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
리그너스 대륙전기 200
“걱정 마. B등급이면 몇 번이나 공략해 본 적이 있으니까. 게다가 다원의 신전은…….”
딱히 특이한 게 없는 던전이었다. 일반적인 패턴을 보이는 보스 몬스터들과 나크 평원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몬스터들을 모아놓은 곳이 다원의 신전이었다.
그런 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시진은 여전히 걱정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차라리 내가 오빠랑 같이 가면 좋을 텐데.”
어느 정도 진심이 담긴 한시진의 말에 호는 미약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우끼긱! 출발 준비가 되었습니다.”
“빠르군.”
“다원의 신전까지는 제법 가야하니까요. 이미 정찰병들을 출발시켰습니다. 우끽.”
타레스가 말했다. 하이 폴리션이라는 A등급 영웅이라 그런가? 보이는 행동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원인이라는 편견과 함께 아직 믿을 수 있는 녀석인지는 장담할 수 없었지만 지금까지 보이는 모습을 보면 충분히 합격점이었다.
그렇게 에스트라다를 출발했던 군대는 둘로 나뉘어져 각자의 목적지로 향하기 시작했다.
“다원의 신전. 어떤 던전이에요?”
“B등급 던전이지.”
“제가 그걸 물어본 게 아니잖아요?”
심드렁한 호의 대답에 신윤아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토리아 항구에서 출발한 지 반나절, 말을 타고 이동하는 동안 끝이 보이지 않는 평야에 슬슬 지루함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너, 던전 가봤잖아?”
“가보긴 했는데. 몇 번 안 가봤잖아요. 게다가 B등급 던전은 처음이라고요. 게다가 가상현실게임에서 제가 주로 간 곳은 슬라임들이 나오는 곳이었어요.”
“…….”
“헤헤헤. 아이템들이나 경험치들은 다 에디터로 올릴 수 있어서 굳이 던전을 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어요.”
한심하게 쳐다보는 호의 눈빛에 부끄러웠던 것일까? 신윤아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뭐.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어. 에디터라는 건 쓰라고 있는 거였으니까.”
“오빠는 에디터 사용한 적 없어요?”
“아니. 나도 에디터 사용한 적 있어.”
호 역시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처음 플레이 했을 무렵, 너무나도 끔찍한 난이도에 에디터를 쓰고 엔딩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진정한 플레이어는 에디터를 사용하지 않고 게임을 클리어 해야 하는 법.
계속된 플레이로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시스템이 익숙해지면서 에디터가 아닌 단순한 공략본으로도 엔딩을 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고, 다시 한 번 게임을 플레이하려던 순간 이 세계로 떨어졌다.
“우와. 오빠도 에디터 사용한 적 있구나.”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난이도는 끔찍하기로 유명하잖아? 아니, Korea사의 모든 게임이 그렇지만.”
“다른 게임도 플레이 해본 적 있어요?”
윤아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고, 잠시 생각을 하던 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항해시대나 연희삼국지? 그 정도는 한 적 있어.”
“어? 저도 대항해시대 해본 적 있어요. 온라인으로 나온다고 하던데…….”
“그거 정말 기대했었는데. 뭐, 어쩌다보니 이곳으로 끌려오게 됐지.”
“지금쯤이면 출시 됐겠죠?”
“글쎄다.”
그렇게 현실 세계에 대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행군을 하는 동안 호는 몇몇 몬스터 무리들과 마주칠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크 평원의 일반적인 몬스터가 아닌 신성력이 폭주한 괴물들이었다.
마장기와 함께 만여 명에 가까운 군대에 덤비려는 몬스터들은 거의 없었는데, 신성력이 폭주한 괴물들은 이성이 없는 모양인지 생명체의 냄새를 맡는 순간 엄청난 수가 몰려들곤 했다.
“차원의 문 소환!”
파츳! 파츠츠츳!
몬스터들의 등장과 함께 공간을 찢는 소리가 호의 귀에 들려왔다. 상당한 양의 마나가 흐르는 것을 알려주는 듯 허공이 기이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잠시 후, 일정한 방향으로 이동하던 마나 속에서 우우웅 거리는 진동이 울려 퍼지더니 검은색의 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신윤아가 만들어낸 차원의 문이었다.
쉬쉬싯!
폭풍의 힘으로 적들을 쓸어버리자! 샤샷!
차원의 문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길쭉한 뱀꼬리를 자랑하는 나가들이었다.
수인족의 B랭크 병사인 나가씰들이었다. 거대한 낫을 들고 있는 나가씰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고, 그렇게 열 댓 마리의 나가씰이 나타나자 차원의 문은 나타났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크게 쓸모가 없겠네.’
제대로 된 녀석들을 소환하려면 적어도 차원의 문 소환이 A랭크 아니 S랭크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았다. 또한 소환할 수 있는 병사들의 수 역시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야 했다.
신성력이 폭주한 괴물들의 등장하자 아벨리우스와 훗사르는 호의 명령 없이도 전투 준비에 나서고 있었다. 확실히 S랭크의 병사들다웠다.
“오빠. 이번에도 제가 상대해야 되나요?”
“물론이지. 경험치 얻어야 되잖아?”
“하아. 그러면 오빠는요? 매번 저만 전투를 하는 거 같아요.”
“나는 이미 경험치가 차고 넘쳐서 필요 없어.”
재수없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는 호의 모습에 윤아는 한숨과 함께 자신의 소환해낸 나가씰들을 바라봤다. 잠시 그녀의 눈에 뿌듯함이 감도나 싶더니 곧 손을 들어 올리고는 멀리서 다가오는 괴물들을 가리켰다.
“공격!”
카아아아악!
쉬쉬시싯!
윤아의 명령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나가씰들이 미끄러지듯 괴물들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아벨리우스와 훗사르들도 마찬가지였다. 전부 윤아가 지휘하는 병사들이었다. 그렇게 윤아가 이끄는 병사들과 신성력이 폭주한 괴물들이 전투를 벌이는 모습을 보며 브로리가 지루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단숨에 처리하면 될 걸, 언제까지 이 꼴을 봐야 하는 거지?”
“저 녀석이 쓸 만해질 때까지?”
“하. 내 생각에는 시간 낭비로만 보이는데.”
브로리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애초부터 강력한 영웅인 그녀에게는 그렇게 비춰지는 모양이었다.
“뭐,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다만. 소환자들은 기회만 주어지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어.”
호의 말에 브로리는 여전히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호는 다원의 신전을 향해 행군하는 동안 나타났던 몬스터를 전부 윤아를 통해 처리했다. 그녀가 모든 전투 경험치를 획득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현재 윤아의 클래스는 서머너로 아직 C등급에 불과했다. 어느 정도 쓸 만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조금 더 성장을 시켜야만 했다.
“성장이라. 그래. 나에게는 언제 짐승신의 축복을 내려줄 셈이지?”
“어?”
“짐승신의 축복 말이다! 나는 더 강해지고 싶다. 호.”
“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는 브로리의 행동에 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귀가 빠른 속도로 파닥파닥 움직이고 있었다.
“전에도 말했잖아. 너는 시간이 좀 필요하다고.”
“그 시간! 대체 얼마나 걸리는 것이냐!”
브로리가 다시 한 번 울부짖듯 말했다.
“……많이. 강한 힘에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 그래고 대가가 필요하다는 말 몰라?”
“큿!”
자신도 가능하다면 빠르게 브로리를 승급시키고 싶었다. 그녀를 승급시키면 무려 SSS등급의 영웅이 손에 들어오는 셈이었다.
하지만 SS등급의 영웅을 승급시키기 위한 준비물은 현재로서는 구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느새 윤아와 괴물들과의 전투는 끝이 나고 있었다. 신성력이 폭주한 괴물들이 수가 많다고는 해도 상대는 아벨리우스와 훗사르들이었다. 게다가 간간히 자넷과 골드 이글이 병사들이 위험해 처할 때 마다 지원 사격을 가하고 있었다.
다원의 신전으로 향하면서 윤아는 하루가 멀다 하고 나타나는 몬스터들을 계속해서 전담해서 처리했다. 그런 노력의 대가일가? 다원의 신전에 도착하기 하루 전, 그녀는 B등급 클래스로 전직할 수 있었다.
“이렇게나 빠르게 전직을 할 수 있다니…….”
“빠른 편은 아니지. 직접 전장에 나갔으면 경험치를 쓸어 담았을걸?”
“으으. 그건 싫어요. 전 지금의 속도로도 충분히 만족한다고요.”
“아니아니. 만족해서는 안 돼. 넌 더 빨리 성장해야 된다고.”
고개를 젓는 윤아를 향해 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던전 역시 전담해서 처리시킬 테니까. 준비하도록 해.”
확실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이 경험치를 획득하는 데는 최고였다. 덕분에 윤아는 1회 차 소환자인 아스트리드 벨이나 한시현보다도 빠른 성장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게 신윤아가 B등급 영웅으로 승급하고 난 뒤, 호는 넓게 펼쳐진 평야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거대한 신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호 님. 우끽”
원인족의 마장기들이 숨겨져 있다는 다원의 신전이었다.
“그런데 저 녀석들은 뭐지?”
“……우끼?!”
멀리서 움직이는 인영들을 보며 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타레스도 당황한 표정이었다. 아무도 없을 것이라 예상했던 다원의 신전에는 호가 전혀 예상치 못한 불청객들이 있었다.
* * *
나크 평원을 차지하기 위해 천족들과 주도권 싸움을 벌여야 하는 와중에도 호는 병사를 반으로 나눴다.
전부 마장기라는 전략 병기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오랜 행군 끝에 열다섯 기나 되는 마장기가 숨겨져 있다는 다원의 신전에 도착했다.
“……천족.”
하지만 다원의 신전에는 있어서는 안 될 종족들이 호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수백에 가까운 천족들이 낑낑거리며 수인족의 마장기를 다원의 신전 내부에서 밖으로 빼내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이고 있었다.
“대체 저 녀석들이 어떻게 다원의 신전에 있는 거지?”
이제까지 받은 보고에 따르면 헬림의 지휘 하에 있는 천족의 군대는 지금쯤 나크 평원의 도시 중 하나인 파인플에 있어야 했다. 다원의 신전과는 정반대쪽에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우끼. 끽. 저, 저도…….”
“저 녀석들. 뒤를 밟힌 게 아닐까요? 마장기는 덩치가 크잖아요.”
“수인 내부에서 배신자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주비어스에서 온 부대가 우연히 발견했었을 수도 있어요.”
어째서 다원의 신전에 천족이 있는가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들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호는 곧 전투 준비 명령을 내렸다. 자신의 것이나 다름없는 마장기를 천족이 가지고 가는 모습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엔젤급 마장기 한기가 있기는 했지만, 상대의 병력은 기껏해야 천 명을 넘지 못했다. 가볍게 밟아버릴 수 있는 전력이었다.
우우우우웅!
마력 엔진이 움직이며 요란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엑스칼리버를 시작으로 골든 스테이트, 자넷, 골드 이글등 다양한 모습을 한 마장기들이 하나둘씩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아벨리우스와 훗사르들도 진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돌진 형태의 쐐기진이었다. 단숨에 적을 부술 생각으로 보였다.
“저, 적이다!”
“마족?! 아니, 인간들인가?! 뭐야! 수인족의 마장기도 있어!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저들이 모두 연합을 한 건가?”
“설마!”
제대로 된 정체를 알 수 없는 연합군의 모습에 천족들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향해 공격이 시작되었다. 마장기의 돌진을 시작으로 훗사르가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아군이 한바탕 짓밟고 난 뒤에는 아벨리우스가 그물로 목을 죄듯 상대를 포위해 섬멸할 계획이었다.
“모, 모두 후퇴! 아니 응전해라!”
투쾅!
갑작스럽게 나타난 다수의 마장기에 엔젤급 마장기의 천족 영웅이 갈팡질팡하다가 호가 발사한 MLC 포격에 동체를 직격으로 얻어맞았다. 이어서 골든 스테이트가 달려들며 마장기의 강철을 말 그대로 찢어버리기 시작했다.
“휘유.”
우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엔젤급 마장기의 팔이 우그러드는 모습을 보며 호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SS등급의 영웅답게 브로리는 상대의 엔젤급 마장기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마장기 성능의 차이도 있기야 하겠지만 오너의 실력이 비교가 되지를 않았다.
천족들의 병사는 순식간에 와해되었다. 수인족의 마장기를 옮기느라 병사들의 수가 분산된 탓도 있겠지만, 마장기의 수, 병사들의 랭크등 기본적인 전력이 상대가 되지를 않았다.
“천족 중 몇 명은 다원의 신전 내부로 도망을 갔어요.”
“천족들이 밖으로 빼낸 마장기는 총 일곱 기입니다. 안에 여덟 기가 더 남아 있을 거예요.”
그렇게 압도적인 전력의 차를 확인한 천족들은 다원의 신전 내부로 도망을 칠 수 밖에 없었다.
많지 않은 수에 불과했지만 호는 신전 내부로 도망을 간 천족들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원인이 가지고 있던 마장기를 자신이 흡수했다는 소문이 다른 수인들 특히 조인들에게 들어가면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