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9
리그너스 대륙전기 219
“원군을 요청하면요? 그전에 들이닥칠 천족들의 병사들을 어떻게 막을 생각입니까?”
“그건…….”
“후우.”
대답을 잇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귀족들의 모습에 결국 세이라 클리퍼드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다른 때는 잘도 말을 하는 인물들이 지금의 상황에서는 벙어리라도 된 듯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토벌 사령관이었던 크로스 공작의 생사는 어떻게 됐습니까?”
“……후퇴 도중 사망했다고 합니다. 병사의 말에 의하면 그의 마지막은 용감했다고 합니다.”
세이라 클리퍼드는 떨리는 눈을 감았다.
총지휘관이 사망했을 정도의 대패다. 남은 병사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굳이 듣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때였다.
“아직 모든 게 무너진 것은 아닙니다. 천족들을 물리칠 방법이 있습니다.”
조용한 회의실을 울리며 누군가가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족들을 물리칠 방법이 있다고?”
“아니, 어떻게?!”
남자의 말에 모두들 놀란 표정으로 그를 주시했다. 남자의 이름은 스퀴드 수운다. 커틀라스 군항의 영주이자 블루 스케일의 백작 위를 지니고 있는 귀족이었다.
다른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세이라 클리퍼드의 시선 역시 그에게로 향했다. 블루 스케일의 귀족이란 귀족들은 모두 모여 있는 이 자리에서 헛말을 하지는 않을 터. 과연 어떤 방법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올 지 궁금했다.
지금의 난관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이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세이라 클리퍼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방법이죠? 수운다 백작?”
“지원을 요청하는 겁니다. 카틀라스 군항 남쪽에 위치한 패자 윤호에게로 말이죠.”
“아?!”
“윤호라? 오호라!”
자리에 모인 귀족들이 여러 표정을 지었다. 다들 한 번이라도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세이라 클리퍼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윤호.
한때는 마족의 소환자에 불과한 존재였지만 뛰어난 능력으로 자신만의 세력을 이끌고 독립. 현재는 림드 산맥을 거점으로 자신의 세력을 불려나가고 있는 영웅이었다.
“음. 확실히 그의 도움을 얻을 수만 있다면 우리 영토에 침입한 천족들을 물리칠 수 있을 겁니다. 수인 왕국, 엘프 왕국과의 전쟁을 경험한 윤호의 병사들은 상당한 정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물며 최근의 전투에서는 SSS랭크의 병종인 실버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정보도 있었습니다.”
한 노귀족이 말했고, 많은 수의 귀족들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강력한 세력들을 상대로 한 전쟁을 통해 제법 널리 퍼진 윤호의 명성에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 곳이 영토를 맞대고 있는 블루 스케일이었다.
하물며 블루 스케일과 윤호는 특산품 거래와 골든 크로우가 걸쳐져 있다고는 하지만 병력 지원 등으로 어느 정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이기도 했다.
“과연 그가 병력을 보내줄까요?”
세이라 클리퍼드가 귀족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마 몇 가지 요구는 들어줘야 할 겁니다.”
“몇 가지 요구라…….”
노귀족의 말에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당장 아쉬운 쪽은 자신들 쪽이다. 윤호라는 인물 역시 바보가 아닌 이상 그 점은 잘 알고 있을 터.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확실한 제안이 필요했다.
어느 정도의 희생이 필요하겠지만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세이라 클리퍼드가 스퀴드 수운다를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윤호에게 도움을 요청하자는 제안을 꺼낸 인물인 만큼 생각한 바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예상은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소환자 윤호는 제법 오래 전부터 마장기 제작기술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불가능한 소리요!”
“마장기 제작기술이라니! 그게 국가핵심기술이라는 것을 알고 말하는 소리요?! 스퀴드 수운다 백작!”
수운다 백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변이 시끌시끌해졌다. 크게 흥분한 귀족들과는 달리 별다른 표정 변화를 보이고 있지는 않지만 세이라 클리퍼드 역시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스퀴드 수운다 백작이 다시 입을 연 순간 모두의 흥분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블루 스케일이 천족들의 손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하물며 우리 블루 스케일의 마장기 제작기술은 다른 나라에 비해 뛰어난 편이 아니지 않습니까?”
“으음…….”
“큼.”
여기저기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해상 마장기 제작이라면 모를까, 육상 마장기면 C등급 마장기를 간신히 제작할 수 있는 나라가 블루 스케일이었다. 다른 종족들과의 비교는 물론이고, 팔 왕국 내에서도 가장 뒤떨어진 수준이었다.
“협상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닙니다. 마장기 제작 기술이 싫으시다면 조금의 영토를 넘겨주는 건 어떻습니까?”
“영토보다는…….”
“커흠. 땅보다는 그래도……. 어차피 우리가 마장기를 제작해 주는 것도 아니니.”
수운다 백작의 말에 다들 껄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현재의 난관을 헤쳐 나가기 위해 소환자에게 영지를 넘겨준다?
듣기 좋은 소리기는 했지만, 그 영토가 자신의 것이 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마장기 제작 기술을 넘겨주는 게 더욱 나았다.
‘어떻게 자신들이 나서서 천족들을 무찌르겠다고 하는 귀족이 한 명도 없는 거지?’
큼큼거리는 기침소리와 함께 다들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귀족들을 보며 세이라 클리퍼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넘겨보려는 그들의 모습이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외부 세력을 끌어들여서라도 어떻게든 천족들을 물리치고 자신들의 안녕을 유지하려는 생각일 터. 하지만 그 수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면 림드 산맥의 패자 윤호에게 사자를 보내겠습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세이라 클리퍼드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곧바로 블루 스케일의 사신이 림드 산맥을 찾았다. 호에게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디르시나의 북쪽에 위치한 요새도시 카틀라스 군항을 지배하는 인물인 스퀴드 수운다 백작이 자신의 참모인 똘레오와 함께했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수운다 백작은 곧바로 자신들의 상황을 설명하고 군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블루 스케일의 마장기 제작기술이었다.
“마장기 제작기술이라…….”
수운다 백작의 말에 호는 미적지근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자력으로 마장기를 제작하지 못하는 호에게는 블루스케일의 제안은 매력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예전의 일이었다. 엘 브릭을 필두로 한 연구팀 공돌이를 열심히 활용하면 마장기 제작 기술을 완료하는 것은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또한 계속된 마장기 관련 기술 연구로 인해 호는 마장기의 제작은 불가능해도 수리를 할 정도의 기술은 보유하고 있었다. 수치로 간단히 표현하자면 60% 가량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었다.
‘남은 40%의 기술을 얻기 위해 블루 스케일에게 병사를 보낸다?’
라헬교의 준동으로 인해 한창 내부 단속에 바빴던 호였다.
게다가 지금은 로우덴의 팀 심시티가 만들어내는 특성화로 인해 하루가 멀다 하고 급격하게 발전해 나가고 있는 도시들의 문제점을 해결하느라 눈코 뜰 새 없었다.
그리고 호의 얼굴에 나타난 떨떠름한 감정을 읽은 수운다 백작이 입을 열었다.
“마장기 제작 기술 뿐 아니라 C등급 마장기 다섯 대를 증정할 의향도 있소이다.”
림드 산맥으로 떠나기 전, 왕녀 세이라 클리퍼드는 수운다 백작을 불러 원활한 교섭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정해줬다.
일곱 대 이하의 C등급 마장기 제작 역시 그 내에 들어갔다.
그런 스퀴드 수운다 백작의 말에 디르시나의 영웅들이 다들 놀란 표정을 지었다. 탄성이 터져 나온다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다들 눈동자를 동그랗게 뜬 채로 블루 스케일의 사신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장기라.”
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의 제안은 제법 끌렸다. 호는 현재 서른 대가 조금 안 되는 마장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게 마장기라는 병기였다.
더욱이 마장기를 운용할 수 있는 B등급 영웅들이 넘쳐나고 있는 지금은 마장기사가 없어 마장기를 놀리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도와줄까? 어차피 천족들의 손에 블루 스케일이 넘어가도 문제이니.’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블루 스케일의 제안을 들어주기에는 뭔가가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그렇게 호가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일 때마다 스퀴드 수운다 백작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패를 계속해서 꺼내야만 했다. 무조건적으로 지원 병력을 얻어내야만 하는 만큼 밀고 당기는 상황은 나오지 않았다.
호도 크게 욕심을 내지는 않았다. 아직까지 블루 스케일과 척을 질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호는 마장기 제작 기술과 C등급 마장기 다섯 대 그리고 라헬교의 준동이 끝나면 나크 평원의 토리아 항구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병력을 보내기로 결정을 내렸다.
“누구를 데리고 가야 할지 고민이네.”
블루 스케일의 사신이 돌아가고 호는 휘하의 영웅들을 살펴보며 고민에 빠졌다. 한시진이나 로우덴 같은 고 등급 영웅들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임무가 있었다. 각 도시를 다스리는 영주들 역시 함께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천족들을 상대하는 마당에 어중이떠중이를 데리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도 큰 임무 없이 시간을 보내는 고 등급 영웅이 하나 있기는 했다.
“전쟁?! 당연히 간다! 그렇지 않아도 햇병아리들만 훈련시키느라 몸이 찌뿌둥했는데 아주 잘 됐어.”
열 살 남짓한 수인 소녀가 전의를 불태우며 외쳤다.
SS등급의 영웅이자 호의 영웅 중 가장 강력한 무위를 지니고 있는 영웅.
바로 브로리 발란스였다.
이어서 호는 휘하 영웅들의 능력치를 확인해 가장 뛰어난 영웅들로 하여금 릴라릴라, 키마라이, 엑스칼리버의 오너로 임명. 마장기 편대를 꾸리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실버 문, 아르카니움 아쳐, 리치로 구성된 병사들의 지휘관들도 임명해 점점 출진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시간이 조금 더 있었으면 마족의 A랭크 마법 병종인 리치 대신 S랭크인 할리온으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전쟁에 나설 수 있었지만, 블루 스케일의 상황이 풍전등화나 다름없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림드 산맥에서 원군이 오기까지는 블루 스케일은 오로지 그들만의 힘으로 천족들의 병사를 막아내야 했는데, 계속해서 상황이 좋지 않다는 소식만이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곧 원군이 온다! 어떻게든 천족의 진군을 막아!”
“크아아악!”
“후퇴! 후퇴해라!”
라그라만 후작이 이끄는 블루 스케일의 병사들이 천족들의 진군을 막아내기 위해 격렬히 전투를 벌이고 있었지만 상대가 되지를 않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본토에서 수송된 천족의 군대가 점점 더 규모를 갖출 무렵 호가 이끄는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출진한다!”
호의 명령과 함께 웨어 타이거형 마장기이자 브로리의 전용기인 골든 스테이트를 필두로 병사들이 디르시나를 출발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릴라릴라, 키마라이, 엑스칼리버 등 B등급 마장기 네 기로 이루어진 마장기 전력과 함께 SSS랭크의 병사인 실버 문이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디르시나에서 출진한 병력은 무려 사만이나 되는 숫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