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
리그너스 대륙전기 188
“드래곤의 힘이라. 큰 도움이 되긴 하겠군.”
“그렇겠지?”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 호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알아본 정보에 따르면 퓨리온의 산맥에서 그린 드래곤인 레피스트 퓨리온을 만나기 위해서는 드래곤의 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다고 들었어.”
“드래곤의 시험?”
“그래. 킬리드의 성에서 발견된 문서에 나와 있는 내용이야. 하지만 그게 어떤 시험인지는 나도 잘 몰라. 다만, 위험한 시험이라는 말이 있으니 긴장해야 할 거야.”
호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곧 있으면 퓨리온의 산맥에 도착하는 만큼 그냥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호는 퓨리온의 산맥에 도착한 순간 드래곤의 시험이 무엇인지를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바로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 때문이었다.
띵동.
-SS등급 퀘스트인 크리솔라이트 꿈 이벤트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린 드래곤 레피스트 퓨리온이 당신들을 감지했습니다. 곧 드래곤의 시험이 시작됩니다.
-S등급 던전. 퓨리온의 분노가 발생합니다.
콰오오오오!
이어서 수십 개의 확성기에서 동시에 소리가 나는 것처럼 커다란 포효가 산맥을 뒤덮기 시작했다.
“큿…….”
귀를 찌르는 그 음성에 호는 손을 들어 자신의 귀를 막았다. 호 뿐만 아니었다. 윤아도 리젤도 심지어 엘 샤난도 마찬가지였다. 멀쩡해 보이는 것은 SS등급의 영웅 브로리뿐이었다.
-곧 드래곤의 포효를 들은 몬스터들이 달려들 예정입니다. 빠르게 전투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잠시 후, 먹먹했던 귀로 다시금 소리가 들려올 때 쯤 붉은색의 메시지가 호의 눈앞에 떠올랐다.
“전투 준비! 마장기 오너들은 모두들 마장기에 탑승해! 몬스터들이 몰려올 거다!”
SS등급의 퀘스트인 크리솔라이트의 꿈. 그 3단계에 대한 설명에서 나오는 드래곤의 시험, 퓨리온의 분노라는 던전은 바로 몬스터들의 웨이브였다.
* * *
쿠우웅!
거대한 거인의 돌격을 몸을 막아내는 순간 B등급 마장기 엑스칼리버가 넘어질 듯 크게 휘청거렸다. 하지만 호는 바로 균형을 잡고는 자신에게 달려든 상대를 노려보았다. 맹수처럼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괴물은 키클롭스라는 이름의 거인이었다.
“어째서 B등급 이상의 마장기가 두 대나 필요한 지 알 것 같네. 저 빌어먹을 녀석.”
말과 함께 호는 엑스칼리버의 보조무기인 마나 단검을 역쉬로 쥐며 자신의 적을 노려보았다. 관우는 내 여자의 공략본에 마장기가 필요하다고 적혀 있는 이유는 바로 눈앞의 저 괴물 때문인 게 틀림없었다.
모습을 드러낸 키클롭스는 총 넷. 그중 둘은 이미 브로리의 손에 목숨을 잃었고, 나머지 하나 역시 리아 캬베데의 릴라릴라가 상대하고 있었다.
“지원하마!”
“아니, 괜찮아. 사방에서 달려드는 몬스터들이나 좀 처리해줘.”
통신구에서 들려오는 브로리의 목소리에 호는 머리를 흔들었다. 공략본에 따르면 퓨리온의 분노는 B등급 마장기로도 충분히 시험을 통과할 수 있다고 나와 있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실력이 뛰어난 오너라면 C등급 마장기로도 제압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저 녀석 하나도 물리치지 못하면 쪽팔린 일이지.”
힘껏 숨을 들이 킨 호는 눈을 번쩍 뜨고는 조종간을 앞으로 밀기 시작했다.
샤아아악!
날카로운 단검이 허공에 휘둘러지며 거대한 마장기와 거인이 벌이는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하늘 위에서 한 여인이 치열한 전투가 펼쳐지는 격전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져서 찾아왔더니만 엑스 칼리버라니. 인간들이 쳐들어 온 건가?”
하지만 여인은 곧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하기엔 황금빛을 띄는 수인의 마장기가 눈에 걸리고 있엇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콰아아앙!
“…….”
날렵한 외형을 지닌 마장기가 쏜 화살이 미노타우르스를 곤죽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었다.
엘프의 B등급 마장기 윈드라이더였다. 마족과 수인 거기에 엘프의 마장기가 한 데 힘을 합쳐서 자신이 내보낸 몬스터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환상은 아닐 테고. 잠시 잠들어 있는 동안 세상이 변한 건가? 서로 원수나 다름없는 저 세 종족이 힘을 합쳤다고?”
인간 여인의 모습을 한 그린 드래곤, 레피스트 퓨리온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그린 드래곤이 혼란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몬스터들은 마장기들의 공격에 수수깡처럼 쓸려나가고 있었다.
우두둑!
마장기의 날카로운 단검이 커다란 거인 키클롭스의 목에 박히며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름 퓨리온의 산맥에서는 힘깨나 쓴 강인한 존재겠지만, B등급 마장기 그것도 마장기의 오너로서는 베테랑이나 다름없는 호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췩! 췩! 취이익!
쿠아아아아아!
그와 함께 몬스터들의 눈빛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자신들을 이끄는 존재나 다름없었던 키클롭스들이 죽는 순간, 어느 정도 현실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모습이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이 세계의 몬스터들이 아무리 흉악하고 무서운 존재라고 해도 그건 평범한 사람들에게나 통용되는 이야기였다. 하물며 퓨리온의 산맥이라는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곳이라 해도 말이다.
리그너스 대륙의 강력한 전쟁병기인 마장기와 전장의 재앙이라고 불리는 훗사르의 앞에서는 흉포한 몬스터들도 어른 앞의 갓난아이에 불과했다.
“역시나 공략본에 나와 있는 대로군. 키클롭스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렵지 않았겠는데, 키클롭스 때문이라도 B등급 마장기 두 대 정도의 전력은 필요하겠어.”
그 때문에 안전을 위해 추가적으로 윈드라이더를 한 기 더 추가하고 병력들도 S랭크 병종으로 구성한 건 확실히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슬 정리도 되어가는 모양이로군.’
용맹한 수인의 기병대인 훗사르들은 겁을 먹고 도망치는 몬스터를 학살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기병이라는 이점을 사용하기 위해 완만한 구릉지대에 자리를 잡았던 까닭에 100%는 아니지만 훗사르의 기동력을 어느 정도까지는 살릴 수 있었다.
그러던 도중 퀘스트의 성공 메시지가 호의 눈앞으로 나타났다. 몬스터들의 수가 제법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퀘스트가 성공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키클롭스들을 물리치는 게 이번 퀘스트를 해결하는 키포인트였던 모양이었다.
[4단계–레피스트 퓨리온, 과거 크리솔라이트 부족의 수호자였던 드래곤과 호감도를 높인 엘프를 만나게 해야 합니다.]
“……어떻게?”
그리고 관우는 내 여자의 공략본을 확인한 호는 얼굴을 구겼다. 이 드넓은 산맥에서 그린 드래곤을 찾는 일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나 다름없었다.
더군다나 엘프와 원인과의 사이가 좋지 않은 지금의 상황에서는 산맥에서 머무를 만한 시간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런 호의 걱정은 잠시 후 사라지고야 말았다.
콰아아아아!
산맥이 떠나갈 것 같은 엄청난 포효가 귓전을 쩌렁쩌렁하게 울려왔다. 드래곤 피어였다. 그와 함께 엄청난 바람이 몰아들었다.
“드래곤이다!”
“호 님을 지켜라!”
리그너스 대륙 최강의 생명체. 드래곤의 등장이었다. 그와 함께 언제나 듣던 익숙한 알림음이 다시 한 번 호의 귓전을 울렸다.
띵동.
-그린 드래곤 레피스트 퓨리온과 조우했습니다.
-퓨리온 산맥의 수호자인 레피스트 퓨리온은 자신의 레어나 다름없는 퓨리온 산맥을 찾아온 군대에 적대감을 보입니다.
‘뭐, 뭐야?!’
호의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적대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바보는 아니었다. 눈앞의 거대한 생명체는 자신들에게 적의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곤란해도 굉장히 곤란했다.
제대로 된 조합도 짜지 않은 지금의 전력으로 드래곤을 맞상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SS등급의 영웅 브로리가 있다해도…….
띵동.
-그린 드래곤 레피스트 퓨리온이 크리솔라이트족의 향기를 느꼈습니다.
-레피스트 퓨리온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 합니다.
하지만 메시지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마족과 수인 그리고 엘프라니. 굉장히 특이한 조합이로구나. 거기에 익숙한 기운도 느껴지는구나. 크리솔라이트의 아이여.”
허공을 울리는 여성의 묵직한 목소리. 그린 드래곤 레피스트 퓨리온의 목소리가 주위로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윈드라이더의 해치가 열리며 한 엘프 영웅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현 크리솔라이트의 족장 엘 샤난이었다.
“크리솔라이트의 번영을 이끌었던 위대한 수호룡 레피스트 퓨리온 님을 뵈어 영광입니다. 저는 현 크리솔라이트 족을 이끌고 있는 엘 샤난이라고 합니다.”
“현재 족장이라……. 엘 실론은 어떻게 되었지?”
“그 분께서는 아주 오래전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군. 그렇겠어.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군.”
이 황량한 산맥에서 들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과거의 추억들에 퓨리온은 엘 샤난이 편하게 말할 수 있게끔 몸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그 거대했던 덩치가 조금씩 작아지더니만 곧 녹색 머릿결을 한 여성 엘프가 호를 비롯한 일행들의 눈앞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드래곤의 폴리모프인가?”
“우와! 완전 신기해요. 저 폴리모프 마법은 판타지 소설에서만 본적이 있는데, 오빠는 본적이 있어요?”
호가 엑스칼리버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자마자 윤아가 달려와 말했다. 그녀는 굉장히 흥분한 기색이었다.
“예전에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본적은 있지. 가상현실에서. 직접 보는 것은 나도 처음이야.”
“폴리모프 마법. 저도 배울 수 있을까요?”
“아마도? 마법 계열 클래스로 전직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데 갑자기 폴리모프 마법은 왜?”
“아니, 전부 변화시킬 생각은 없고 일정 부위만 좀 바꿔보게요.”
“일정 부위?”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든 대답에 호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 절로 눈동자가 아래로 향한 순간 곧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돌아가게 되면 현대 의학의 힘을 빌리는 게 낫지 않을까?”
“그건 부작용이 있지만, 폴리모프 마법은 부작용이 없다고요.”
“딱히 작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오빠가 직접 안 봐서 그래요. 적어도 벨 언니만큼은 되어야겠어요.”
윤아의 대답에 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확실히 여행은 서로의 관계를 가깝게 만들어주는 모양이었다. 이런 대화도 스스럼없이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여성 엘프로 폴리모프를 한 레피스트 퓨리온은 오로지 엘 샤난에게만 관심을 주고 있었다.
그래도 처음 드래곤이 등장했을 때와는 달리 흉흉했던 분위기가 조금 풀어지자 주위가 조금씩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몬스터와의 접전을 치렀던 전장을 정리하는 모양새였다.
“14소대가 피해를 많이 입었습니다.”
“전력 손실을 입은 17소대와 함께 편성하도록 해. 그러면 조금은 나아지겠지.”
아무리 훗사르가 S랭크 병종이고 마장기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수많은 몬스터들의 공격에서 무사할 리는 없었다. 그래도 기본적인 능력의 차이가 큰 탓인지 큰 피해는 아니었다. 훗사르에게 위협적인 피해를 줄 만한 몬스터인 키클롭스들은 마장기가 먼저 나서서 처리를 한 까닭이었다.
그래도 몇 개 소대는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대다수의 소대들도 자잘한 피해를 입어 호는 새롭게 부대를 재편성해야했다. 다행인 것은 전력의 전부라 할 수 있는 마장기들의 피해는 전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