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
리그너스 대륙전기 190
“일단은 돌아가자.”
그린 드래곤을 찾아 퓨리온의 산맥까지 방문한 보람은 있었다. 하지만 퀘스트를 계속해서 진행해 나가기 위해서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레피스트 퓨리온을 만나고 림드 산맥으로 돌아가던 도중 호는 바리안스 대지의 패자인 리셴르나가 있는 아트리그를 들렀다. 어차피 지나가는 길이기도 했고, 퓨리온의 산맥까지 갈 수 있도록 여행을 도와준 것에 대해 그녀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훗날 세계수의 가지를 구하게 되면 다시 한 번 퓨리온의 산맥을 방문해야 하는 만큼 그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꺼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트리그에 도착한 호 일행을 반긴 것은 리셴르나가 아닌 다른 수인 영웅이었다.
“안타깝지만 리셴르나 님은 현재 커티삭에 주둔하고 계십니다.”
“커티삭?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트리그의 영주로 생각되는 호인족 영웅의 말에 호가 물었다. 수인 왕국을 이루는 부족 중 하나인 호인들은 다들 괄괄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눈앞의 호인 남성은 관록이 느껴질 정도로 굉장히 침착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마족들이 도발 때문입니다.”
“설마? 본격적인 공격입니까?”
잠시 침음성을 흘린 호가 힘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마치 수인들이 위험에 빠지면 자신들이 나서서 도와주겠다는 뉘앙스가 느껴질 정도였다.
“아닙니다. 단순한 도발로 보입니다. 하지만 커티삭의 방어 체계가 워낙 좋지 않은 만큼 리셴르나 영주님께서 직접 커티삭으로 향하셨습니다. 호 님의 방문에 대해서는 제가 직접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호 역시 커티삭까지 이동해 리셴르나를 만날 생각은 없었다. 영지를 비운지도 꽤 오래된 만큼 하루라도 빨리 영지에 도착해 주변상황을 보고 받아야 했다. 다행히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엘프들의 공격이 한 번 있기는 했는데, 어렵지 않게 물리칠 수 있었어요.]
[멍멍. 오랜만에 뵙습니다! 영주니임! 해머스의 특성화 개발은 이제 곧 종료가 될 것 같습니다. 멍! 벌써부터 해머스가 대륙에서 손꼽이는 광산 도시로써 이름을 떨칠 날이 기대가 될 정도입니다.]
그리고 호가 킬리드에 도착한 순간,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편지들이 집무실로 쏟아졌다.
대부분 영지 발전에 대한 보고들이었지만, 사적인 내용들이 담겨 있는 편지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도 자신이 없는 동안 큰 변화는 없는 것 같았다.
한시진의 말에 따르면 토갈론 요새를 향한 엘프들의 공격이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마장기가 출전하지 않는 국지전 수준에서 끝이 난 것 같았다.
여행을 함께했던 SS등급 영웅 브로리가 다시 그녀와 함께 할 터. 그렇다면 엘프들이 본격적으로 덤벼든다 해도 어느 정도는 상대할 수 있을 터였다.
거기에 토갈론의 요새와 경계를 맞대고 있는 아멘드마에는 병력 충원이 한창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갔던 것은 아니었다. 위가 뚫린 동그라미라는 특이한 마크를 그려놓은 편지의 모습에 편지를 작성한 영웅의 이름을 살펴본 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이거 코뚜레 그려놓은 거야?”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편지를 보낸 주인공은 현재 에스트라다에 주둔하고 있는 우인 영웅이었다. 자신의 휘하 영웅 중에서는 최하 등급에 불과한 F등급 영웅이었다가 한 단계 진화해 이제는 E등급 영웅이 된 웃소였다.
[푸르르. 움머억. 위대하신 영주님에게. 에스트라다와 인접해 있는 원인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많은 수의 수인들이 나크 평원을 통해 에스트라다로 피난을 오고 있습니다. 뭔가 이상한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음머.]
“그 녀석들. 무슨 꿍꿍이지?”
편지지에 담겨 있는 내용은 가볍게 웃고 넘길 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 * *
수십 년 전까지, 원인족은 수인 왕국을 이루는 중심 부족 중 하나로 수인 왕국 내에서도 큰 목소리를 내던 부족이었다.
하지만 최근 원인들은 사파리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인 중심 부족 자리에서 밀려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수인 왕국을 이루는 많은 종족들이 원인족의 능력에 대해 불신과 적대감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누구를 탓할 것은 아니었다. 인간들과 견인족의 전쟁에서 원인들이 보여준 비겁한 행동은 다른 수인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기에 충분했다. 당연하게 수인 내 다른 종족들과 불화가 생겨났고,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배척된 게 이유라면 이유였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원인족의 세가 크게 꺾이게 된 이유는 바로 호와의 전쟁 때문이었다.
림드 산맥이라는 영토를 통째로 빼앗긴데다가 연이은 전투의 패배로 원인들이 잃은 마장기만 해도 열기가 넘었다. 아무리 원인들이 수인 왕국의 중심 부족 중 하나라고 해도 열기나 되는 마장기의 손해는 제법 큰 타격이었다.
거기에 림드 산맥에서 목숨을 잃은 많은 수의 병사들도 만만치 않은 피해였다.
“크후욱! 원인들이 계속해서 중심 부족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림드 산맥의 인간들을 몰아내야 해!”
원인족의 부족장인 버독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야만 계속해서 원인들이 수인 왕국의 중심 부족으로서 살아갈 수 있었다.
수인 왕국 내부에서도 적이 많은 원인들이 중심 부족에서 밀려날 경우 그 미래는 불을 보듯 뻔했다.
“우끼끼. 하지만 예전의 림드 산맥이 아닙니다. 에스트라다만 해도…….”
그런 버독을 향해 참모인 타레스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호의 지배 하에서 림드 산맥은 환골탈태라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로 큰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더 이상 림드 산맥은 예전의 낙후 지역이 아니었다. 경계 지역 곳곳에 마장기들이 배치되었고, 고 랭크 병사들이 순찰을 도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카니앗산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우끽. 그리고 카니앗산이 수성전에서 보여주는 위력은…….”
타레스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러고는 힘없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제는 상대의 힘을 인정해야만 했다.
“……?”
그렇게 말을 하던 타레스는 갑작스레 보이는 거대한 그림자에 이상함을 느끼고는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자신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때 큼지막한 손이 타레스의 얼굴을 붙잡았다.
“우끼기기기긱!”
타레스의 얼굴을 붙잡은 버독은 사과를 으깨듯 손아귀에 힘을 꽉 주기 시작했다. 두개골이 부서질 것 같은 통증에 타레스가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렀다. 그렇게 잠시 후, 타레스의 몸이 추욱 가라앉았다. 기절한 것이다.
“겁쟁이 같은 놈.”
타레스를 기절시킨 버독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상대를 인정해야 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상대는 약해빠진 인간이었다. 그것도 소환자. 수인들 사이에서 애완동물로 취급되는 다람쥐 부족보다도 약해빠진 게 바로 소환자라는 존재였다.
물론 돌연변이라는 존재가 있듯이 호라는 인물은 버독도 조금 인정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곁에는 버독 본인도 무시할 수 없는 실력자들이 포진해 있었다.
하지만 원인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자신은 호를 무너뜨리고 림드 산맥을 다시 되찾아야만 했다. 호에게 패배했다는 것은 결국 소환자에게 패배한 것과 동일한 말이었고, 그것은 결국 원인의 무능이라는 결론이라는 분위기가 수인 왕국 내부에서 흐르고 있는 판국이었다.
“뭔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해. 크후욱.”
원인족의 부족장인 버독은 멍청한 수인 영웅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림드 산맥의 패자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딱히 방법이 없었다. 다른 수인들과 연합을 하기에는 왕국 내부에서 원인들의 평가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게다가 최근 묘인족이 림드 산맥의 패자와 가깝게 지내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정보도 있었다.
“크후욱.”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크훅. 그래. 우리도 림드 산맥의 녀석과 동일한 수를 쓰면 되는 거였어. 천족에게 도움을 요청해야겠다.”
슬슬 정신이 드는 것인지 기절했던 타레스의 몸이 크게 꿈틀거릴 때 쯤 앉아 있던 버독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페렛 습지대에서 출발한 원인들의 사신이 천족의 영토로 향했다.
“우리는 돈과 식량을 원하지 않습니다.”
원인의 사신에게서 모든 이야기를 들은 천족이 온화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땅은 곤란한데…….”
“땅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전선이 불필요하게 넓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대들의 땅에 라헬 여신님의 이름만 알릴 수 있도록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크후훅. 좋소.”
그리고 버독의 제안을 받아들인 천족의 군대가 원인족의 영토인 나크 평원과 페렛 습지대에 도착했다.
천족의 마장기와 함께 군대가 주둔했고, 그것을 본 버독은 림드 산맥 공략을 위해 박차를 가했다. 여러 도시에서 계속해서 세금이 징수되었고, 이렇게 징수된 돈들은 전부 마장기와 고위 병종의 양성으로 쓰였다.
“또 세금이냐? 우끼긱?”
“언제까지 바나나를 뺏어갈 거냐? 바나나! 바나나!”
“우리에게 버내노우를 달롸우!”
가혹한 세금은 영지민들의 불만을 불러 왔다. 가뜩이나 계속된 전쟁으로 인해 영토가 피폐해진 상황인터라 곳곳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수인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우끼긱. 버독님. 굶는 수인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영지민들이 우리 영토를 떠날 것입니다. 우끽!”
참모인 타레스의 조언이 이어졌지만 버독은 요지부동이었다. 하지만 죽으라는 법은 없던가? 의외의 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이어졌다.
“우끼?! 처, 천족들이 식량을 나눠준다!”
“우끼익! 바나나! 바나나는 있는가!”
나크 평원과 페렛 습지대에 주둔하고 있던 천족의 군대가 자신들의 식량창고를 연 것이다. 굶주린 많은 수인들이 천족들에게 도움을 받았고, 여신 라헬의 은총을 받았다. 그렇게 모든 문제가 좋게 해결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느 날 밤, 나크 평원의 도시 중 하나인 마웅키에서 재앙은 시작되었다.
캬아아아악!
천족이 나눠준 식량을 먹던 원인 하나가 자신의 목을 부여잡더니 비명을 내질렀다. 주위에 있던 수인들이 흠칫 놀라 자리를 피했을 정도의 끔찍한 비명이었다. 그와 함께 돌연 원인족의 몸이 밝은 빛을 내기 시작했다.
“저, 저게 뭐야?!”
“음식을 먹다가 비명을 질렀어!”
“그래? 그렇다면 이거 먹으면 안 될 거 같은데……. 우끽?!”
자신의 목을 부여잡던 원인에게서 퍼져 나온 빛은 너무나도 강렬해서 제대로 눈을 뜨기가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빛이 잦아들고 난 이후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야말로 악몽에서나 나올 법한 괴물이었다.
그 모습에 주위에 있던 수인들은 공포에 몸을 떨었다. 썩은 듯 텅 비어 있는 눈동자가 한때 친구였던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윤기 있던 털들은 전부 사라졌고, 푸르딩딩하게 변해버린 피부에 생겨난 징그러운 물집들이 하나둘씩 터지면서 끈적끈적 괴물의 피부를 타고 고름들이 흐르고 시작했다.
“도, 도망쳐야 돼!”
“천족들! 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준 거……. 키이이익?!”
비명은 하나가 끝이 아니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고통에 찬 수인들의 비명과 빛들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끔찍한 괴물이 하나둘씩 마웅키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그들은 도시 내에 머무르고 있던 멀쩡한 수인들을 잔인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끔찍한 괴물들의 손에 죽은 수인들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크, 큰일이다!”
이 소식을 들은 타레스는 곧바로 버독을 찾았다. 하지만 버독의 집무실에 도착한 타레스는 부리나케 그 자리에서 도망을 쳐야 했다.
강렬한 빛이 버독의 집무실을 가득 메웠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