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
리그너스 대륙전기 195
객관적으로 따져봤을 때 호의 병력 구성은 리그너스 전 대륙을 통틀어서 비교해도 봐도 수준급이었다.
A, B, C등급의 마장기가 골고루 배치되어 있었고, S랭크의 병사들이 그 뒤를 보좌했다.
궁병인 에머넌스 아쳐 부대가 B랭크에 불과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무시당할 수준은 아니었다. 리그너스 대륙의 수많은 영주들 중 B랭크의 병종을 징병할 수 있는 영주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변경백과 같이 국경을 지키는 영주들이나 군사적으로 준비가 되어 있을 뿐이지 오랜 세월동안 타 세력의 침범을 받지 않은 안전한 영지들의 병력 수준은 형편없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각 종족의 실력자들도 호처럼 S랭크의 고위급 병종을 대량으로 운용하지는 못했다. 일단 기술의 개발이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모를까 현재로써 그게 가능한 것은 각 종족의 수장이나 그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고위 직급의 영웅들뿐이었다.
그만큼 호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영지 기술을 개발했는지를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어마어마한데요?”
“내 눈으로 직접 봤는데도 믿을 수가 없어! S랭크의 보병인 아벨리우스와 그 못지않게 위명을 떨치는 훗사르라니!”
“림드 산맥의 패자에 대한 소문은 전부 거짓말인줄 알았는데.”
“병신아. 그게 거짓말이었으면 림드 산맥의 패자가 되었을 리가 있겠냐?”
“잠깐, 저 녀석 신참이었지? 지금부터 미리미리 기저귀를 준비하는 게 좋을 걸?”
“하긴 내가 저번 엘프 왕국의 장로와의 전쟁에서 아벨리우스의 무시무시함을 보고 콕피트에 오…….”
다양한 종족의 마장기들로 구성되어 있는 호의 마장기 편대와 아벨리우스, 훗사르 부대를 보며 블루 스케일에서 파견 나온 마장기사들이 쉬지 않고 입을 열었다. 누가 보면 마장기사가 아닌 가볍게 마실 나온 아줌마라고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호의 군대가 레스트에 도착했을 때 호를 돕기 위해 파견을 나온 블루 스케일의 마장기 편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입만 쩍 벌려야 했다.
“세계수의 분노로 적들을 불태우자!”
“엘프에게 뒤처지지 마라! 성벽이 앞을 가로막는다면 성벽을 부셔버려라! 우리는! 전장의 재앙! 훗사르다!”
아벨리우스와 훗사르 부대는 거침없이 레스트를 장악한 괴물들을 학살했다.
검과 창이 번뜩일 때 마다 괴물들은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차가운 바닥으로 쓰러져야 했고, 두 병종은 그런 괴물들을 가볍게 짓밟으며 성내로 계속해서 전진해 나갔다.
“어우. 무시무시한데요?”
“다들 사기가 굉장히 높습니다. 호 님께서 직접 친정을 하신 게 병사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가 봅니다. 멍멍!”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손바닥을 비비는 로우덴의 아부 아닌 아부에 호는 가볍게 웃음을 짓고는 엑스칼리버의 화면을 통해 전장을 살폈다. 레스트를 장악한 괴물들은 적다고는 할 수 없는 숫자였다.
하지만 아벨리우스나 훗사르 부대에게 피해를 줄 정도는 아니었다.
괴물들의 공격은 아벨리우스의 방패를 뚫지 못했고, 훗사르 부대의 돌진을 막지도 못했다. 거기에 도시 곳곳에 자리 잡은 에머넌스 아처들이 척후 및 괴물들을 견제하는 역할도 했다.
굳이 마장기들은 전투에 참가할 필요가 없었다. 거대한 덩치로 인해 시가전에서는 오히려 도시를 부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다들 다양한 활약을 선보이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레스트 전투에서 가장 큰 공적을 쌓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아벨리우스들이었다. 지형에 영향을 받는 기병들과는 달리 보병들은 어느 곳에도 접근할 수 있었고 난전에서도 상당히 강력한 면모를 선보였다.
그리고 그런 아벨리우스 부대를 이끄는 인물은 다름 아닌 신윤아였다.
“힛! 이힛! 히끅!”
순식간에 쌓여가는 경험치에 신윤아는 자신도 모르게 딸꾹질을 내었다.
경험치의 획득에는 전쟁과 던전 토벌을 따라갈 수 없다고 하더니 정말이었다.
계속 이렇게만 시간이 흐른다면 B등급 클래스로 전직을 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다른 생명체를 죽이는 거에 아직까지 조금 거부감이 들었지만 괴물들은 달랐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갑작스러운 딸꾹질에 아벨리우스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관심을 보였다. 그런 아벨리우스들의 반응에 신윤아는 붉어진 얼굴로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히끅! 아, 아니 괜찮아요. 아무 것도. 흐끅.”
“잠시만 기다리세요. 물을 가져다 드릴게요.”
마치 대규모의 몬스터라도 나타난 듯 부산을 떨기 시작하는 아벨리우스의 행동에 윤아는 그녀들의 손에 이끌려 얌전히 있어야만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녀의 경험치는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었다.
레스트 성 점령전은 하루 만에 끝이 났다. 그리 큰 도시도 아니었을 뿐더러 아벨리우스와 훗사르가 파죽지세로 괴물들을 몰아붙인 결과였다.
“벼, 병사들이다! 훗사르야!”
“사파리에서 지원군이 도착한 건가? 어어? 엘프도 있잖아?”
괴물들이 사라지자 여러 사정으로 인해 레스트에서 도망치지 못하고 그들의 눈을 피해 숨어 살던 수인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연합군? 이게 가능한……. 설마?! 우끽?!”
“림드 산맥의 소환자가 분명해! 그들이 우리를 구원하러 왔어!”
“만세! 어쨌든 살았다! 우끼긱! 살았다!”
림드 산맥과 가까이 붙어 있는 영지인 탓일까? 수인들은 순식간에 레스트를 장악한 군대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병사들 중 다수가 수인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일까? 레스트의 영지민들은 자신들의 영지를 차지한 호의 병사들에 대해 별다른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괴물들을 물리친 병사들을 환영했고, 호의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인들의 환호를 받으며 호는 레스트 성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그러고는 눈에 드러나 광경을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엉망이네요.”
한시진이 말했다. 찢어진 카펫과 박살이 난 소파 등 온전한 가구가 하나도 없었다. 벽면 여기저기에 묻은 괴물들의 찐득한 체액도 그대로 눈에 들어오고 있었고, 더불어 악취도 심하게 났다.
“아무래도 괴물들이 드나들었을 테니까.”
“일단 청소부터 해야겠어요. 사람들을 불러올게요. 오빠는 다른 곳에서 쉬도록 해요.”
“쉴 곳이…….”
전부 괴물들과의 전투로 엉망이 되었을 거라고 말을 하려던 호는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한시진의 뒷모습에 입을 다물었다.
“어쩔 수 없지.”
일단은 한시진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호는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벽면에 몸을 기대어 레스트의 영지 정보창을 열었다.
<영지 정보(Status)>
레스트(촌락[E등급])-나크 평원
인구 -811
보유 리스 -13323
보유 식량 -212121
병사–아벨리우스(S) 9983, 훗사르(S) 9910, 에머넌스 아쳐(B) 9892.
내정 건물 -없음
군사 건물 -없음
리스 수입 -0 / 월
식량 수입 -0 / 월
특산품–바나나 잼
“엉망이로군.”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레스트의 상황은 호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괴물들 때문에 모든 도시 건물들이 박살이 나 있었고, 영지민도 고작 천 명이 되지 않았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레스트는 E등급에서 F등급으로 영지 등급이 하락할 게 불을 보듯 뻔했다. 보유 리스와 식량 역시 이번 원정대가 가져온 것에 불과했다. 그나마 원정이 길어질 것을 대비해 넉넉하게 챙겨온 게 다행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리스와 식량을 이용해 레스트를 발전시킬 생각은 없었다.
레스트의 발전은 일단 나크 평원 전체를 점령하고 난 후에야 이뤄질 일이었다. 천족들의 본대가 이 땅에 들어서기 전에 괴물들과 천족의 선봉대를 몰아내고 나크 평원에 자신의 깃발을 꽂아 넣어야 했다.
“여기 청소 좀 부탁드릴게요.”
얼마 안 있어 한시진이 일련의 무리들을 데리고 와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대부분 수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성내의 청소에 굉장히 익숙해 보이는 게 레스트 성에서 근무하던 수인들로 보였다. 덕분에 호는 깨끗해진 집무실에서 대략적으로나마 영지의 업무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레스트는 아침부터 분주해졌다. 별다른 휴식도 없이 호의 입에서 다시 출진 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수인들이 나크 평원에 세운 도시는 항구 도시 토리아를 포함해 다섯 곳이었다. 림드 산맥과 비교해 도시의 숫자는 같았지만, 나크 평원은 림드 산맥과 비교해 두 배가 조금 넘는 커다란 영토였다.
“병사들이 떠난다고?”
“그러면 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하루 만에 호의 군대가 떠난다는 소식에 레스트의 수인들은 불안함을 나타냈다. 하지만 곧 에스트라다에서 수인 영웅이 이끄는 병사가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에스트라다에서는 리젤 칼리노가 이끄는 부대가 출진한 상황이었다.
“전속력으로 이동한다.”
호의 다음 목표는 토리아 항구였다. 레스트에서 동쪽으로 닷새 남짓 이동하면 도착할 수 있는 도시였지만 호는 사흘 내에 토리아 항구를 점령할 생각이었다. 이동 조금 빡빡하기는 하겠지만 강행군을 개시하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토리아 항구는 나크 평원의 도시들 중에서도 무조건적으로 손에 넣어야만 하는 도시였다.
블루 스케일과의 거래 문제도 있었지만, 토리아 항구를 점령해야 천족이 바다를 통해 나크 평원에 상륙하는 것을 저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블루 스케일의 함대를 이끄는 도베르만 역시 토리아 항구를 모항으로 삼아 수월하게 보급을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레스트를 떠나 토리아 항구로 강행군을 개시한 지 이틀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크, 큰일 났어요!”
“……쿨럭. 무슨 일이야?”
엑스칼리버의 콕피트에서 늘어진 채 아무 생각 없이 마장기를 이동시키고 있던 호는 갑작스레 들려온 통신에 화들짝 놀라며 통신을 받았다. 통신을 보내온 이는 선봉에서 아벨리우스 부대를 이끌고 있는 신윤아였다.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인지 그녀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다급해 보였다.
“바, 방금 전!”
“진정 좀 하지?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당황해?”
“후우. 후우. 방금 전 다크 엘프들이 도착했는데, 천족들의 대부대가 토리아 항구에 나타났다고 해요!”
“……어?!”
순간 호의 엑스칼리버가 기우뚱 하다가 쿵하는 소리와 함께 균형을 잡았다.
“천족들이 토리아 항구에? 정확한 병력의 수는? 마장기는 포함되어 있대?”
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는 가볍게 넘길 사항이 아니었다. 천족들도 바보는 아닌 모양인지 토리아 항구가 나크 평원을 차지하는 데 있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곧바로 통신구를 통해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윤아가 다크엘프들에게 토리아의 상황을 물어보는 모양이었다.
“이거 공성전을 펼쳐야 하는 건가?”
“공성전이라. 쉽지는 않겠네요. 아벨리우스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훗사르는 공성전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잖아요?”
통신구를 통해 여기저기서 의견을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신윤아가 말했다.
“다행히 마장기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해요.”
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가장 위력적인 병기인 마장기가 보이지 않는다면 크게 걱정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윤아의 말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데?”
“토리아 항구에서 수인들의 군대가 천족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다고 해요.”
“어어……? 수인족의 군대는 신성력 폭발로 인해 전멸하지 않았던가?”
호가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좀 더 자세하게 상황을 파악해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