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
리그너스 대륙전기 209
칙! 치이이익.
불이 켜진 것과 동시에 무언가가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희뿌연 연기를 내뱉은 인영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우리들이 빨리 움직여 줬으면 한다고?”
“그렇소. 우리가 괜히 당신네들에게 식량을 지원해 준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킥. 킥킥. 키익!”
“까아악! 깍!”
한 쌍의 날개를 지닌 천족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새들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런 울음이 비웃음으로 느껴진 탓에 천족은 속으로 조인들을 신뢰할 수 없는 녀석들이라고 낙인찍었다.
그리고 머리에 희뿌연 털이 난 늙은 조인족이 뻐끔 연기를 내뿜으며 입을 열었다.
“뭐, 천족들의 식량 지원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덕분에 페렛 습지대도 손에 넣었고.”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런 칭찬이 아니오.”
“알아알아. 급하기는.”
늙은 조인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마치 자신을 책망하는 것 같은 조인족의 뻔뻔한 행동에 천족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잠시 후 늙은 조인이 자신이 앉아 있는 의자에 한껏 몸을 기대고는 천천히 자신의 다리를 꼬기 시작했다.
“호라고 했던가? 그 녀석들의 세력이 최근 급속도로 커졌어. 나크 평원도 마찬가지지.”
“그건 당신들이 조금 더 빠르게……!”
천족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호의 세력이 급속도로 커진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조인들이 조금 더 빠르게 나크 평원을 침략했으면? 지금과 같은 결과는 일어나지 않았을 터였다.
“어쩔 수 없었다네. 정찰병을 보낸 파인플과 둠디스트에 배치된 마장기 전력이 제법이었거든.”
“음!”
“자네들이 지원해 준 식량이 도움은 되었다만 고작 그 정도로 우리들이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는 얘기지.”
“그래서 몇 달 동안이나 시간을 끈 겁니까?”
“시간을 끌다니? 이거 섭섭한 표현인 걸?”
늙은 조인이 천족을 향해 빙그레 웃었다. 그러고는 불을 붙였던 담배를 입에 가져다 대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이왕이면 준비를 했다고 표현해주면 좋겠는데 말이지.”
“준비라. 그렇다면 조만간 나크 평원으로 향하겠군요?”
“뭐, 조건만 맞는다면야.”
지저분한 탐욕이 묻어난 목소리와 함께 뿌연 연기가 회의실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천족은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이렇게나!’
자신을 조인족의 영토로 보낸 둠디스트의 관리자인 이루살의 예상이 너무나도 딱 들어맞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루살은 만약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경우…….
“식량을 더 지원해 주도록 하겠소. 그리고 가능하다면 우리 천족들의 군사가 페렛 습지대를 지나갈 수 있도록 허가해 주셨으면 하오.”
“음?”
“당신들이 나크 평원을 공격하지 않으니 우리들이 직접 나크 평원을 차지할 생각이요. 우리들이 지원하는 식량은 통행료라고 생각해주면 고맙겠소.”
천족의 말에 늙은 조인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방금 전의 말은 자신들을 무시하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까악! 깍! 한 마디로 우리들은 호 라는 녀석을 상대할 재량이 없으니 너희들이 직접 상대하겠다?”
“짹! 식량이나 먹고 떨어져라 이거냐!”
“꼬꼬댁! 감히! 우리 조인들을!”
사방에서도 살기가 치솟아 올랐다. 그 모습을 보며 천족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나 이 녀석들은 수인 중 에서도 가장 호전적이면서도 멍청한 녀석들이었다.
“식량 삼십 만 포대를 지원해 주면 바로 움직이지.”
“……십만 이상은 무리요.”
“그러면 이십 오만.”
“으음.”
늙은 조인의 말에 천족은 탐탁찮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천족의 영토는 오랜만의 대풍년으로 인해 식량이 남아돌고 있었다. 그런 식량 이십오만 포대로 나크 평원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충분히 남는 장사였다.
“대신 식량은 십 만 포대만 먼저 지원하도록 하겠소.”
“나머지 십오만은?"”
“당신들의 나크 평원 공략 상황을 보고 결정을 내리겠소이다. 이미 한 번 당한 게 있어서 말이지.”
“허허. 이거 우리를 믿지 못하는 군. 뭐, 어쩔 수 없지.”
늙은 조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며칠 뒤 주비어스에서 대량의 식량이 조인족의 영토로 수송되었고, 때맞춰 조인들의 군대가 그들의 영토를 지나 페렛 습지대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정보들은 페렛 습지대에 잠복한 다크 엘프들을 통해 둠디스트와 파인플에 있는 한시진과 아쉬카로트에게 알려졌다.
“조인족이?”
그리고 디르시나에서 소환자의 축복을 내리며 시간을 때우고 있던 호 역시 보고를 받고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콰앙!
“본 때를 보여줘야 합니다!”
한 남성이 책상을 거칠게 내려치며 말했다. 얼굴에 칼자국이 아로새겨진 남성은 디르시나에 거주하고 있는 B등급의 인간 영웅이었다. 남성의 말에 회의실을 가득 메운 영웅들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시현을 포함해 몇몇 영웅들이 회의실에 없기는 했지만, 그것에 신경을 쓰는 영웅들은 보이지 않았다.
“맞습니다. 수인의 군대쯤은 우리 엘프가 나서면 충분히 물리칠 수 있을 겁니다.”
페렛 습지대의 수인들이 병사를 모으고 있다는 소문은 이미 디르시나에도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덕분에 아스트리드 벨에게서 발언권을 얻은 후 입을 연 엘프 영웅도 남성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발언을 했다. 그리고 그런 엘프 영웅의 목소리에는 강한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현재 디르시나에는 엘프들 사이에서 전설로 내려져 오는 달의 병사인 실버 문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 실버 문?!”
“전설로만 내려오던 달의 여신님을 모시는 존재들이 나타나다니!”
“호! 호 님 만세! 호 님이 채고시다!”
“만세! 만세!”
실버 문의 등장은 림드 산맥을 포함해 그 주변의 영토에 살고 있던 엘프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다주었다. 전설 혹은 고서로만 전해오던 SSS랭크 병종이 이 리그너스 대륙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실버 문만큼은 아니지만 림드 산맥에는 엘프들의 수도 트오세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아르카니움 나이트 부대가 다수 주둔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인해 호에 대한 엘프들의 충성심은 다른 종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거기에는 알르드를 이루는 여러 종족들 중 엘프가 호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라는 자부심도 끼어 있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나크 평원에 있는 한시진에게 온 연락에 따르면 딱히 지원군은 필요 없다고 하던데…….”
벨이 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둠디스트와 파인플. 두 성에 배치되어 있는 마장기는 약 열다섯 기 가량. 소환자의 축복으로 인해 전투에 재능이 있는 영웅들도 많이 배치된 탓에 마장기를 조종할 오너가 부족한 상황도 아니었다.
그런 연유로 인해 시진은 굳이 수도의 지원 없이도 조인들 쯤은 가볍게 막아낼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호도 마찬가지였다.
“맞아. 한시진이라면 분명 조인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테지.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갈 생각이.”
“직접요? 위험하지 않을까요? 조인들은 수인 중에서도 가장 성질이 더러운 종족이라고 했어요. 아, 호전적이라고요.”
“하하하. 괜찮아. 성질이 더럽다고 잘 싸우는 것은 아니거든.”
호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디르시나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조금씩 질려가던 참이었다. 내정도 어느 정도 이뤄진 만큼 이제는 전장으로 나가려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 조인들이 걸린 것이다. 그것도 실버 문의 개발이 갓 끝난 환상적인 타이밍이었다.
“그리고 조인 녀석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우리의 실버 문을 상대할 수 있을까?”
“저는 이 세계의 전쟁에 대해 잘 알지 못해요. 그런 탓에 실버 문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잘 모르겠어요. 물론 당신의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면 조인족 쯤은 가볍게 물리칠 수 있겠죠. 다만, 제가 걱정하는 것은…….”
“걱정하지 말라고.”
호의 부드러운 손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순간 아스트리드 벨은 미약한 탄성과 함께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전장에서 보여준 호의 신위는 영웅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하지만 아무리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고, 전력상 우위에 있다 하더라도 전쟁은 전쟁. 걱정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벨을 안심시키듯 호가 말했다.
“무리해서 병사를 운용할 생각은 없어. 아시다시피 아직 아르카니움 나이트들의 전직이 전부 끝난 것도 아니고. 실버문들은 엄청나게 중요한 전력이잖아?”
SS랭크인 아르카니움 나이트들을 SSS랭크인 실버 문으로 전직시키려면 엄청난 양의 리스와 식량 그리고 많은 양의 미스릴과 달빛의 가루가 필요했다. 이 중에서 다른 재료들은 몰라도 달빛의 가루는 현재의 상황에서는 정령과의 거래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희귀한 재료였다.
덕분에 팀 심시티로 인해 폭발적인 성장을 이룬 림드 산맥이라 하더라도 모든 엘프 병사들을 실버 문으로 전직을 끝내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조인들에게 우리의 무서움을 알려줄 필요는 있지. 덤으로…….”
호의 눈동자가 싸늘한 빛을 내뿜었다.
곧 군대가 편성되었다. 이제는 호의 전용 마장기가 되어버린 엑스칼리버가 정비되기 시작했고, 실버 문들로 이루어진 군대가 편성되기 시작했다. 모처럼 양성에 성공한 SSS랭크의 병사였다. 전장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섭섭할 터.
“다, 달빛의 가루 도착했습니다!”
“승급이다!”
거기에 정령과의 거래를 통해 달빛의 가루가 들여올 때마다 아르카니움 나이트들이 실버문으로 승급을 거듭했다. 그렇게 모인 수가 일 만에 가까워질 무렵 디르시나에서 호는 출진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시기에 페렛 습지대의 조인들 또한 나크 평원의 경계를 넘었다는 보고가 한시진에게로 전해졌다.
뿌우우우! 뿌우우!
뿔 나팔이 울리면서 참새들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참새의 탈을 쓴 조인들이었다.
날개를 가지고 있는 조인족의 병사들은 많은 수가 비행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다들 이번 나크 평원 원정에 나선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마리의 조인이 날아오르고, 이어서 수십 마리의 조인들이 뒤따라 퍼덕이기 시작했다.
“꼬꼬댁! 알 낳으러 가자!”
“계란! 계란이다! 투척! 투척!”
“전방으로 알 폭탄을 보내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조인들이 부산하게 날개를 움직였다. C등급 비행종인 치키니의 상위 병종 마쵸킹들이었다. 머리 위로 검은색의 커다란 벼슬이 달린 마쵸킹들은 외형은 닭과 비슷했지만, 분위기는 그 어떤 맹금류 못지않은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화살병 앞으로! 앞으로!”
“카니앗산 포격 준비! 포격 준비!”
멀리서 마쵸킹들이 떼를 지어 날아오르는 모습에 한시진이 명령을 내렸고, 둠디스트의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적으로는 열세였지만, 다들 사기는 드높았다. 오히려 마장기의 수에서는 압도하고 있었다.
게다가 공성전이 아닌 수성전. 둠디스트에 비축되어 있는 충분한 물자들을 바탕으로 성벽만 잘 지킬 수 있으면 조인들의 공세쯤은 어렵지 않게 막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조인들이 자신들이 자랑하는 비행병종으로 공격을 개시하자 에머넌스 아쳐들이 성벽 가까이에 붙어 활시위를 매기기 시작했다. 정령을 이용해 백발백중을 자랑하는 정령족들의 궁사만큼은 아니더라도 엘프들 역시 명사수. 그리고 에머넌스 아쳐는 그런 엘프들로 이루어진 B랭크 병사들이었다.
“대기!”
하늘에는 마쵸킹들이 빽빽하게 늘어져 있었다. 폭탄을 투하하려는 모습인지 다들 한껏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몸에서 똥냄새가 나고 싶지는 않겠지? 저 녀석들을 모조리 떨어뜨린다!"”
“성벽 위로 알 폭탄을 떨어뜨리는 녀석들은 오늘 밤 내내 청소할 줄 알아!”
에머넌스 아쳐들 중에서도 정예병들로 이루어진 부사관들이 소리를 지르며 궁사들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공격!”
그리고 한시진의 명령과 함께 수많은 화살들이 상공을 수놓기 시작했다. 카니앗산의 마력포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홉 줄기나 되는 빗줄기가 아름다운 선을 그리며 마쵸킹들을 떨어뜨렸다.
“꼬꼬꼬꼬!”
“물러서지 마라! 우린! 마쵸킹이다!”
“For The Chik!”
빽빽하게 펼쳐진 허공의 방어막 사이로 용감한 마쵸킹들이 목숨을 도외시하고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알 폭탄을 투하 성벽에 피해를 입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피해는 미비한 편이었다.
“좋아.”
그 모습을 보며 한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데스사이더의 조종간을 잡고 있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이번 둠디스트를 쳐들어온 수인의 전력 중에서 비행병이 가장 위협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현대 전술에 능한 그녀는 비행병이 전장에서 어떤 우위를 보이는 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대의 전술은 무대포 같은 공격이었다. 병종의 상성 또한 무시하고 있었다.
게다가 둠디스트에는 수성전에서 엄청난 존재감을 보이는 카니앗산이 무려 여섯 기나 배치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