 문들이 빠른 속도로 적들을 향해 달려 나가고 있었다.
“엘프와 인간? 다종족 군대가 어떻게?!”
“저건 시, 실버 문?! 호! 윤호의 병사입니다!”
“칫! 림드 산맥이 원군을 보낸 건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군대의 등장에 천족 영웅 하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이름은 칸디르. 천족을 대표하는 영웅인 10 천사 중 하나로 여신 라헬의 뜻을 이어받은 천족들의 여왕 라이프린의 명령을 받아 블루 스케일의 점령 임무를 부여받은 영웅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기묘한 상륙작전을 통해 블루 스케일의 영토에 천족 병사들을 상륙시켰고, 블루 스케일의 약한 육상 전력을 분쇄하며 어렵지 않게 목적을 달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군대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게다가 여타 블루 스케일의 병사들처럼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적도 아니었다.
“어떻게 할까요? 카디르님?”
호의 명성은 천족들 사이에서도 제법 널리 퍼져 있었다. 더욱이 수인 왕국 중에서도 호전적이며 뛰어난 전투력을 자랑하는 조인들이 호의 영토를 침입했다가 대패를 당했다는 소식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로얄 소벨리온을 전진시킨다. 마장기 편대 역시 곧바로 출진하도록.”
그리고 자신들을 향해 돌진해오는 호의 병사들을 보며 잠시 생각을 하던 칸디르가 명령을 내렸다. 정면으로 맞부딪치기에는 상대의 전력에 대한 정보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 힘 싸움으로 상대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해 볼 생각이었다.
칸디르가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마장기 전력 때문이었다.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상대의 마장기는 일개 편대로 고작 네 기에 불과했다. 전부 B등급 마장기였지만 그에 반해 그녀는 네 개 편대의 마장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숫자로만 따져도 열기 이상이나 차이가 났다.
“림드 산맥의 패자라는 명성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볼 수 있겠군.”
그녀의 눈동자가 호가 탑승한 것으로 파악되는 하늘색으로 도장된 인간들의 마장기 엑스칼리버로 향했다. 그리고 두 세력의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적들에게 세계수의 분노를!”
“호 님을 위하여!”
“호우!”
각종 버프로 인해 능력치가 상승한 실버 문들이 천족들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가로막는 거대한 방패를 든 병사들. 소벨리온에서 진화한 병종으로 천족의 S랭크 보병인 로얄 소벨리온 들이었다.
“물러서지 마라!”
“여신 라헬님의 이름으로 사도들을 처단하자!”
부대장으로 보이는 병사가 고함을 지르며 로얄 소벨리온들의 사기를 드높였다. 정면에서 실버 문 부대가 다가오고 있었지만 다들 눈동자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블루 스케일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둔 탓이었다.
고대의 로마 보병처럼 커다란 타워 실드로 진형을 갖추고 있는 로얄 소벨리온들의 방어는 바위만큼이나 단단해 보였다. 하지만 두 부대가 격돌한 순간 로얄 소벨리온들은 순식간에 부셔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멀리서 모습을 보던 호는 피식 입 꼬리를 들어올렸다.
“로얄 소벨리온의 방어 진형이 단단하기는 해도…….”
어디까지나 하위 병종들을 상대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실버 문을 상대로는 무리지. 녀석들. 처음 느껴보는 강력함 일거다.”
뭐, 육상 전력이 허약한 블루 스케일의 군대에게는 충분히 통했으리라.
‘그나저나…….’
골든 크로우와의 계약을 통해 블루 스케일에 지원했던 아벨리우스나 훗사르 부대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블루 스케일 측에서도 딱히 언급을 하지 않는 게 몇 번의 대패를 입으며 전멸 혹은 그에 준하는 피해를 입은 모양이었다.
어쨌든 로얄 소벨리온과 실버 문은 기본적으로 개개인의 능력 차이가 배 이상이 난다. 자세한 수치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매뉴얼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병사들의 능력이 그들을 지휘하는 지휘관 영웅의 통솔 및 무력 능력에 영향을 받는다지만 호의 통솔력은 무려 SS등급이었다. 게다가 버프까지 적용된 상황이었다.
겉으로는 로얄 소벨리온의 방어가 훨씬 단단해보여도 그들의 능력으로는 결코 실버 문을 막아낼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크아악!”
“뭐, 뭐얏?!”
실버 문의 돌파에 로얄 소벨리온의 방어가 유리 파편마냥 부서져 나갔다. 자신들의 생각 이상으로 쉽게 무너지는 방어선에 천족 지휘관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천족들에게 닥친 문제는 그뿐이 아니었다.
“가자!”
“히얏호!”
이어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지축이 울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기병창을 든 수인 기병대가 만들어내는 소리였다. 대오를 이루며 빠른 속도로 돌진하는 그들의 정체는 윙드 훗사르. 전장의 재앙이라 불리는 수인의 S+랭크 기병이었다.
이천 기 정도로 보이는 윙드 훗사르의 돌진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 선두에는 오늘의 전투로 전공을 세우려는 A등급의 수인 영웅이 있었다.
“와아아아아아아!”
“휘리이오! 삐리포!”
“날개를 펼쳐라아!”
그리고 다양한 기합소리와 함께 윙드 훗사르의 선두가 천족들의 군대와 부딪쳤다. 이어서 콰작하는 소리와 함께 괴상하게 몸이 구겨진 로얄 소벨리온들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윙드 훗사르의 돌진력을 온몸으로 받아낸 무모함의 결과였다. 곧이어 여러 고함소리와 함께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 피가 튀고 뼈가 부셔지는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천족과 호의 군대의 충돌. 순식간에 두 병력이 부딪쳤고, 전투가 시작됐다. 어떻게든 막아내려고 하는 쪽은 로얄 소벨리온을 주축으로 한 천족의 병사들. 그리고 뚫어내려고 하는 쪽은 실버문과 윙드 훗사르로 구성된 호의 병사들이었다.
병력의 수는 근소하게나마 천족들이 앞서고 있었다. 사 만의 병사를 이끌고 있는 호와는 달리 천족들의 병사는 물경 오만 오천에 달했다. 마장기의 수 또한 천족의 우세였다.
다만, 병사들의 질을 따지자면? 호의 완벽한 우위였다. 로얄 소벨리온이나 로얄 윙드 아쳐와 같은 S, A랭크의 병사들은 호의 병사들을 막아낼 수 없었다. 거기에 리치의 저주 마법까지 곁들여지니 수적 우위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엔젤들을 내보냇!”
상황을 불리함을 깨달은 칸디르가 재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잠시 후 천족 진영에서 마장기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엔젤과 엔젤 가디언으로 구성된 편대였다. 천족의 마장기들은 자신들의 대형을 유지하며 전장에 참가, 방어선을 이루기 시작했다.
“먹잇감이 등장했군!”
그런 천족 마장기들이 등장에 황금색 웨어 타이거가 포효를 터뜨렸다. 아군에 비교해 두 배 이상 많은 수였지만, 명령만 떨어지면 당장이라도 돌격할 기세였다. 호 역시 흥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B, A, B, A…….’
호의 눈앞으로 천족 마장기사들의 정보가 빠르게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10 천사 중 하나인 칸디르를 제외하면 S등급 영웅은 없었다. 나머지 천족 영웅들의 능력치는 평범함 그 자체. 수적으로 열세이긴 해도 충분히 붙어볼 만 했다.
“블루 스케일의 준비는?”
“칼로스 성에서 C 급 마장기로 구성된 1 개 편대가 출발했다고 합니다. 도착까지는 이십분 남짓 걸릴 거라고 합니다.”
“이십분씩이나?”
부하 영웅의 보고에 호는 쯧하고 혀를 찼다.
“그러니까 해상 전력 말고도 육상 전력에 투자를 했어야지.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설정이라고는 하지만 얘네들은 너무 극단적이란 말이야.”
그런 블루 스케일의 전력을 생각하면 천족들을 막아내며 입은 피해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태에 마장기 편대를 지원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 상황이었다.
“그럼 가자! 공격!”
호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빠른 속도로 돌진하던 황금색 웨어 타이거가 허공을 날아올랐고, 그대로 엔젤급 마장기를 덮쳤다.
“으아아?! 안 돼!”
근처에 있는 천족 마장기사들이 공격을 당한 아군을 보호하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웨어 타이거의 날카로운 발톱은 순식간에 마장기의 조종석을 곤죽으로 만들어 놓은 뒤였다.
투앙!
이어서 마력의 빛줄기가 전장을 가로지르며 천족의 마장기를 강타했다. 그 정체는 엑스칼리버의 대형 마력포 -MLC 였다. 순식간에 방어 마법이 펼쳐지면서 공격은 무위로 돌아갔지만, 마력포에 강타당한 마장기의 마장기사들은 그 충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적들을 포위해라!”
천족들도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었다. 칸디르의 명령을 받은 천족들의 B등급 마장기인 엔젤 가디언급 마장기들이 릴라릴라와 키마라이를 둘러싸며 공세를 가하고 있었다.
쾅! 콰아앙!
거대한 인형들이 서로 맞부딪치며 화려한 불꽃을 만들어낸다. 거대한 무기가 엉킬 때마다 소리의 충격파가 전장으로 흩어졌다. 마장기의 전투 만큼이나 병사들도 치열했다.
“공격! 우리의 이상향을 위하여!”
“호 님을 위하여!”
“For The HO!”
검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서너 개의 목이 달아난다. SSS랭크의 보병 실버 문이었다. 전설로만 내려오는 병종답게 그들은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는 공격들을 피하거나 처내며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적들의 목을 베어내고 있었다.
그런 실버 문의 무용에는 절로 기가 질릴 지경. 하지만 그런 무용을 보이는 실버 문은 단 한 명만이 아니었다.
“막아!”
소벨리온의 방어선 한쪽이 무너지며 실버 문들이 천족들의 진영 한가운데로 뛰어 들었다.
“크아아악!”
“아악!”
실버 문의 압도적인 공격으로 인해 순식간에 방어선이 무너졌고, 그 뒤를 윙드 훗사르들이 짓쳐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천족들이 마냥 당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쿠우웅!
아름드리나무 정도 되는 거대한 도끼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더니 그대로 세 명의 실버 문을 곤죽으로 만들어버렸다.
마장기가 등장하자 실버 문과 윙드 훗사르들은 재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천족 병사들의 지원을 받는 마장기의 위력은 높은 랭크를 지닌 그들로도 상대하기가 버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