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
리그너스 대륙전기 214
“천사님 저를 골라주세요!”
“아니에요! 저! 저를 선택해 주세요!”
앞전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소환자들 중 대다수가 그녀와 함께 하고 싶은 모습이었다. 결국 보다 못한 라헬의 음성이 선택이 신전에 울려 퍼졌다.
[순서를 바꾸는 게 낫지 않을까요? 라이프린?]
“여신님의 뜻이라면…….”
천족들은 여신 라헬을 모시는 사도. 라헬의 말에 라이프린이 살짝 무릎을 굽혔다 일어섰다. 그러고는 엘프 여왕 엘 유스타이사와 골든 크로우의 지배자 이레네 아르티아를 바라봤다. 쉐르난비체와 아르넨 리네의 경우처럼 선택의 순서를 바꾸기 위해서는 다른 지배자 중 한 명의 동의가 필요했다.
“내가 먼저 고르도록 하겠다.”
라이프린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골든 크로우의 지배자 이레네 아르티아였다. 이번 소환에서 인간들의 순서는 가장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이레네 아르티아는 라이프린이 모습을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소환자들만 골라서 사라졌다.
엘프 여왕 엘 유스타시아 역시 열 세 명의 소환자를 골라 자신의 영토로 향했다. 라이프린의 등장에 환영하던 소환자들을 골라야 했던 까닭일까? 엘프 여왕의 표정은 처음 등장과는 다르게 상당히 굳어져 있었다.
그렇게 모든 종족의 선택이 끝나고 선택의 신전에는 라이프린과 그녀를 호위하는 아크 엔젤, 그리고 남은 열 세 명의 소환자들만이 남아 있었다.
“저들을 데리고 프리테븐으로 가세요.”
“알겠습니다.”
라이프린의 명령에 아크 엔젤들은 남은 열 세 명의 인간들을 데리고 천족들의 수도 프리테븐으로 향했다. 그렇게 라이프린 혼자만 선택의 신전에 남아 있는 상황에서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신전 내부에 여신 라헬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라이프린. 계획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죠?]
그 목소리는 다른 종족의 지배자들이 함께했을 때 들렸던 목소리라도는 전혀 다른 간교한 뱀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분명 이상할 법 하지만 그 목소리를 듣는 라이프린의 행동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계획은 여신 라헬님의 뜻대로 진행되고 있사옵니다. 이미 인간들의 영토에는 라헬교의 신도들이 다수 잠입해 있습니다.”
아니, 얼굴의 가식을 벗어던진 듯 그녀의 표정은 괴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조금 전의 성스러운 느낌은 온데 간 데 없었다.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을 한 꺼풀 벗어던진 듯 흐느적거리는 움직임은 마치 창녀처럼 색기가 풀풀 나고 있었다.
[조금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라이프린. 나는 너무 오래 기다렸어요.]
“호호호. 고귀한 여신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라이프린이 요사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현재 인간들의 영토에는 라헬교의 신도들이 다수 잠입해 있었다. 그들의 역할은 라헬교의 포교. 아이리스 성국처럼 일곱 왕국의 국교를 라헬교로 만들려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물론, 잠입한 라헬교만 믿고 저지르는 일이 아니었다. 인간들의 팔 왕국 중 하나인 아이리스 성국에는 천족의 정예병들이 주둔해 있었다. 라헬 교를 믿는 신도들이 준동하면 그들은 라헬교도들의 보호라는 목적으로 천족들과 함께 인간 왕국을 제압하는 역할을 할 예정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이 빌어먹을 대륙을 차지하고 창조신의 봉인에 다가갈 수 있는 병사들이 필요해요.]
“라헬님의 명령에 충성할 병사들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습니다. 호호. 방금도 열 세 명의 병사들이 늘어났죠.”
[그런 허약한 녀석들은 필요 없습니다. 적어도 이 대륙의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는 존재여야 합니다. 아, 윤호라고 했던가요? 그 정도의 수준은 되어야 합니다.]
“안 그래도 이미 작업 중에 있사옵니다.”
라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라이프린의 혀가 자동으로 움직였다. 림드 산맥의 패자에 대해서는 각 종족들의 지배자가 그에 대해 호기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윤호라는 소환자의 영토에 라헬교의 신전을 세울 생각입니다.”
라이프린이 간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신 라헬의 뜻대로 그를 손에 넣으면 이 대륙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속도는 더욱 가속화 될 터였다.
* * *
외부적으로 큰 일이 터진 것은 아니지만 디르시나에 머물면서 호는 계속해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다. 각 영지에 있는 영웅들의 능력을 확인하는 한 편 그들의 성격 및 특성에 따라 새로운 임무를 내려주기로 마음먹은 터라 그에 따른 교통정리를 해야 했던 탓이다.
연구팀 공돌이에 관한 관찰도 빼놓지 않았다. 호는 팀 공돌이가 심시티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이 리그너스 대륙을 통일하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런 기대만큼이나 공돌이는 뛰어난 연구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현재 그들이 맡고 있는 연구는 후플후프 지팡이. 빗치위치의 상위 병종인 리치를 양성하는 데 필요한 연구였다.
“아, 전에 말했던 던전을 찾았다고 해요.”
호가 집무실에서 공략본을 보고 있던 와중 아스트리드 벨이 방문했다. 시빌 오피서 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호가 디르시나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에는 비서와 비슷한 역할을 자리를 비울 시에는 영주 대리를 맡고 있었다.
“던전?”
“그새 까먹었어요? 전에 말했잖아요? 기억 안나요? 초록 정원이라는 이름의 던전인데?”
“아!”
벨의 대답에 호는 탄성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공략본을 통해 초록 정원에 대한 정보를 확인했다.
<<초록 정원 -B등급 던전
등장 보스–타락한 식물학자 퓨리마인드, 포르기네이, 플라이트랩퍼 …… >>
“벌써 찾았단 말이야?”
“요새 근처에 거주하던 엘프들의 도움이 있었던 것 같아요.”
초록 정원. B등급의 던전으로 알려진 이 정원은 토갈론의 요새 근처에 위치한 던전이었다. 등급이 등급인 만큼 흔하면 흔하다고 볼 수 있는 던전이기도 했다.
벨의 말대로 호는 약 이주일 전 쯤 토갈론의 요새로 전령을 보내 초록 정원이라는 이름의 던전을 찾으라는 지시를 내렸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초록 정원을 공략하면 얻을 수 있는 초록빛 수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초록빛 수정. 엘프 영웅들을 A등급으로 승급하는 데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물품이지.’
슬슬 시현이의 주점인 멍멍아 야옹해봐에서 고용할 수 있는 영웅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다. 무희 계통인 한시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발견되는 영웅이 없는 것을 보면 이 근방의 영웅들은 모조리 고용되었다고 봐야 했다.
딱히 뛰어난 재능을 지닌 영웅은 없었지만 급격하게 늘어난 B등급의 영웅들은 영웅 부족으로 시달리는 호의 걱정을 크게 덜어주고 있었다. 최전방에 위치한 도시에 주둔하고 있는 마장기사들을 제외하더라도 적어도 각 도시마다 네다섯 명 이상의 영웅들이 배치된 상황이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수를 만족시켰으니 이제는 영웅의 질을 높여야 할 때였다. 그리고 리그너스 대륙에서 영웅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은 당연히 승급이었다.
‘로우덴과 엘 브릭.’
그리고 호가 가장 먼저 승급을 시키려고 생각하고 있는 영웅은 다름 아닌 팀을 이루고 있는 영웅들이었다. 브로리나 아쉬카로트와 같이 뛰어난 능력과 스킬을 보유한 고 등급 영웅들도 있었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로우덴과 엘 브릭처럼 팀을 이루고 있는 영웅의 등급을 올리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엘 브릭은 고작 B등급 영웅에 불과했다. 그만큼 승급에 필요한 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드워프 공방의 건설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대장간 계통의 상급 건물 중 하나인 드워프 공방은 특수한 장비들을 제작할 수 있는 건물이었다. 그렇게 제작할 수 있는 특수한 장비 중에는 로우덴을 승급시키는 데 필요한 강화된 미스릴 뼈다귀도 있었다.
“존스 홉킨스씨가 주도해서 하고 있어요. 공방 건설에 과할 정도로 열정을 쏟는 게 연구실에서 벗어난 게 굉장히 기쁜 모양이에요.”
“아무래도 종족 특성상 연구실에 틀어박히는 것 보다는 무언가를 만드는 게 체질일 테니까. 모르긴 해도 지옥에서 벗어난 느낌일걸?”
“그, 그 정도인가요?”
“물론이지.”
놀란 표정을 짓는 벨의 모습에 호가 가벼운 장난을 담아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못할 짓이기도 했다. 제작을 좋아하는 드워프를 몇 년 간이나 연구실에 꼼짝 못하게 박아놓았으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디르시나에 주둔하고 있는 영웅 중 연구에 관련해서는 그들이 가장 효율이 좋았다. 안타깝게도 연구실을 탈출한 존스 홉킨스와는 달리 또 다른 드워프인 레온 바티스타는 여전히 연구실에 있었다.
“골든 크로우의 영토에 있는 탄식의 평원에 진입할 수 있는 허가서는?”
“이미 그쪽에 문의를 넣었어요. 그쪽에서도 나쁘지 않은 반응을 보이는 게 허가를 받는 데 큰 어려움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탄식의 평원 진입 허가로 우리가 제공하는 리스와 특산품에도 제법 관심을 보이고 있고요.”
“골든 크로우와 좋은 관계를 맺은 게 다행으로 작용하는군.”
B등급에 불과한 엘 브릭과는 달리 S등급의 영웅 로우덴을 승급시키는 데는 굉장한 노력이 필요했다. 그중 하나로 로우덴의 승급에 필요한 아이템 중 프리스비는 골든 크로우의 영토에 위치한 던전에서나 구할 수 있었다. 당연히 그 장소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골든 크로우의 허가가 필요했다.
“정령들에게도 전령을 보냈지?”
“네. 하지만 그쪽에서는 별다른 대답이 없어요. 아무래도 우리들이 실버 문과 함께 자신들의 영토를 방문하는 게 탐탁지 않은 모양이에요.”
“콜치트리캄을 비롯해 각종 자원을 줄 테니 장난의 평원에 위치한 던전인 오장원에 진입할 수 있는 허가서만 내달라고 해줘. 다른 건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겠다는 말도 덧붙이고.”
“알았어요. 그렇게 전령을 보내볼게요.”
아스트리드 벨의 말에 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도 슬슬 준비를 해야겠군.”
초록빛 수정을 구할 수 있는 초록 정원은 디르시나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토갈론의 요새 근처에 있었다. 토갈론의 요새에 주둔하고 있는 영웅들에게 초록 정원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려 초록빛 수정을 구할 수도 있기는 했지만, 호는 자신이 직접 토갈론의 요새로 향할 생각이었다.
‘오랜만에 보겠는 걸?’
그리고 토갈론의 요새로 가기 위해서는 킬리드나 아멘드마와 같은 도시를 지나야만 했다. 오랫동안 얼굴을 보지 못한 엘 샤난과 같은 동료들이 영주로 있는 도시였다.
“영주님! 디르시나에서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골든 크로우에서 보낸 전령이 디르시나에 도착하면서 호는 자신의 계획을 대폭 수정해야만 했다. 골든 크로우의 전령이 가지고 온 서신에는 일정기간 동안 탄식의 평원 진입을 허가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시간이 조금 촉박해 보이는데……. 지금 당장 움직여야겠다.”
디르시나에서 곧바로 병사들이 소집되었다. 실버 문과 에머넌스 아쳐, 빗치 위치로 이루어진 병사들이 편성되어 출진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마장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탄식의 평원은 S등급의 필드형 던전. 강력한 몬스터들이 나타나는 만큼 마장기는 필수나 다름없었다.
호와 함께 탄식의 평원 정벌에 함께 할 마장기사는 메크링거와 케반스로 둘 다 B등급의 인간 영웅이었다. 인간들의 나라를 방문하는 만큼 조금이라도 위화감을 줄이기 위해 마장기를 인간 왕국의 마장기로 구성한 결과였다.
“자넷을 조종하는 건 오랜만인데? 엇?! 이렇게 하는 게 맞았던가?”
“큿! 이거 생각보다 쉽지 않은걸?”
안타깝게도 메크링거와 케반스는 딱히 마장기를 다루는 데 재능은 없어 보였다. 그나마 케반스가 나아보이긴 했지만 도긴개긴이었다. 그리고 호는 엉망진창에 가까운 둘의 마장기 조종술을 보며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어차피 실버 문도 있고 자신의 엑스칼리버도 함께 하니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차피 실버 문이 있는 만큼 마장기는 몸빵으로 써도 상관이 없었다. 게다가 탄식의 평원 전체를 청소할 것도 아니었다. 로우덴의 승급에 필요한 아이템인 프리스비만 획득하면 볼 일은 끝이었다.
“출진이다!”
그렇게 만칠천의 병력과 세 기의 마장기가 디르시나의 북쪽 카틀라스항을 통해 골든 크로우로 향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