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
리그너스 대륙전기 217
라헬교. 여신 라헬만이 이 세계의 구원자라고 믿는 이 광신도들이 평온했던 림드 산맥에 나타난 것은 그리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라헬교도들의 등장에 림드 산맥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은 큰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자신의 야생성에 굴복하는 것은 미개한 존재만이 하는 행동입니다. 여신님을 믿으셔야 합니다!”
“세계수는 우상입니다! 여신 라헬님을 믿으셔야 합니다!”
“라헬 믿으면 천국가고! 다른 놈 믿으면 지옥 간다!”
라헬교 만이 진리라고 믿는 광신도들은 다른 종족의 문화나 특성을 전혀 이해하려고 들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들만이 선이며 라헬 이외의 존재는 악이라고 규정지었다.
“여신 라헬님을 섬깁시다! 이상향 이라 불리는 알르드는 여신 라헬님의 품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아, 진짜! 라헬교 따위 안 믿는다고!”
자신들을 전도하려는 라헬교도들의 행태에 보다 못한 주민들이 자신들의 마을을 찾은 라헬교도들을 쫓아냈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고, 급기야 라헬교도들을 지킨다는 명목 아래에 성기사들까지 배치되었다.
“전지전능하신 어머니 여신 라헬님이여. 우리는 여신님의 유일한 종이나니…….”
“미친놈들…….‘”
견인 하나가 깍지 손을 끼고 기도를 드리는 광신도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상태는 척 봐도 정상적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있었다. 팔 하나가 반 쯤 잘려 덩그러니 있었고, 온몸 역시 멍투성이였다.
‘젠장할!’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라헬교도들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을 찾아와 강압적으로 포교를 하려는 라헬교의 행태에 분노한 그가 라헬교도를 밀쳤고, 그 모습을 본 성기사가 자신을 이렇게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나마 나은 상황이었다. 이 자리에 묶여 있는 수인들은 열댓 명가량. 그중 반 수 이상은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병사들만 있었어도.’
저런 광신도쯤은 단숨에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정신을 차리셨군요. 충성스러움으로 널리 알려진 견인 양반?”
견인 남성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기도를 마친 중년 남성이 자신의 눈을 반달처럼 만들며 말했다. 가식적인 그의 목소리에 견인 남성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상대의 얼굴에 자신의 손톱을 휘두르고 싶었지만, 팔을 묶고 있는 쇠사슬이 그의 행동을 막고 있었다.
“그런 충성이 라헬님에게 향하면 참 좋을 텐데요. 안 그렇습니까?”
“맞습니다. 비록 이 자가 무례를 범하긴 했지만, 여신 라헬님께서는 아주 관대한 분이신 만큼 여신 라헬님을 섬긴다면 충분히 용서를 하실 테지요.”
라헬교를 믿는 한 수인이 중년 남성의 말을 받으며 웃음을 터뜨린다. 그 모습을 보며 견인은 얼굴을 와락 구겼다. 저 꼴불견에 한 마디를 날리지 않는다면 평생을 후회할 것 같았다.
“이 미친 개새끼야!”
푸악!
반 쯤 잘려져 있던 팔이 그대로 끊어져 나갔다. 그와 함께 쇠사슬에 묶인 견인족의 몸이 크게 출렁였다. 그리고 견인족의 팔을 잘라낸 남성이 그를 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뭐라고 말하는 거야? 이 짐승만도 못한 것이? 이 세계에서 살아가라면 여신 라헬님을 모셔야 한다는 거 몰라?”
“크……. 크으윽으.”
“당연히 모르겠지. 클클. 상대는 교화도 되지 않은 미개한 짐승이잖아?”
또 다른 라헬교도가 이죽거렸고, 견인 남성은 자신의 이빨을 드러내는 것으로 분노를 대신했다. 그 때였다.
“어. 나는 그런 거 모르는데?”
“헛?!”
“누구냐!”
소름이 끼칠 만큼의 차가운 목소리에 라헬교도들이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그런 라헬교도의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하. 이것 참 어이가 없네. 감히 나의 영토에서 내 영지민을 죽여?”
호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와 함께 실버 문들과 에머넌스 아쳐들이 라헬교도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그리고 라헬교도들의 손에 죽어 있는 영지민들의 모습에 분노하는 것은 호만이 아니었다. 곧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병사들이 자신의 무기를 꺼내들기 시작했다.
“우, 우리를 공격하면 아이리스 성국과 천족이!”
한 성기사가 다급하게 양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대로 전투가 벌어지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러나 성기사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호의 검이 바람처럼 그의 목을 훑고 지나갔다.
“모조리 죽여.”
어차피 천족과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 굳이 자비를 베풀 필요는 없었다. 더욱이 상대는 갱생도 되지 않는 라헬교도들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라헬교도의 손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수인 남성을 호를 향해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가 입은 피해는 처참했다. 양 손을 잃었고, 친구들을 잃었다.
이렇게 림드 산맥의 영지민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끼친 라헬교도들을 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처참하게 영지민들이 죽은 모습이 호의 눈에 들어왔다는 게 문제였다.
“죽여라!”
“반항하면 그대로 사살한다! 상대는 영지민들을 죽인 적들이다!”
각 도시에 명령이 떨어졌고, 호의 명령을 받은 영주들은 도시의 치안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소수의 병사들을 제외한 나머지 병사들로 하여금 라헬교를 토벌하기 시작했다. 이미 라헬교도들의 잔인한 행태가 영지에 널리 퍼진 상황인지라 그들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다.
자신들을 토벌하기 위해 고 랭크의 병사들은 물론이고, 마장기까지 모습을 드러내자 포교를 위해 호의 영지로 넘어온 라헬교도들은 도망을 가거나 외딴 곳으로 자신들의 몸을 숨겨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라헬교를 적대시하는 영지민들은 라헬교도들을 발견하자마자 곧바로 신고를 했고, 눈 깜짝할 사이에 병사들이 그들을 덮쳤다.
결국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병사들을 향해 무기를 겨누거나 영지민들을 약탈하며 도망을 가는 수밖에 없었다.
띵동.
-도적떼로 변한 라헬교도들이 토벌되었습니다.
-도시 해머스를 덮친 라헬교 무리들이 토벌되었습니다.
“빌어먹을 놈들.”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들을 보며 호는 욕설을 내뱉었다. 자신의 영지를 찾은 라헬교도들로 인해 영지가 엉망이 되고 있었다. 크게 피해를 입은 것은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영지민 몇이 죽은 정도다. 하지만 호는 자신의 영지민이 다른 존재에 의해 죽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욱이 상대는 호가 이 세계에서 가장 싫어하는 여신 라헬만을 추종하는 이들이었다.
“해머스에 나타난 도적떼들을 처리했다는 보고입니다.”
병사의 보고에 호를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메시지를 통해 확인한 내용이었다. 호의 병사들은 라헬교도를 가리켜 도적떼 혹은 산적떼로 칭하고 있었다. 그들의 행태가 그와 비슷했으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쨌든 자신의 영토에 나타난 라헬교도를 쓸어버리는 데는 크게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림드 산맥 뿐 아니라 나크 평원, 토갈론 요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걸리는 게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천족이나 아이리스 성국의 동태는?”
“딱히 천족의 움직임이 포착된 것은 없어요. 다만 아이리스 성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요. 무력을 써서 라헬교도들을 몰아내고 있는 것에 대해 해명을 요구하고 있어요.”
“왜? 라헬교도들이 우리 영지민을 죽인 것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그런 이야기는 없었던 것 같아요.”
“역시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이라는 건가?”
호의 말에 아스트리드 벨은 어깨를 살짝 으쓱이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블루 스케일 쪽에서 비밀리에 전령을 보내왔어요. 아이리스 성국의 국경으로 군대가 배치되고 있다고 해요.”
“설마 우리를 노리는 건 아니겠지?”
아이리스 성국의 군대가 림드 산맥으로 넘어오려면 모에드 왕국과 블루 스케일이라는 두 왕국을 거쳐야 했다. 당연하겠지만 이 두 왕국이 길을 내줄 리 없었다. 같은 인간족의 팔 왕국이라고는 하지만 아이리스 성국이 천족과 붙어먹었다는 것을 모르는 지도자는 아무도 없었다.
“생각해보니 오히려 쳐들어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아이리스 성국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호는 자신의 전력 역시 그 못지않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한시진, 브로리, 아쉬카로트와 같은 뛰어난 마장기사들도 여럿 있었고, 병사들의 질에서는 충분히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근거도 충분했다. 블루 스케일이나 수인, 엘프, 천족의 경우로 말미암아 이 세계 종족들의 기술력은 호의 기준으로 봤을 때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아이리스 성국 역시 크게 차이나지는 않을 터였다.
더군다나 아이리스 성국은 국력만 따져봤을 때 팔 왕국 중 하위권에 불과했다. 천족이 끼어들면 제법 귀찮은 상황이 벌어지긴 하겠지만, 상황이 그 정도까지 흘러가면 나머지 칠 왕국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을 터였다. 충분히 한 판 붙어볼 만 했다.
더욱이 라헬교의 준동 이벤트를 막기 위해서는 라헬교도들의 세를 줄일 필요가 있었다. 림드 산맥이나 나크 평원에 있는 라헬교도들은 시간만 흐르면 그 씨를 말려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벤트를 실패로 만들기 위해서는 칠 왕국에 있는 라헬교도들의 수를 줄여야만 했다.
그렇게 라헬교의 등장 이후 잠시나마 느슨해졌던 영지들이 분주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더욱이 라헬교를 핍박했다는 이유로 아이리스 성국이 호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조금씩 퍼져 나가고 있었다.
“뭐?! 그 광신도 들을 쫓아냈다고 우리 호 님을?!”
“이런 마족! 아, 미안 실수. 쉬벌! 이런 썩을 놈들이!”
그리고 그런 소문을 들은 영지민들이 라헬교를 향해 분통을 터뜨린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곧바로 림드 산맥의 축적된 리스와 특산품들이 군사력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최고급 병영에서 훈련된 실버 문들이 한 부대씩 국경으로 배치되기 시작했고, 에머넌스 아처와 훗사르의 업그레이드 병과인 S+랭크의 윙드 훗사르 그리고 마족의 A랭크 마법병인 리치까지 모습을 드러내었다.
드워프의 상단인 타임리스 상단도 림드 산맥을 방문했다. 조인과의 전투에서 노획한 마장기 잔해들을 판매하는 한 편, 계속된 전투로 인해 내구도가 떨어진 마장기들을 수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계속된 연구로 인해 C등급 마장기 정도는 호의 기술로도 수리할 수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B등급과 A등급 마장기의 수리는 아직 무리였다.
“여신의 종인 라헬교도들을 살해한 소환자 호는 죄 값을 치러라!”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호와 아이리스 성국과의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아이리스 성국은 라헬교도를 몰아내고 그 와중에 그들의 목숨을 빼앗기까지 한 호를 적대세력으로 간주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심지어 주변 왕국들에게 힘을 합쳐 호를 공격해야 한다며 하루가 멀다 하고 사신을 보낼 정도였다.
물론 주변 왕국들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SSS랭크의 병종인 실버 문을 비롯해 다수의 마장기를 보유하고 있는 호를 공격하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러웠을 뿐 더러 광신도와 같은 라헬교도들로 인해 피해를 받았던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아이리스 성국만이 목소리를 높인 채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상황에서 결국 사단이 일어났다.
“모두 정렬! 이것은 성전이다! 여신 라헬의 이름을 더럽힌 적들을 모조리 죽여라!”
“모두 죽여라!”
“여신 라헬의 이름으로!”
거대한 폭음과 함께 모에드 왕국의 국경 요새인 비욘드가 아이리스 성국의 병사들에게 공격을 당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펑! 퍼펑!
멀찍이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함께 수많은 포탄이 블루 스케일의 함선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공격을 받고 있는 함대는 도베르만 제독이 지휘하는 블루 스케일의 1함대였다.
“처, 천족입니다!”
“엔젤 가디언이다! 천족의 B등급 마장기입니다!”
“이노옴! 감히 해상에서 우리를 공격해? 요즘 라헬교 때문에 말이 많더니만 천족들이 겁 대가리를 상실했군. 돌핀들을 준비시켜라!”
병사들의 보고를 받은 도베르만 제독이 자신의 무기를 챙기며 명령을 내렸다.
토리아 항구를 거점으로 삼아 북쪽의 로쉬 해협 수비를 맡고 있는 그의 1함대는 몇 번이나 천족의 도발을 물리친 적이 있었다. 게다가 최근 아이리스 성국의 동태가 심상치 않은 터라 어느 정도 준비를 하고 있던 상황.
갑작스럽게 기습을 당했다면 모를까, 정면에서 펼쳐지는 해상전은 블루 스케일을 당해낼 자가 없었다.
하지만 선제공격을 당한 모에드 왕국은 상황이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