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
리그너스 대륙전기 207
“일단은 토갈론의 요새로 보낼 생각이야.”
“헐…….”
윤아는 가슴이 철렁해지는 걸 느꼈다. 토갈론의 요새에 대한 이야기는 그녀도 들은 적이 있었다. 엘프 왕국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요새 도시로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화약고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너도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해 봤으니까 상위 등급의 클래스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잘 알고 있을 거야. 어차피 당장 엘프 왕국이 쳐들어 올 것도 아니고, 토갈론의 요새에서 영지를 효율적으로 개발하고 운영하는 방법을 배웠으면 좋겠어. 이 세계의 분위기도 제대로 익히고. 컹컹이와 엘 아르윈이 도와줄 거야.”
“으으.”
단호한 호의 말에 윤아는 입을 다물었다. 가고 싶지 않았지만 마땅히 핑계될 게 없었다.
‘오빠는…….’
윤아의 눈동자가 호에게 향했다. 그는 지금을 위해서 자신을 이 세계에서 성장시킨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 그런 게 분명했다. 장난식이지만 몇 번이나 그런 이야기를 호의 입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윤아는 그런 호의 기대를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 기대를 배신하면…….
“제가 토갈론의 요새로 가면 오빠에게 도움이 되나요?”
고개를 세차게 흔든 윤아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물론이지. 아주 많이 도움이 돼. S등급이잖아?”
“그러면 어쩔 수 없죠. 헤헷. 게임으로 다져진 제 실력을 오빠에게 보여줘야겠네요. 나중에 깜짝 놀라지 말라고요.”
대답대신 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 * *
윤아가 토갈론의 요새로 향하면서 호 역시 디르시나로 복귀했다. 특성화가 점점 마무리 되고 있는 림드 산맥은 예전의 초라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조그마한 오솔길이 거대한 대로로 바뀌었고, 큼지막한 건물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수인, 엘프, 마족등 다양한 종족들의 대규모 거주지 또한 계속해서 건설되고 있었고, 도시마다 거대한 시장도 들어섰다.
다양한 종족들이 한데 모여 사는 터라 하루에도 수십 번씩 트러블 혹은 싸움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그렇게까지 큰 문제로 번지지는 않고 있었다. 치안을 담당하는 병사들의 처리도 빨랐지만, 다들 알르드라 불리는 이상향에서 거주하고 있다는 자부심일까? 심각한 상황에서는 한 발자국씩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림드 산맥은 폭발적으로 성장할거야.”
디르시나의 영주관저 내 커다란 원탁이 놓여 있는 회의실에는 호, 아스트리드 벨, 한시현, A등급 엘프 영웅인 엘 릿츠와 하이엘프 에어리스 그리고 드워프인 존스 홉킨스 앉아 있었다. 다들 디르시나의 요직을 맡고 있는 관리들이었다.
그리고 호의 말이 끝나자 엘 릿츠가 손을 들어 올리고는 말했다.
“지금도 엄청난 속도로 도시가 커나가고 있어요. 그런데 이 상황에서 영지가 더욱 커진다고요? 영지가 커지는 것은 좋지만……. 관리들이 부족해요.”
“괜찮아. 그에 대해서는 해결책이 있으니까. 걱정 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렇지 현아야?”
“네. 영지에 도움이 되는 영웅들을 계속해서 ‘멍멍아 야옹해봐’에서 찾고 있어요. 그리고 한 종족에 편중되지 않게 고심해서 등용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무 문제도 없겠구만.”
이런 자리에 함께한 것에 들뜬 것일까? 시현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고, 드워프인 존스 홉킨스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피골이 상접해 있던 그는 최근 살이 조금이나마 올라 있었다.
소환자의 축복으로 인해 최근 디르시나에 배치된 영웅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드디어 사람 같은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속된 기술 개발로 인한 크런치 모드 때문에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야근과 혹독한 연구 개발에 시달렸던 존스 홉킨스는 이제야 저녁이 있는 삶과 시원한 맥주 한 잔의 여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함께 크런치 모드를 겪고 있던 드워프 레온 바티스타와 함께 호에 대한 충성도가 큰 폭으로 상승하기도 했다.
“하지만 관리만 부족한 것도 아니에요. 인구 증가 속도가 영지의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어요.”
이번에는 하이엘프인 에어리스가 말했다. 현재 그녀는 디르시나의 치안 및 각 종족들의 고충 및 불만을 해결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것도 해결책이 있어. 또 다시 노예들을 사올 생각이야.”
호가 말했다.
“노예요?”
“응. 우리도 그랬지만 이 대륙에는 많은 전쟁이 벌어지잖아? 그로 인해 고향을 떠나 떠도는 난민들이 굉장히 많다고 들었어. 일단 그런 난민들을 우리의 영토로 데리고 올 생각이야.”
“쉽지 않을 텐데요? 육로를 통해 이곳까지 오려면 엄청난 시간이 걸릴 텐데…….”
“해로를 이용할 거야. 이미 블루 스케일과 이야기를 나눈 게 있어.”
나크 평원 점령 당시 호는 블루 스케일의 마장기 오너에게 자신의 생각을 넌지시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호는 그에게서 블루 스케일이 대금을 받고 난민들을 수송해준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또한 라홀로프 상단에게도 거래를 요청할 생각이었다. 이미 호는 라홀로프 상단에게서 많은 수의 노예를 구매한 전적이 있었다.
‘페이샬이라고 했었지.’
호는 라홀로프 상단의 상단주를 떠올렸다. 리아 캬베데나 리셴르나와는 다른 분위기를 풀풀 풍기던 묘인이었다.
“노예와 난민이라면…….”
“뭐, 충분히 가능하겠네요. 노예를 구입할 수 있는 돈도 충분하고. 이 대륙을 떠도는 난민들의 숫자도 어마어마하니까요.”
엘 릿츠와 에어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를 향해 말했고, 호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존스 홉킨스씨. 현재 마장기의 제작에 관련된 기술과 마족의 마법 병종인 빗치 위치를 개발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영주의 말이 맞네. 마장기 제작 관련 기술은 현재 관절에 사용이 가능한 유연하고도 단단한 금속에 대한 기술이 개발 중이고 빗치 위치 관련 기술은 거의 마무리 된 상황이지. 아마 다음 주면 빗치 위치의 모병이 가능할 거야.”
“그렇군요.”
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병에 시간이 꽤나 걸린 느낌이었다.
빗치 위치는 B랭크 마족 마법병과였다. 아벨리우스나 훗사르와 비교했을 때 조금은 아쉬운 느낌이 드는 랭크였지만 B랭크라도 전황에 따라서는 충분히 유용한 전력이었다. 더욱이 빗치 위치는 마족의 마법병으로 전 종족의 마법병 중에서 화력으로는 가장 강력한 병과기도 했다.
“그리고 빗치 위치의 개발이 끝나면 새로운 연구 명령을 내리고 싶습니다.”
“어떤 기술인지 말만 하게나. 이제는 망치보다 책을 보는 게 익숙하다네. 허허허.”
왠지 슬퍼 보이는 존스 홉킨스를 향해 호가 말을 이었다.
“세계수의 의지가 담긴 미스릴 방패입니다.”
“세계수의 의지가 담긴 미스릴 방패? 그런 연구 기술도 있었던……. 흐억?!”
잠시 호가 말한 내용을 떠올리던 존스 홉킨스가 말을 멈추고는 입을 쩍 벌렸다. 놀란 것은 엘 릿츠도 마찬가지였다.
“뭐, 뭔데요? 왜 그래요?”
시현이와 아스트리드 벨 그리고 하이 엘프인 에어리스만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거릴 뿐이었다. 세계수의 의지가 담긴 미스릴 방패. 듣기만 해도 범상치 않은 이름을 지닌 방패는 엘프의 SS랭크 보병인 아르카니움 나이트들이 사용하는 방패였다.
“아르카니움 나이트?!”
그리고 호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엘 릿츠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벨리우스의 상위 랭크 병과로 알려진 아르카니움 나이트는 아벨리우스들 중 뛰어난 활약을 펼쳐 세계수에 의해 선택된 병사들을 뜻했다. 전장에서도 거의 모습을 볼 수 없을 정도로 희귀하고도 드문 탓에 엘프 영웅 중에서도 그 이름을 알고 있는 인물이 많지 않을 정도였다.
“아르카니움 나이트라. 정말 오랜만에 들어 보는 걸?”
“그, 그렇습니다. 엘프인 저도 잠시 잊고 있었던 이름입니다.”
“이거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엘프에 대한 영주의 사랑은 정말 놀랍다니까! 허허허!”
존스 홉킨스가 말했다. 그런 존스 홉킨스의 말투에는 엘프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가 살짝이나마 깃들어 있었는데 아벨리우스, 에머넌스 아쳐 등 엘프의 병사들이 호의 병력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에 반해 드워프는 스파크 마장병을 제외하면 제대로 개발이 완료된 병종조차 없었다.
“저는 전장에서 보여주는 엘프 보병의 장점은 다른 종족이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긴 엘프 보병은…….”
“음. 확실히 드워프들에 비해 비실거리는 모습을 보여주긴 해도 엘프들의 검과 방패가 날카롭고 단단하기는 하지.”
엘 릿츠와 존스 홉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 왕국의 보병이 뛰어나다는 건 전 대륙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장점을 저희를 지키는 데 이용할 생각입니다.”
세 남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스트리드 벨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뭔가 대단한 대화가 오가는 것 같기는 한데, 무슨 이야기인지 잘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다만 눈치로나마 호가 상급 병종을 양성하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아르카니움 나이트? 그 병종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무슨 준비를 해야 되나요?”
슬그머니 벨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리는 것을 느끼며 벨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호 역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준비? 준비라기보다는 연구가 필요하지 않을까?”
존스 홉킨스가 자신의 턱수염을 살짝 꼬면서 대답했고, 그 모습을 보며 아스트리드 벨은 고개를 가로로 홰홰 저었다.
“아뇨. 존스 홉킨스씨. 연구 말고요. 예를 들면 아벨리우스를 양성하는 데는 뷰트의 성목이 꼭 필요한 것처럼요. 분명 돈이 많이 필요할 것 같은데…….”
“아아, 맞네. 아벨리우스처럼 아르카니움 나이트를 양성하는 데도 여러 재료들이 많이 필요하지. 특히…….”
“가장 중요한 것은 미스릴의 확보 여부입니다.”
호가 말했다. 리그너스 대륙의 종족들에게는 은빛 강철 혹은 마나를 머금을 철이라고도 불리는 미스릴. 아르카니움 나이트들은 그런 미스릴로 전신을 무장한 병사들이었다.
* * *
“정예 드워프 쿠스타스나 누누 개발도 아닌 고작 엘프 병사의 개발에 이렇게까지 해야 하다니. 이거 나 참.”
“영주님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지. 그럼 살아서 보게나.”
아르카니움 나이트 개발을 위해 존스 홉킨스와 레온 바티스타는 휘하의 영웅들과 함께 자체 크런치 모드에 들어갔다. 존스 홉킨스와는 달리 레온 바티스타는 드워프가 아닌 엘프의 최상위 병종을 개발한다는 거에 불만을 표했지만, 영주의 명령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한시현은 여전히 ‘멍멍아 야옹해봐’에서 영웅들을 선별하고 등용하는 데 전념했고, 아스트리드 벨은 밀려드는 영지의 행정 업무로 인해 눈 코 뜰 새도 없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나마 소환자의 축복으로 행정 업무를 도울 수 있는 영웅들이 늘어나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영지가 개판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다른 영웅들도 바쁜 것은 매한가지였다. 디르시나의 규모가 급속도로 커나가고 있는 터라 해야 영웅들이 신경을 쓰고 관리를 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바쁜 것은 바로 디아린 상단이었다.
“파업! 파업이에요! 이러다가는 내가 번 돈을 쓰기도 전에 과로사 할지도 모르겠다고요!”
디르시나의 영주 집무실.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다크서클이 얼굴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디아린이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하, 하하! 상단에 필요한 쓸 만한 영웅들을 붙여줄게. 응? 미스릴만 구하면 된다고.”
“미스릴? 미스으릴? 그게 무슨 애 이름인 줄 알아요? 상단일로도 바빠 죽겠는데! 거기에 영주님이 말한 특산품을 대륙을 돌아다니면서까지 힘들게 구하고 있는데! 뭐요?! 미스릴?”
“…….”
“그리고 영웅? 제가 상단에 필요한 재원을 요청한 게 언제인데?!”
뭔가 쌓인 게 굉장히 많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런 디아린을 진정시키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