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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너스 대륙전기-216화 (216/522)

# 216

리그너스 대륙전기 216

로우덴이 SS등급 유니크 클래스 ‘세계를 손아래에 둔 책사–제갈공멍’으로 승급을 하고 난 후 정확히 8 일 뒤, 엘 브릭 역시 A등급 영웅이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엘 브릭도 S등급까지 올리고 싶었는데.”

B등급 영웅이었던 시절과 비교해 큰 폭으로 상승한 엘 브릭의 능력치를 보며 호가 아쉬운 목소리를 담아 말했다. 하지만 이는 당장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에디터가 있다면 모를까, A등급 영웅을 S등급 영웅으로 승급시키는 데는 특수한 재료들이 필요한 경우가 많았고, 이를 구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어쨌든 로우덴과 엘 브릭을 승급시키기로 한 호의 결정은 결과적으로 굉장히 탁월한 선택이었다.

“대체 어떻게 작업을 하는 거지!? 고작 일주일 만에 폐허로 변했던 장소에 건물이 올라오다니!”

“도로도 깨끗하게 깔렸어! 이, 이들은 작업의 신이 분명해!”

전에도 빨랐던 영지의 개발 속도가 거의 배 이상의 효율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 여파로 리스와 자재의 소모 속도 역시 급속도로 빨라졌지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디르시나를 비롯해 특성화 개발이 얼추 끝난 림드 산맥의 생산량은 한 부대에 수천만 리스나 필요한 실버 문들을 계속해서 양성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로우덴의 팀 심시티만큼이나 공돌이 역시 제 역할을 잘 해주고 있었다. 더욱이 엘 브릭이 A등급 영웅으로 승급한 이상 연구 개발 속도는 더욱더 빨라질 터. 호는 몇 년 아니 일 년 내로 마족의 SSS랭크 병종 브리헤아 비쉬의 양성이 완료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후후. 매일 요즘만 같아라.”

“만약 그랬다가는 저는 몇 년 내에 죽고 말거예요. 그것도 과로사로 말이죠. 오늘은 어디 안 나가요?”

그렇게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집무실에 흥얼거리던 호의 책상 위로 아스트리드 벨이 서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어디? 딱히 갈 곳은 없는데. 왜?”

“네. 최근 이 세계의 영웅들을 위해 분주하게 돌아다녔잖아요. 다른 종족의 영토도 가고 말이죠.”

“일단 목적했던 것은 달성했으니까. 딱히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은 디르시나에 머물 생각이야. 아, 영지의 업무도 열심히 해야지.”

피곤이 가득한 벨의 얼굴에 호는 화제도 돌릴 겸 그녀가 내려놓은 서류 가장 윗부분을 스윽 들어올렸다.

“민원?”

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림드 산맥의 패자가 된 이후 민원이라는 것을 해결할 일이 많지 않았기에 조금은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대부분의 민원은 호의 집무실로 올라오기 전 다른 영웅들이 해결했기 때문이었다.

“나한테 직접 올라올 정도면 제법 심각한 사안인가 본데? 몬스터라도 등장했어?”

“몬스터가 등장했으면 당신에게 서류를 올렸을 리도 없죠. 실버 문들만 보내면 되는 일이잖아요.”

“하기야 그렇긴 하지.”

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자신에게까지 올라온 것을 보면 영주 대리인 벨의 권한을 뛰어넘는 사안인 모양이었다.

“이게……?!”

그리고 민원의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호는 그대로 종이를 구겨버렸다. 민원의 내용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무려 라헬교와 관련이 있는 내용이었다.

“라헬교? 이 세계의 여신을 믿는 종교인 모양인데, 최근 림드 산맥에 관련 종교인들이 와서 포교를 하는 모양이에요.”

“…….”

“그런데 그 포교가 조금은 강압적인 것 같아요. 포교를 거부한다고 했다가 물질적으로 피해를 입고 하소연을 하는 시민들이 조금씩 늘어나는 형편이에요.”

“그렇겠지. 그 빌어먹을 사이비 녀석들은 그런 존재들이니까.”

벨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떻게 라헬교가 우리 영토로 들어올 수 있게 된 거지?”

“포교를 한다는 이유로 카틀라스항을 통해 넘어온 것 같아요. 딱히 해가 될 일이 아닌 터라 다들 막지 않은 것 같고요.”

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래서는 안 된다. 라헬교도는 종교인이 아니었다. 사이비와 종교는 분명 달랐다.

‘그나저나 카틀라스 항을 통해서 넘어왔다면…….’

블루 스케일 역시 라헬교로 인해 꽤나 골치를 썩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상황이 제법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분명 이대로라면 라헬교의 준동 이벤트가 일어날 테고 아이리스 성국이 천족의 도움을 받아 군사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들이 침략할 대상은 인간들의 팔 왕국이 분명했다. 그런만큼 블루 스케일과 영토를 맞대고 있는 자신도 대비를 해야 했다.

“다른 도시의 영주들에게 당장 연락해서 라헬교와 관련된 인물들을 모조리 쫓아내라고 해!"”

“네?”

“특히 경계도시의 영주들에게는 철저한 순찰을 통해 단 한 명의 라헬교도도 우리 영지를 찾지 못하도록 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요?”

호의 명령에 아무것도 모르는 벨이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한 표정을 이었다. 그녀의 입장에서 라헬교도들은 하나의 종교를 믿는 종교인일 뿐이었다. 하지만 라헬교의 정체를 알고 있는 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라헬교를 자신의 영토에 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라헬교는 그냥 종교가 아니야. 우리는 지금 라헬교, 그러니까 천족의 공격을 받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라고!”

그러나 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런 호의 반응에 아스트리드 벨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그런데 조금 전에 받은 연락인데요. 라헬교의 주교라는 인물이 디르시나를 찾아왔다고 해요.”

* * *

“여신 라헬의 축복을 받아 이 대륙에서 여신을 뜻을 전파하고 계시는 소환자를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호가 집무실에 도착하자 한 노인이 몸을 일으키며 호에게 다가와 말했다. 입가에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노인은 독실한 종교인과도 같은 묘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런 노인의 행동에 호가 작게 웃었다. 뭐라고 할까? 가면을 쓴 광대가 자신의 눈앞에서 연극을 하는 것 같았다.

‘라헬교의 주교라.’

호는 천천히 상대를 살펴보았다. 주교라면 낮은 지위의 인물은 아니었다.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라헬교를 믿는 많은 이들 중 주교의 지위를 받은 이는 열 명이 채 안 되는 걸로 알고 있었다.

‘무슨 이유로 나를 찾아온 거지?’

예전 유저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라헬교의 고위 사제들만이 가능한 임무들도 있다고 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천족을 플레이 한 적이 없던 터라 확실한 정보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오래된 일이라 자세히는 떠오르지도 않았다. 아니,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당연하겠지만 여신 라헬 때문이었다.

그런 탓에 호는 라헬교의 주교라는 작자가 하려는 말도 들을 생각이 없었다. 단지 호가 라헬교의 주교를 만난 것은 자신의 영지에 침입한 라헬교라는 적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하물며 라헬교의 고위 인물인 주교를 처리한다면 현재 팔 왕국의 영토에서 벌어지고 있는 라헬교의 준동 이벤트 역시 방해할 수 있을 지도 몰랐다.

“여신의 뜻을 전파한다고? 말이 좀 이상한데?”

호의 말에 노인의 인자한 미소가 살짝이나마 금이 갔다. 초면에 하대.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주교와 함께한 성기사들도 울컥했는지 몸을 움찔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호의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라헬교와 좋은 관계를 맺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시비를 거는 것도 거리낌이 없었다.

“우리 소환자들이 여신 라헬의 축복을 받았다고? 웃기는 소리. 오히려 저주를 받았겠지.”

“그, 그게 무슨!”

“소환자들에게 물어보면 백이면 백 다 그렇게 얘기할 걸? 안 그래? 조용히 잘 살고 있는 우리들을 이 이상한 세계로 끌고 온 게 그 빌어먹을 여신 라헬이니까.”

분노한 호의 목소리를 듣던 아스트리드 벨의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게 익숙한 상황이었지만, 그렇다 해서 과거를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건 호 님께서 잘 못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건 여신님의 축복입니다! 당신들은 여신 라헬님에게 선택을 받았다는 증거지요.”

“선택은 개뿔.”

호가 조용히 뇌까렸다. 하지만 그 크기는 집무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들릴 정도였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히더니 큰 한숨과 함께 좌우로 몇 번 흔들고는 정색한 얼굴로 주교를 노려보았다.

“이런 이상한 세계에 나를 끌고 와 놓고 뭐? 그게 축복이라고? 정신이 나간 거 아니야?”

“이 놈! 감히 여신님을 모독……!”

분노한 주교가 호를 때리려는 듯 들고 있는 지팡이를 치켜 올렸다. 그 순간, 호의 주먹이 주교의 얼굴을 후려쳤다. 멱따는 소리와 함께 주교의 몸이 바닥으로 널브러졌다.

“가, 감히 주교님을!”

“저 녀석을 잡아라!”

돌발적인 호의 행동에 성기사들이 분노한 표정으로 자신들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는 성기사만 있는 게 아니었다. 얇은 금속성과 함께 호를 호위하고 있던 실버 문들이 무기를 겨누며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런 녀석들이 감히 나의 영지를 침입해?”

그렇게 성기사와 실버 문이 대치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분노에 찬 호의 목소리가 집무실을 웅웅 울렸다.

“네놈이 여신님을 적대하다니!”

“모조리 죽여 버려. 저 빌어먹을 노인네도 함께.”

호의 명령에 성기사 한 명이 침음을 흘렸다. 상대는 결코 만만한 병사들이 아니었다. 엘프의 전설로 내려오는 실버 문들이었다.

챙강! 캉!

몇 번의 금속음이 집무실에 울려 퍼졌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성기사들은 실버 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주교라는 인물이 신성력을 발휘해 성기사들의 능력을 증폭시켰지만 전투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

띵동.

-라헬교의 주교를 공격했습니다. 라헬교와의 관계가 험악함으로 변합니다.

-라헬교의 주교를 죽였습니다. 라헬교와의 관계가 원수로 변합니다.

-천족과의 관계가 매우 나쁨으로 변합니다.

-여신 라헬의 눈동자가 당신을 주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기사들과 주교를 모두 처리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여러 메시지가 호의 눈앞으로 떠올랐다. 딱히 별 생각이 드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라헬교와는 적대할 생각이었고, 여신 라헬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성기사들과 주교가 실버 문의 손에 죽는 모습을 보면서도 제 자리에서 가만히 있던 아스트리드 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이 이상한 세계로 불려온 게 여신이라는 존재 때문이었던가요?”

“음.”

“다른 사람들이 괴물들의 손에 죽었던 것도?”

“물론이지. 다 알고 있던 거 아니었어? 선택의 신전에서 여신 라헬의…….”

호의 대답에 벨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표정에 당황함이 가득 나타난 것이 지금의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보였다.

“그 때는 제정신이 아니었죠. 솔직히 기억하고 싶은 과거도 아니잖아요?”

하지만 그녀 역시 이 세계에서 몇 년간이나 살아온 여인. 곧바로 상황을 파악한 벨이 매서운 시선으로 시체로 변한 라헬교들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 여신이라는 존재를 무찌르면 우리가 살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로군요.”

“……아마도? 하지만 정확히는 모르겠어.”

호는 고개를 저었다. 가상현실게임인 리그너스 대륙전기라는 게임은 그랬다. 라헬을 물리치면 진 엔딩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었다. 라헬을 물리쳐도 어떤 괴물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잠시 라헬교도들을 바라보던 호가 딱하고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멍하니 있을 시간이 없었다.

“실버 문과 훗사르, 에머넌스 아쳐로 이루어진 병사들을 편성한다. 적들은 라헬교도. 우리들의 영토에서 쫓아내는 것을 우선으로 하되 반항하면 죽여도 좋다.”

자신의 영토를 침입한 라헬교도들을 모조리 쫓아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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