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
리그너스 대륙전기 206
“크켁! 케엑!”
“엘프다! 적이다!”
아벨리우스들이 자신들의 단단한 방패를 앞세우고 진격한다. 그런 아벨리우스들의 앞에 나타난 것은 녹색 피부의 몬스터들. 오크라 불리는 족속이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나크 평원의 B등급 던전인 그린 협곡의 오크들이었다.
엘프들의 야들야들한 속살을 맛보기 위해 등장한 오크들은 화려한 장비로 무장한 많은 수의 병사들을 발견하고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자신들의 무기를 치켜들며 하울링과 함께 아벨리우스들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창칼은 아벨리우스의 단단한 방벽과 회복 마법에 가로막혀 힘없이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오크들은 자신들의 수적 우위를 앞세워 계속해서 엘프들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오크들의 적은 아벨리우스만이 아니었다.
“차원의 문 소환. 디멘션 게이트.”
한 소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했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붉은 색의 선은 하나의 문을 그렸고, 그 문은 곧 강렬한 빛을 내뿜으며 사방팔방으로 마력을 쏘아 보내기 시작했다.
스아아아! 그대에게 어둠을!
그리고 잠시 후, 검은색의 갑주로 무장한 기사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입에서 시린 냉기를 뿜어내는 기사들은 체온을 느낄 수 있는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니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익숙한 외형의 기사들은 마족의 B랭크 기병인 데스나이트 들이었다. 그 수는 무려 백 여기. 오크들을 상대로 충분히 돌진을 감행할 수 있는 숫자였다.
“좋아좋아.”
윤아가 소환해낸 데스나이트를 바라보며 호가 천연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윤아의 명령이 떨어졌다.
“돌격!”
윤아가 손을 앞으로 뻗으며 외치는 것과 동시에 데스나이트들이 오크들을 향해 거침없이 돌격하기 시작했다.
“기, 기사단이다! 취이익!”
“취익! 방패! 방패!”
갑작스런 기사단의 등장에 오크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틈은 치명적인 피해를 불러왔다. 데스나이트들은 오크들의 빈틈을 그대로 뚫어버렸고, 길쭉한 유령창으로 오크들의 온몸을 구멍 내기 시작했다.
“취에에엑!”
“캬아아악! ”
그린 협곡에 울려 퍼지는 오크들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호는 윤아를 바라봤다.
아직도 피와 살기를 무서워하는 까닭에 직접적인 전투능력은 제로에 가까웠지만 이렇게 멀리서 소환을 하고 몬스터들에게 대신 싸우게 하는 것 정도로 충분히 도움이 되고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었다. 어차피 소환 계통의 클래스를 보유하고 있는 마당에 직접 싸울 필요도 없었다.
띵동.
-B등급 던전 그린 협곡의 ‘오크들의 족장 모쿠모쿠’를 물리셨습니다.
-전투성과를 결산중입니다. 3……2……1. 결산완료. 이번 전투의 성과 등급은 F 랭크입니다. 경험치를 100 획득했습니다.
-총대장으로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20%의 경험치를 추가적으로 획득합니다.
-B등급 던전 그린 협곡을 완벽하게 클리어했습니다. 경험치 5000을 획득했습니다.
아벨리우스와 데스나이트의 연계 공격에 그린 협곡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오크들의 족장 모쿠모쿠를 상대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윤아가 정령족의 A랭크 비행병이자 상대방을 혼란시키게 만드는 특수 능력을 지닌 퓨리 오브 픽시를 소환해내는 순간 전투가 끝이 났다. 혼란에 빠진 모쿠모쿠가 그대로 아벨리우스와 데스나이트들의 공격에 난도질당하며 고깃덩이로 변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이겼다!”
“나크 평원의 오크들을 물리쳤다!”
메시지와 함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병사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B등급 던전이라 그런지 병사들의 피해가 어느 정도 있기는 했지만 얻은 경험치를 생각하면 아까운 수준은 아니었다.
“후. 힘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호의 곁으로 다가온 신윤아가 온몸에 난 땀을 닦으며 말했다.
“전투는 니가 아니라 병사들과 몬스터가 다 한 거 같은데?”
“그, 그래도! 소환을 위해서는 극도로 정신을 집중을 해야 한다고요.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 줄도 모르면서!”
“예이예이. 그래서 경험치는?”
“B등급 던전이라 굉장히 많이 획득했어요. 그러면 저 능력 포인트좀 올릴게요.”
말과 함께 신윤아가 오른손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호는 조용히 신윤아의 행동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단지 기다리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정보창을 열어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윤아의 능력치를 확인했다.
“됐다! 이렇게 두어 번만 더 경험치를 획득하면 S등급으로 전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윤아의 말에 호 역시 그녀의 정보창을 닫으며 말했다.
“빠른데? 그러면 군단의 소환사로 전직하는 건가?”
“네. 화염의 정령사도 끌리기는 하는데, 역시 오빠 말을 듣기로 결정했어요. 화염의 정령사로 전직하게 되면 스태프를 들고 직접 전투에 나서야 된다면서요?”
“클래스의 효율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리려면 그렇지?”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못할 것 같아요. 저는 그냥 병사들만 소환해서 내보내려고요.”
윤아의 말에 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 편이 자신을 위해서도 더욱 좋았다. 호가 윤아에게 바라는 최종 클래스는 SSS등급의 소환사인 디멘션 서머너였다.
현재 윤아는 소환 계통의 A등급 클래스를 보유하고 있었다. 계속된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거기에 조금만 더 있으면 S등급의 영웅으로도 전직할 수 있었다. 호 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로였다. 그게 가능한 것은 그녀의 클래스가 호나 한시진처럼 까다로운 조건이 붙지 않은 일반 클래스이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신윤아는 호의 예상보다도 훨씬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이제 신윤아가 군단의 소환사로 전직하면…….’
로우덴, 브로리, 아쉬카로트 거기에 엘 라스엘까지 더해 다섯 명의 S등급 영웅을 보유할 수 있었다. 이미 엘 라스엘은 A등급에서 S등급의 영웅으로 승급해 있었는데, 의외로 그녀의 승급에 필요한 아이템이 생각 외로 구하기 쉬운 아이템들로 구성되어 있던 까닭이었다. 어떻게 보면 운이 좋은 셈이었다.
[작전지휘관–백우선의 깃털(S)-과거 위대한 정치가이자 하늘이 내린 전략가였던 인물의 능력을 이어받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뛰어난 지휘 능력을 보이는 클래스입니다. 자신의 통솔 수치가 50% 상승하고, 지휘하는 부대의 공, 방 수치가 100% 상승합니다.
조건 -전 종족 가능. 통솔 계열 A등급 직업을 보유한 상황에서 통솔 수치가 750, 지력과 정치 수치가 200 씩 필요.
-휘하에 특성화 개발을 시킨 도시를 세 개 이상 보유해야 합니다.
-S등급 이상의 영웅 다섯 이상을 보유해야 합니다.
-다섯 부대의 마장기 편대를 보유해야 합니다.
-휘하 영토의 리스 수입량이 5 억을 넘어야 합니다.]
다섯 개의 까다로운 조건 중 두 가지는 이미 달성했다. 통솔과 지력, 정치 능력은 이미 최대치였고, 다섯 부대의 마장기 편대 역시 보유한 상황이었다.
‘드디어 S등급으로의 전직인가.’
나머지 세 조건 역시 시간만 있으면 금방 달성할 수 있었다. 길게 잡아도 두어 달 내에는 모든 것이 끝날 것 같았다. 리스 수입 관련 조건이 조금 까다로울 줄 알았는데 해머스와 베코바의 특성화가 완료되면서 시너지를 받은 모양인지 디르시나까지 포함해 세 도시의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상황이었다. 거기에 특산품을 판매한 대금들도 있었다.
“수인 왕국에 있었을 때는 능력치 1 하나 올리는 것도 진짜 무지하게 힘들었는데. 정말 격세지감이네요.”
“이게 전부 내 덕인 줄 알아.”
“정말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오빠만 아니었으면 전 이미 이 이상한 세계에서 죽었을 거예요.”
“안 죽었으니까. 다행이지.”
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러고는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는 병사들을 바라봤다. 오크 족을 상대로 용감하게 전투를 치룬 아벨리우스들이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마웅키로 돌아가서 병력을 재정비하고 다음 던전을 공략해야겠다. 보름 내에 S등급으로 전직해야지?”
“네!”
호의 말에 신윤아가 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열흘 뒤, 윤아는 S등급 클래스 군단의 소환사로 전직할 수 있었다.
“우……와! 어어…….”
놀란 표정을 짓는 윤아와 함께 호의 눈과 입도 완만한 곡선을 그렸다. 그녀가 군단의 소환사로 승급하면서 호 역시 작전지휘관–백우선의 깃털 의 전직 조건을 만족했다는 메시지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스, 승급! 전직했어요! 이제 S등급이에요!”
한참이나 멍하니 자신의 정보창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격양된 목소리로 소리치듯 말했다.
“축하한다. 아마 소환자 중에서는 최초일거야.”
“최초라고요? S등급이요? 제가? 제가요?”
윤아가 눈동자를 동그랗게 떴고, 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호는 이 세계에 모습을 드러낸 소환자들 중에 S등급 이상의 클래스를 보유한 인물은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아니, A등급도 없을 거라는 게 호의 생각이었다.
그 만큼 상위 등급으로 승급 혹은 전직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수 클래스가 아닌 일반 클래스의 길로만 걷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윤아만 봐도 그랬다. 그녀를 S등급 클래스로 승급시키기 위해 많은 수의 아벨리우스들이 희생되었다. 일반 병종도 아닌 무려 S랭크의 보병이었다. 자원으로 환산하면 상당한 수치였다. 그렇게 병사들의 희생으로 얻은 경험치를 몰빵 했음에도 윤아가 S등급의 클래스를 획득하기까지에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런 특혜를 다른 소환자들이 받는다? 1회 차 소환자로 이 세계의 분위기를 알고 있는 자신으로써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 세계의 종족들이 소환자에게 그런 혜택을 줄 이유가 없었다.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소환자들이 이 세계에 적응해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자칫하다가 눈 먼 칼에 맞아 죽기라도 한다면 모든 게 끝이었다.
“오빠도 S등급 아니에요?”
신윤아가 상반신을 앞으로 쑤욱 내밀었다. 대한민국의 여성답게 조그마한 가슴골이 호의 눈에 들어왔다. 저건 보나마나 A 컵이었다. 75A. 그러면 평균인건가?
“……아직 A등급이야. 물론, 나는 일반 클래스가 아닌 레어 클래스지.”
호가 레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아? 오! 그래도 어쨌든 제가 오빠보다 등급이 높네요?”
“그래서 한 판 붙어보게? 이제 좀 컸다고 하극상이냐?”
말과 함께 호는 허리춤에 스윽 손을 가져다대었다. 아무리 윤아가 S등급 클래스라고 해도 자신과 그녀는 이 세계에서 구른 짬밥이 달랐다. 게다가 전투에 대한 노하우는 자신이 한 수, 아니 열 수는 위였다. 등급의 차이는 있었지만 호는 정식으로 붙는다 해도 십 분 내에 그녀를 무릎 꿇릴 자신이 있었다.
“으으. 농담이에요, 농담.”
호의 말에 윤아는 흠칫 몸을 떨고는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는 자못 서운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검 진짜로 뽑으려고 했던 건 아니죠?”
“글쎄? 모르지. 말 안 듣는 애한테는 매가 약이거든.”
“우와! 너무한 거 아니에요?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얼만데……. 흑흑.”
마치 실연이라도 당한 것처럼 울먹이는 윤아의 행동에 호는 그녀의 머리에 가벼운 꿀밤을 날려주었다. 아얏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매서운 눈초리로 호를 노려봤다.
“어쨌든 S등급으로 전직도 했으니까. 인사이동 명령을 내려야겠네.”
“헐? 저, 계속해서 오빠랑 다니는 거 아니었어요?”
“설마? 좋은 군주는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하는 법이지.”
아무리 그녀가 피를 무서워하는 반푼이라고 해도 S등급의 소환자였다. 그것도 대규모 전투에서 제대로 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소환 계통의 클래스. 그런 그녀를 아무 영지에나 짱박아 놓을 수는 없었다. 한 손이 아쉬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말이었다.
그리고 그런 호의 말에 윤아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호는 계속해서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바를 이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