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
리그너스 대륙전기 193
“조인과 천족이라.”
둘 중 하나만 상대해야 한다면 충분히 해볼 만했다. 장기전은 힘들겠지만 자신의 모든 전력을 동원해 단기필승으로 전쟁을 마무리하면 어떻게든 두 영토를 차지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두 종족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마장기 전력은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부족한 수준도 아니었다. 하지만 넓어진 전선으로 인해 동시에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마장기의 수는 많아 봤자 네 기 혹은 다섯 기 정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엘프 왕국과의 대립 또한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 이벤트를 그냥 넘기기에는 조금 아쉬웠다. 신윤아는 모르는 것 같았지만 호는 리그너스 대륙전기를 플레이했던 경험으로 이 이벤트의 끝이 어떻게 마무리 되는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신성력의 폭주로 인해 만들어진 흉측한 괴물들. 몬스터나 다름없는 이 녀석들을 죽이게 되면 괴물들은 악취가 나는 끈적끈적한 체액을 쏟으며 땅으로 흡수가 되어 사라졌다.
여기서 포인트는 다름 아닌 악취가 나는 끈적끈적한 체액. 신성력의 폭주로 인해 만들어진 체액이 흡수된 땅은 몇 달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비옥한 옥토로 변한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천족들 역시 나크 평원과 페렛 습지대를 노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자신도 아는 이 사실을 신성력 폭주를 만들어낸 천족들이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나크 평원과 페렛 습지대를 얻으려면 결국 두 종족을 상대해야 한다는 건데…….”
호는 집무실의 의자에 기대어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성은 나크 평원과 페렛 습지대를 포기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두 영토를 차지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관리해야 할 도시는 많았다. 림드 산맥의 도시 특성화 계획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붉은 핏빛의 대지와 토갈론 요새를 비롯한 새롭게 손에 넣은 엘프 영지들은 아직 복구 작업이 한창이었다.
“에이. 모르겠다.”
호는 자신의 머리를 벅벅 긁었다. 기껏 정예 전력을 이끌고 왔지만 소득이 없이 돌아가야 할 판국이었다. 하지만 며칠 뒤, 호의 예상에는 없던 인물이 에스트라다를 찾았다.
* * *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윤호 님.”
외알 안경을 낀 청발의 여인이 호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그대는?”
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억에 남아 있는 영웅이었다. 남을 수밖에 없었다. 엘프 왕국과 볼 붸르니체스와의 싸움에서 큰 도움을 준 영웅이었다.
“스퀴드 수운다님의 참모 똘레오로군.”
“기억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똘레오의 표정에 의외라는 기색이 잠깐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카틀라스 군항의 영주인 스퀴드 수운다의 참모인 똘레오. B등급 영웅으로 그녀는 누님교에 속한 게이머들에게 인기가 좋을 것 같은 외모를 지닌 영웅이었다.
“나크 평원과 페렛 습지대에 큰 일이 벌어졌다고 들었습니다.”
“오자마자 본론인가?”
그렇게 말하면서 호는 속으로 놀랐다. 이제는 영주의 지위가 많이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다른 세력의 영웅을 향해 이런 농담도 스스럼없이 건네다니 말이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호 님의 대답을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 많아서요.”
“내 대답?”
의외의 대답에 호는 고개를 살짝 까닥였다. 이벤트인가 싶어 정보창을 열어 보았지만 딱히 나타나는 것은 없었다. 아무래도 똘레오의 입에서 직접 들어야만 할 것 같았다.
“내 대답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면 빨리 응대를 해줘야겠군. 그대의 말대로 나크 평원과 페렛 습지대에서 신성력의 폭주가 일어났다. 많은 수의 수인들이 괴물로 변했고, 난민들이 림드 산맥을 향해 실시간으로 몰려오고 있는 판국이지.”
호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 호의 대답에 똘레오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역시…….”
“역시?”
“천족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의외의 대답이 똘레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괴로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무슨 뜻이지?”
“신성력의 폭주는 세이라 클리퍼드 여왕님께서 다스리는 블루 스케일에서도 일어났습니다. 나크 평원이나 페렛 습지대만큼 큰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십여 명에 가까운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뭐?”
호는 입을 다물었다. 느낌이 이상했다. 지금의 상황은 신성력의 폭주라 불리는 이벤트가 진행 중인 상황이었다. 그리고 플레이어는 신성력의 폭주로 인해 변질된 괴물들을 물리치고, 괴물들의 체액으로 인해 지력이 상승한 땅에 농사를 지어 많은 식량을 획득할 수 있었다.
괴물은 마장기나 고 랭크의 병종만 있다면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약한 편이었다. 생김새가 징그럽기는 했지만, 징그럽다고 해서 강력한 것은 아니었다. 가상현실게임 내에서 유저가 얻는 이득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신성력의 폭주로 인해 도망친 난민들을 흡수해 영지민을 늘릴 수도 있었고, 덤으로 엉망이 된 주변 적대 도시들도 흡수할 수 있었다.
손해 볼 게 거의 없는 일명 꿀이나 다름없는 이벤트였다.
하지만 이 세계는 엄밀히 말해서 게임은 아니었다. 게임이라고 착각할 만큼 흡사한 세계이기는 했지만 본질은 조금 달랐다.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은데.”
잠시 편한 자세로 앉아 있던 호가 자세를 바로 했다.
“괴물이 처음으로 등장한 곳은 블루 스케일의 수도 사파이어였습니다.”
똘레오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건의 시작은 역시나 라헬교였다.
블루 스케일을 포함한 인간들의 왕국은 최근 자신들의 세를 넓히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성국 아이리스와 라헬교로 인해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라헬교에 빠진 영지민들은 왕이나 영주의 권력보다 자신이 믿는 신인 라헬을 더욱 우선시했고, 심지어는 가족들을 데리고 천족의 수도 프리테븐으로 향하기까지 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각국의 왕들과 영주들은 라헬교가 자신의 영지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했다.
“내 앞에서 라헬의 이름을 올리는 작자들은 골든 크로우의 발톱이 얼마나 무서운지 직접 확인시켜 주겠다.”
그리고 팔 왕국 중 가장 격렬하게 라헬교를 거부한 것은 이레네 아르티아가 있는 골든 크로우였다. 심지어 골든 크로우의 주력 부대가 아이리스 성국의 국경선에 배치되며 싸늘한 긴장감이 흐르기도 했다.
하지만 라헬교는 끈질겼다. 골든 크로우가 아니더라도 그들이 포교할 곳은 많았다.
그런 라헬교의 목표가 된 왕국 중 하나가 바로 블루 스케일이었다.
상단으로 정교하게 위장한 라헬교의 포교단이 블루 스케일의 수도 스완에 도착했고, 그들은 굶주린 백성들에게 공짜로 식량을 나눠주며 라헬의 이름을 알렸다.
“그렇게 식량을 섭취한 사람들에게서 신성력 폭주가 일어났군요. 멍멍!”
이야기를 듣던 중 로우덴이 끼어들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다행이군. 십여 명 정도면 피해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지. 나크 평원과 페렛 습지대는 완전히 괴물들의 천국으로 변해버렸어.”
“피해의 정도가 문제가 아닙니다. 호 님.”
“그렇겠지. 다른 곳도 아닌 세이라 클리퍼드 여왕이 있는 사파이어에서 벌어진 일인데.”
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유하자면 자국의 심장부에서 테러가 일어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세이라 클리퍼드가 온화한 성격의 군주라 하더라도 그런 상황을 그냥 넘길 리 만무했다. 하지만 아직 궁금증은 남아 있었다. 왜 스퀴드 수운다의 참모인 똘레오가 자신을 찾았느냐는 점이었다.
“저희 블루 스케일의 정보부에서 입수한 첩보입니다. 천족들이 나크 평원을 노리고 있습니다.”
말과 함께 똘레오는 가슴 안쪽에서 하나의 지도를 꺼냈다. 첩보? 그 말에 호는 똘레오를 향해 궁금증이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혹시 천족들이 조인들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은 알고 계십니까?”
똘레오의 말에 호는 고개를 저었다. 알 리가 없었다. 예전에 비해 세력이 커졌다고는 하지만 그뿐이었다. 팔 왕국 중 최약체라 불리는 블루 스케일한테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아니. 하지만 의외로군. 수인들과 천족들은 거의 원수지간 아니었던가?”
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탐욕스러운 조인이라면 천족의 도움 없이 나크 평원과 페렛 습지대를 전부 손에 넣으려고 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최근 수인 왕국의 전 영토에서 가뭄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사파리에서 대회의를 몇 번이나 개최했을 정도의 큰 가뭄이라고 하더군요.”
호의 눈썹이 미미하게 떨렸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시스템 메시지도 알려주지 않았던 정보였다. 수인 왕국을 강타한 대기근. 가볍게 넘길만한 정보가 아니었다.
‘영지가 안정되면 빨리 정보부도 창설해야겠어.’
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은신의 귀재인 다크 엘프들도 있는 만큼 정보부의 창설은 어렵지 않을 터였다.
문제라면 정보부의 수장이 될 영웅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 어울릴 만한 영웅은 공략집을 찾아보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가뭄 때문에 조인들이 천족들과 손을 잡았다?”
“그렇습니다. 블루 스케일의 정보부에서는 천족들과 조인족 사이에서 어떤 거래가 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로 이천 만 가량의 식량이 주비어스에서 디치 플레이스만으로 수송되었습니다.”
“무시무시한 양이로군.”
호는 혀를 내둘렀다. 이는 분명 중앙의 도움이 있었을 터였다. 특성화가 아닌 이상 주비어스라는 하나의 영토에서 생산되는 식량의 양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거기에 천족들은 나크 평원과 페렛 습지대의 괴물들을 자신들이 정리해 준다고 한 모양입니다.”
“그 대가로 나크 평원은 자신들이 손에 넣고 페렛 습지대는 조인들이 가진다 이건가?”
“그렇습니다.”
호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불길이 타올랐다. 정말로 호감이 안가는 녀석들이었다. 의도야 어찌되었든 결과만 따지고 보면 결국 그들은 나크 평원을 손에 넣기 위해 수인족의 영토에 괴물들을 만들어 낸 셈이었다.
“그래서 블루 스케일은 어떻게 할 셈이지? 그냥 나를 찾아온 것은 아닐테고…….”
“세이라 클리퍼드 여왕님께서는 천족들에게 경고를 내리고 싶어 하십니다.”
“전쟁인가?”
“그렇습니다. 전쟁입니다.”
똘레오의 대답에 호는 전쟁이라는 단어를 입에서 되풀이 했다. 두 글자의 단어 하나가 혓바닥에 들러붙고 있었다.
곧바로 지도가 펼쳐졌다.
나크 평원과 페렛 습지대를 중심으로 한 지도였다. 페렛 습지대 우측으로는 조인족의 영토인 디치 플레이스만이 있었고, 그 위 일자 모양으로 길쭉하게 빠진 영토는 천족들의 땅인 주비어스였다.
그리고 똘레오는 나크 평원의 가장 북쪽에 있는 한 도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크 평원의 유일한 항구도시 토리아였다.
“흠.”
호는 문득 똘레오가 아니 세이라 클리퍼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구도시 토리아. 카틀라스 군항을 가지고 있는 블루 스케일로써는 충분히 손에 넣고 싶은 도시일 터였다.
카틀라스만 안쪽까지 깊숙하게 침범하는 해적들을 바깥쪽에서 물리칠 수 있는데다가 외해로 나갈 수 있는 발판으로 삼을 수도 있었다. 거기에 전쟁이 끝나면 천족과 수인들을 이용한 삼각 무역도 기대할 수 있었다.
“확실히 블루 스케일의 입장에서는 탐나는 도시겠군.”
“정확히 말하면 스퀴드 수운다님께서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블루 스케일은 군대가 통과할 수 있는 길을 빌려달라고 말하는 건가?”
카틀라스 군항에서 토리아까지 가려면 디르시나, 에스트라다가 있는 림드 산맥을 거쳐 나크 평원에 도착해야했다. 뭐, 그 정도라면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블루 스케일이었다. 블루 스케일은 호가 볼 붸르니체스와 엘프 왕국의 전쟁에서 두 개 편대의 마장기를 지원해줬을 정도로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세력이었다.
“아닙니다. 블루 스케일의 육상 전력은 괴물들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이 없습니다.”
“…….”
그러면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호의 시선이 똘레오에게 향했다. 여러 가지 상상이 빠른 속도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때였다.
“멍멍! 블루 스케일은 지금 우리에게 병사를 빌려달라는 것입니까? 멍?”
옆에서 들려온 개소리에 호의 시선이 로우덴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똘레오가 고개를 끄떡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