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
리그너스 대륙전기 218
“이단자들을 모두 죽여라!”
“여신 라헬님의 이름으로 모에드를 정화하라!”
“빌어먹을. 저런 광신도 따위에게 당해야 하다니.”
모에드 왕국의 한 병사가 욕설과 함께 나직이 말했다.
“저 입 좀 닥치게 하고 싶다.”
“가능하다면 내가 진즉에 했지.”
멀찍이서 라헬교의 고위 사제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성벽을 방패로 몸을 웅크리며 있는 다른 병사들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다.
인간의 팔왕국 중 하나인 모에드 왕국은 군사력 측면으로는 그리 강력한 국가는 아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들의 한 축을 이루는 나라인 만큼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을 보유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전쟁 초기 국경 요새 비욘드가 아이리스 성국과 천족의 연합으로 인해 단숨에 무너진 게 타격이 컸다.
“기습만 아니었어도…….”
“그 광신도 새끼들을 같은 인간이라고 한 연합으로 묶은 게 잘못된 행동이었어.”
“비욘드 요새를 지키는 나라카스 백작도 멍청하지. 어떻게 비욘드 요새를 그렇게나 쉽게 내준 거지?”
비욘드의 주력 병력이 모여 있는 요새이자 아이리스 성국과 이어져 있는 방어선의 중추를 맡고 있는 요새 비욘드는 나라카스라는 이름의 백작이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비욘드 요새는 아이리스 성국의 공격이 시작되고 불과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었지만, 패잔병들의 말에 의하면 비욘드 요새의 수장인 나라카스 백작의 멍청함이 제법 큰 역할을 한 듯싶었다. 덕분에 모에드 왕국의 상황은 굉장히 심각한 편이었다. 아이리스 성국과 천족의 연합 병력에 제대로 된 대적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모에드 왕국이 가만히 있던 건 아니었다. 모에드 왕국의 대영주 몇몇이 마장기가 포함된 병력을 이끌고 광신도들을 물리치기 위해 직접 전투에 나서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강력한 회복 주문을 지니고 있는 천족들의 활약으로 인해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한 채 패퇴했다. 단숨에 목을 잘라내지 않는 이상 신성력으로 빠르게 육체를 치료하는 연합 병력은 자신들의 주특기를 발휘해 전투를 계속해서 난전으로 몰고 갔고, 모에드 왕국의 병사들은 이를 버텨낼 수가 없었다.
마장기나 대규모 범위 공격이 가능한 마법 병종이 필요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들의 지원이 필요했다.
“우와아아!”
“빌어먹을.”
광신도의 함성 소리가 공기를 찢어발기며 들려오자 한 병사가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광신도들의 몸이 노란 빛으로 은은하게 감싸여져 있었다. 천족들의 주문이었다.
“전 부대! 장전!”
궁병들이 사위에 화살을 메기기 시작했다. 적이 성벽에 붙기 전 최대한 피해를 수를 줄여야 했다. 어지간한 부상쯤은 회복 마법으로 치유해 버리는 만큼 단숨에 목숨을 끊어놔야 했다. 그래서일까? 궁병들의 표정이 딱히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모두들 물러서지 마라! 이곳 엔그람 성이 무너지면 곧바로 수도가 위험해진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려는지 젊은 귀족 영웅 한 명이 자신의 검을 높게 빼들며 외쳤다. 그렇지만 병사들의 표정은 딱히 좋아지지 않았다. 그렇게 공성전이 시작되었다.
* * *
[광신도, 엔그람 점령.]
디아린 상단의 상단주 디아린이 보내온 편지였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글씨가 종이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엔그람?”
호와 함께 편지의 내용을 살펴보던 아스트리드 벨이 물었다.
“모에드 왕국의 대도시 중 하나다.”
그리고 호가 심각한 표정을 답했다. 엔그람은 그냥 평범한 대도시가 아니었다. 모에드 왕국의 수도와 불과 사흘거리 밖에 되지 않은 곳에 위치한 도시였다. 결국 모에드 왕국군은 라헬교도들을 막아내지 못한 채 수도 근처까지 그들의 접근을 허용한 것이다.
‘아이리스 성국만의 전력만은 아니겠지.’
분명 천족들이 그 뒤에 있으리라. 그들이 어떻게 전투를 치렀는지는 보나마나 뻔했다. 단단한 방어력을 지닌 성기사들이 전방에서 상대를 몰아붙이고 그 뒤에서 천족의 병사들이 각종 마법으로 보조를 했으리라. 실제로 천족을 플레이하는 많은 유저들이 가장 즐겨 쓰는 전술이었고, 종족의 특성을 잘 살린 효과적인 전술이기도 했다.
당연히 호는 그런 천족의 병력은 가볍게 막아낼 수 있었다. 뛰어난 마장기사와 고 등급 마장기는 물론이고, 광역 범위 공격이 가능한 마법병 리치를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에드 왕국은 그렇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이리스 성국이 모에드 왕국을 점령할까요?”
“지금까지의 상황만 보면 어렵지 않은 일이겠지.”
벨이 묻자 호가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의 상황만 놓고 보자면 모에드 왕국군은 중심을 잡지 못한 채 무너지고 있었다. 블루 스케일의 함대가 몇 번이나 천족의 함대를 격퇴하며 그들의 도발을 막아내고 있는 것과는 다른 모양새였다.
“그렇다면 모에드 왕국이 천족들의 손에 넘어가는 것이로군요.”
“아니, 그렇게 쉽게 되지는 않을 거야.”
말과 함께 호는 인간 왕국의 영토가 그려져 있는 지도를 펼쳤다. 모에드 왕국은 아이리스 성국을 포함해 블루 스케일, 골든 크로우, 미피츠, 바라테이온과 영토를 맞대고 있었다. 팔 왕국 중 반 수가 넘는 국가와 영토를 맞대고 있는 나라로 교통의 요지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모에드 왕국이 무너지면 라헬교의 광신도들이 어디로 향할지 아무도 알 수가 없어. 게다가 천족들과의 양동 공격을 당할 수도 있지. 특히 골든 크로우의 목이 서늘할 거야.”
호의 말에 지도를 본 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팔 왕국의 수장인 골든 크로우는 넓은 영토만큼이나 경계를 맞대고 있는 적들도 많았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세력이 바로 천족이었다. 그렇기에 모에드 왕국이 점령당하기 전 골든 크로우를 비롯한 인간들의 군대가 나설 거라는 게 호의 생각이었다.
골든 크로우만이 아니었다. 육상 전력이 허약한 블루 스케일의 왕성은 지금쯤 난리가 났을 게 분명했다. 강력한 해상 전력으로 바다에서는 이길 수 있겠지만, 모에드 왕국을 통해 쳐들어오는 아이리스 성국의 광신도들은 막을 수 없을 게 뻔했다. 다른 왕국들 역시 비상이 걸렸으리라.
‘그나마 피해가 이 이상으로 번지지 않는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호는 자신이 플레이했던 게임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지금의 과정만 보면 라헬교의 준동 이벤트는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라헬교가 제대로 준동을 하면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혼란이 일어났을 터였다.
모에드 왕국의 요새 비욘드가 순식간에 무너진 것을 보면 아마 요새 내부의 라헬 교도들이 무언가를 했을 게 분명했지만, 모에드 왕국이 박살 나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크게 눈에 띄는 피해가 없었다.
자신의 영토에서도 라헬교도들은 축출된 상황. 라헬교도로 인해 예상치 못한 피해가 일어날 가능성은 극히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리스 성국과 천족으로 이루어진 광신도들의 군대는 모에드 왕국을 점령하기 위해 매섭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만약 인간들의 왕국이 연합군을 편성하지 않는다면 광신도들의 손에 넘어갈 것은 분명해 보였다.
실제로 리그너스 대륙전기 게임 내에서 라헬교도의 준동 이벤트가 성공하면 다른 인간들의 왕국 역시 모에드 왕국과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대적인 침공에 군사 강국인 골든 크로우나 바라테이온 정도만이 이겨낼 뿐 나머지 왕국들은 큰 피해를 입거나 천족들의 손에 떨어졌다.
‘그리고 인간들의 거대한 영토를 손에 넣은 천족들은 급속도로 발전, 대륙을 제패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세력을 급부상하지.’
어찌되었든 지금의 상황만 놓고 보면 딱히 우려할 정도는 아니었다. 모에드 왕국이야 조금 고통스럽겠지만, 다른 왕국들은 가만히 있지 않을 테고, 나크 평원으로 이어지는 천족들의 뱃길 역시 블루 스케일이 알아서 잘 막아주고 있었다. 엘프 왕국과 수인 왕국의 움직임 역시 조용했다.
라헬교의 준동으로 화들짝 놀라 자체적으로 내부 단속을 벌이는 것으로 추정하고는 있지만,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군사적으로 움직임을 보이는 모습은 없었다.
“할리온의 연구 상황은 어때?”
“뼈 갑주의 연구가 진행되고 있어요. 현재 75% 가량의 진척을 보이고 있고요.”
아스트리드 벨의 대답에 호는 고개를 주억였다. 이름만 듣자면 강력한 기사로 느껴지는 할리온은 의외이게도 마족의 S랭크 마법병의 이름이었다. 리치의 상위 병종인 이들은 뼈의 창을 이용한 공격으로 전장에 강력한 공격을 가하는 한 편, 상대의 능력을 감소시키는 저주 계통의 마법도 사용할 수 있었다.
‘이렇게 계속해서 순조롭게 마법병의 연구도 완료하고…….’
영웅들의 수 역시 늘어나면 조금씩 다른 세력의 영토 또한 도모할 수 있었다. 이어서 마장기의 생산 체제까지 갖춰지면 대륙을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는 것이다.
어쨌든 라헬교의 도발로 시작된 이번 이벤트에 호는 한 발 걸칠 생각이 없었다. 천족과 인간의 맞대결이나 다름없는 상황에 괜히 끼어들어 자신의 전력을 소모시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 틈을 이용해 더욱 내실을 다지고 수인들을 조금씩 도모할 계획이었다.
각 부족의 연합체나 다름없는 체계를 가지고 있는 수인 왕국은 다른 종족의 영토가 공격당하더라도 크게 위기감을 느끼거나 한 종족을 필두로 꽁꽁 뭉치는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 세력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러한 특징으로 인해 많은 유저들의 가장 최우선되는 공격 목표기도 했다.
‘남쪽의 리셴르나가 걱정되기는 하지만…….’
암묵적인 동맹을 맺고 있기는 하지만 그녀 역시 수인. 언제 그녀의 군대가 아멘드마나 코르다로 향할지 몰랐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리셴르나는 현재 마족의 도발을 막아내는데 정신이 없었다. 커티삭을 빼앗긴 것에 대해 자존심이 상한 상급 마족인 볼 붸르니체스가 영토 근처로 병력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령 리셴르나가 칼끝을 겨눠 아멘드마나 코르다를 노려도 큰 문제는 없었다. 그 두 도시의 북쪽에 위치한 요새도시 토갈론에는 다수의 마장기를 포함해 많은 수의 실버 문이 주둔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한 발 벗어나 영지의 내실을 다지려고 했던 호의 계획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어그러지고야 말했다.
[천족들의 해상 병력! 블루 스케일의 북동쪽 평원에 상륙.]
상선으로 위장한 천족들의 수송선이 블루 스케일 북동쪽 해안가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기 때문이었다. 블루 스케일의 입장에서는 제대로 허를 찔린 그야말로 기습과도 같은 수송 작전이었다.
* * *
불과 몇 천에 가까운 병력이었지만, 해안가를 통해 블루 스케일의 영토에 상륙한 천족의 병사들은 곧바로 블루 스케일의 조그마한 성을 점령, 그곳을 교두보로 삼아 본토의 병력들을 수송하기 시작했다. 뒤늦게 그들을 물리치기 위해 마장기가 포함된 블루 스케일의 군대가 출진했지만, 기묘한 천족들의 전술에 휘말려 대패를 당하고야 말았다.
“이대로라면 우리의 영토가 천족들의 손에 짓밟힐 겁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지원을 요청해야 합니다!”
블루 스케일의 왕성 내에서 한 노귀족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귀족들 역시 비슷한 생각인 듯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골든 크로우가 여력이 있을까요? 그들의 주력은 모에드 왕국으로 향한다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천족들의 대대적인 공세도 시작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렇더라도 골든 크로우에 사신을 보내야 합니다. 그들만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폐하. 더욱이 폐하께서는 골든 크로우의 지배자 이레네 아르티아와 혈연으로 연결된 관계이시지 않으십니까? 골든 크로우는 우리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폐하. 당장 원군을 요청해야 합니다.”
“…….”
귀족들의 이구동성에 블루 스케일의 여왕 세이라 클리퍼드는 가늘게 눈썹을 찡그렸다. 천족들의 군대가 영토에 상륙했을 뿐인데, 나라가 휘청거리고 있었다. 해상 쪽에서는 연신 승전보가 들려오는 상황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게 그녀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천족들은 방어선이 갖춰진 북동쪽 해안을 통해 병사들과 마장기를 수송하고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