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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너스 대륙전기-189화 (189/522)

# 189

리그너스 대륙전기 189

자박자박.

그렇게 전장 정리를 하면서 얼마나 시간을 보냈을까?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지면서 주변과 함께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호의 귀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레피스트 퓨리온인가?’

그리고 그런 자신의 예상이 맞다는 듯 호의 귀로 익숙하지 않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가 이들을 이끄는 자인가요?”

“그렇습니다.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윤호라고 합니다.”

호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지 퓨리온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리고 호는 어째서 그녀가 그런 표정을 보이는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퓨리온은 호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흠흠. 여신 라헬에게 소환된 이 세계에서 온 존재라고 들었어요.”

퓨리온의 눈동자가 잠깐 윤아에게로 향했다.

“그대의 세상에는 위대한 드래곤이 없는 모양이죠?”

목소리에 화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궁금함이 가득 담겨 있을 뿐이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드래곤은 전설 속에서만 등장하는 존재입니다. 직접 눈으로 본 것은 지금이 처음이죠.”

“그런가요? 당신이 있던 세계는 어떤 세계죠?”

“설명하자면 굉장히 깁니다만…….”

호는 일부러 자신이 살던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귀찮게 드래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생각은 없을뿐더러 자신이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크리솔라이트의 꿈이라는 SS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해서였다.

“괜찮아요. 아, 이야기가 꽤 긴가 보죠? 그러면 제 레어로 초대할게요. 먹을 것도 있고, 침실도 있는데다가 꽤나 큰 공간이니 여기 있는 생명체정도는 함께 머무를 수 있답니다.”

하지만 눈앞의 여인 아니 드래곤은 눈치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 * *

결국 호는 자신이 살던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어느 정도 각색해 퓨리온에게 이야기를 해줘야만 했다. 궁금한 게 굉장히 많은지 호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녀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고, 그럴 때 마다 호는 앞으로의 동료가 될 지도 모르는 드래곤의 호감도를 위해 최대한 친절히 답을 해주었다.

그리고 그런 호의 행동은 어느 정도 맞는 행보였다. 호의 이야기를 듣던 퓨리온은 자신에 대해서도 조금씩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고, 그런 그녀의 이야기 속에서 크리솔라이트의 꿈 퀘스트의 다음 단계를 어떻게 진행시켜야 할지에 대한 힌트들이 담겨 있었다.

“자신의 부족이 아닌 다른 부족에 굉장히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는 엘프들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엘프들이 있다니 굉장히 충격적이네요. 역시 세월은 많은 것을 변화시키는 모양이네요.”

“그런 이유 때문에 현재 크리솔라이트 부족이 저와 뜻을 함께 하고 있지요.”

“알르드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호의 대답과 함께 퓨리온의 눈매가 활짝 호선을 그렸다.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설정에 따르면 그린 드래곤은 숲과 평화를 사랑하는 존재라고 나와 있었다. 그래서일까? 순수함이 느껴지는 눈앞의 예의바른 드래곤은 모든 종족이 함께하는 이상향 알르드에 대해 꽤나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럼 그대가 이 퓨리온의 산맥을 찾은 이유는 산맥에 살고 있는 크리솔라이트 부족을 데리고 가기 위함인가요?”

“반은 그렇습니다.”

“반?”

고개를 갸웃하는 퓨리온을 향해 호가 씩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자신의 영토를 노리는 엘프와의 트러블과 수인, 마족의 위협을 조금 과장시키며 이상향이 위험하다는 호의 내용에 퓨리온의 표정도 시시각각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호가 퓨리온의 산맥을 찾은 이유는 어디까지나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레피스트 퓨리온을 동료로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능력 하나 빠지지 않는 만능의 SS등급 영웅. 게다가 영지에 용족과 관련된 건물 및 병사를 양성할 수 있게 해주는 최고의 동료였다.

[호감도를 높인 크리솔라이트 부족의 엘프와 대화를 나눈 레피스트 퓨리온은 유저에게 굉장한 호기심을 보입니다. 게다가 수면기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 물정도 모르기까지 합니다. 그런 드래곤의 입에서 도와주겠다는 말과 함께 생명수의 가지를 가져달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Tip. 그린 드래곤은 굉장히 자애롭습니다. 크리솔라이트 부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인정에 호소하는 게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퓨리온 몰래 공략본을 읽어본 호가 눈앞의 잔에 담겨 있는 물로 입가심을 하고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네, 그렇습니다. 사실 퓨리온 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제 도움 말인가요?”

퓨리온의 초록색 눈동자가 호를 또렷하게 바라보았다. 순수함이 가득 담겨 있는 것 같은 투명한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호는 퓨리온에게 자신의 모든 것이 까발려 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렇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아시다시피 전 소환자입니다. 이 대륙을 다스리는 여덟 종족과는 다른 존재죠.”

“일곱입니다. 드래곤들은 중도를 지키는 자들. 대륙의 패권에는 관심이 없답니다.”

퓨리온의 말에 호는 움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세력 판도에 큰 획을 긋는 이벤트 중 하나인 드래곤의 발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증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궁금증은 어디까지나 머릿속 생각으로만 가져야 했다.

“죄송합니다. 실수했네요.”

“이해해요. 그대가 살던 곳에는 드래곤이라는 존재들이 없으니까요. 몰랐던 게 당연해요.”

진지하게 말하는 퓨리온의 대답에 호는 머쓱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어쨌든 저는 소환자인 까닭에 이 세계의 일곱 종족에 대해 딱히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마족과 천족이 맹목적으로 서로를 적대하는 것과는 달리 저는 마족은 물론이고 천족과도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거죠.”

“아아.”

“게다가 기본적으로 전 평화를 사랑합니다. 제가 사는 세계에는 전쟁이라는 것을 찾아보기 힘들거든요.”

찾으려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호가 살던 대한민국은 전쟁과는 거리가 멀었다. 북한이 있다고는 하지만 호가 군대에 있을 때도 사회에서 생활을 할 때도 북한의 존재는 직접적으로 호의 생활에 있어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세계에 끌려온 이후 대륙에 살고 있는 종족들의 불화를 본 순간…….”

“잠깐!”

퓨리온이 눈을 깜빡였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호의 말에 제법 충격을 받은 모양새였다.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이 세계에 끌려 왔다고요?”

“그렇습니다. 잠을 자다가 일어나니 이 세계에 존재하는 선택의 신전이 눈에 보이더군요. 제 의지는 없었습니다.”

“말도 안 돼……. 여신 라헬이 그런 행동을 했다고요?”

“……그 말도 되지 않는 일을 겪은 사람이 저입니다. 아니, 저뿐만이 아니죠. 그중에는 소중한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습니다.”

여신 라헬을 떠올린 호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라헬은 대체 무엇을 생각하는 거지?”

잠시 생각에 잠긴 퓨리온의 고운 눈썹이 크게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녀는 딱히 소환자들의 상황을 타개할 의지는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다 해서 호가 퓨리온에 대해 실망스럽다는 감정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고작 드래곤 하나가 나선다고 해서 무언가가 바뀔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이야기를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자신의 말에 퓨리온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어쨌든 저는 대륙에 살고 있는 종족들의 불화를 본 순간, 그들이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알르드라 불리는 이상향을 만들 수 있었죠.”

이 모든 것이 플레이어의 능력이었다. 하지만 호는 마치 자신이 해낸 것인 마냥 말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퓨리온의 의심을 살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실제로 그는 엘프와 수인 영웅을 동시에 동료로 삼고 있었고, 림드 산맥과 붉은 핏빛의 대지에 걸쳐 있는 영토에도 인간들을 비롯해, 마족, 드워프, 수인등 여러 종족들이 서로 어울리는 생활 터전을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그런 알르드를 구성하는 종족에 크리솔라이트 부족이 있습니다. 그리고 크리솔라이트 부족은 전에 말씀드렸던 전쟁으로 인해 엘프들의 위협에 처해 있는 상황이죠.”

“아이러니하네요. 엘프가 엘프들의 위협에 처해 있다니…….”

호가 말하고 있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퓨리온의 오른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크리솔라이트 부족은 소규모의 부족입니다. 엘프 왕국의 위협을 당해낼 수 없죠. 알르드에 살고 있는 모든 종족들이 힘을 합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산맥에 있는 엘프들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 찾아왔다?”

“아까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반은 맞습니다.”

호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퓨리온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저는 과거 크리솔라이트 족의 수호자였던 레피스트 퓨리온 님. 당신의 도움을 원합니다. 부디 위기에 처한 크리솔라이트 부족을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호의 말에 퓨리온은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런 퓨리온의 모습을 보며 호 역시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말빨이 좀 더 좋았더라면 그녀를 쉽게 설득했을까?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이미 말은 꺼냈고, 남은 것은 그녀의 생각을 기다리는 일 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퓨리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

“후. 운이 좋았어.”

레피스트 퓨리온과의 만남은 반은 성공, 반은 실패였다. 그래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었기에 호는 그녀와의 만남이 어느 정도 만족스러웠다. 특히나 정체되어 있던 퀘스트의 내용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게 결정적이었다.

띵동.

-그린 드래곤 레피스트 퓨리온은 과거 자신이 수호했던 엘프들이 동족의 위협으로 인해 불안에 떨고 있다는 사실에 굉장히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불안이 동족의 위협뿐 아니라 엘프들의 정신적인 지주나 다름없는 세계수의 부재에서 나온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어? 뭐야?”

그리고 퓨리온의 레어에서 배정받은 방의 문을 연 순간 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의 방에는 퓨리온의 산맥까지 함께한 여러 동료들이 어느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요?”

문을 열고 호가 모습을 드러내자 안에서 동료들과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던 윤아가 물었다. 엘 샤난도 귀를 쫑긋 세웠다.

“크리솔라이트 부족의 위험을 못 본 체할 수는 없다고 하더군. 세계수의 가지를 구해오면 도와준다는 대답을 들었다.”

“세계수의 가지요?”

“그래.”

대답과 함께 호는 아까 전 퓨리온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퀘스트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그린 드래곤 레피스트 퓨리온은 크리솔라이트 부족을 도와달라는 자신의 부탁에 세계수의 가지를 가지고 오면 도와준다고 말했고, 그 내용은 퀘스트 창에 정리되어 나와 있었다.

“세계수의 가지라. 듣기만 해도 희귀해 보이는데요. 역시 드래곤의 도움을 얻는 건 쉬운 일이 아닌 건가?”

“유나, 세계수의 가지. 리젤, 드른 적이 있어오. 엘프드르 보물이에오.”

“나도 그렇게 들은 것 같은데. 냥. 그런데 그 세계수의 가지는 어디서 구해야 되죠?”

모두들 고개를 갸웃했다. 호 역시 자연스럽게 손이 공략본으로 향하고 있었다. 리그너스 대륙전기의 엔딩을 보긴 했지만, 대륙의 모든 정보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공략본의 내용을 살펴보던 호는 쓰게 웃었다.

세계수의 가지는 엘프들의 수도 트오세에서만 생산되는 희귀한 특산품이었다. 거기에 SSS랭크의 엘프 궁수를 양성하는 데도 필요한 특산품이라고 나와 있었다.

‘이거 곤란하게 됐는데?’

공략본을 확인한 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세계수의 가지는 자신의 전속 상단인 디아린 상단을 통해서도 구하기가 힘들 것 같은 특산품이었다.

디아린 상단이 자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상단이라는 것을 엘프가 모를 리 없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수도인 트오세에서만 생산되는 희귀한 특산품을 엘프가 아닌 다른 종족의 상단에게 판매를 할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크리솔라이트의 꿈 퀘스트의 다음 단계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세계수의 가지를 구해 퓨리온에게 전달해 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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