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
리그너스 대륙전기 184
“지금 인간들이 호심탐탐 우리들의 터전을 노리고 있소. 로즐린의 행동이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에게 책임을 묻는 동안 우리들의 소중한 영토가 사라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엘 카드위드가 라이렉스를 향해 경고하듯 말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이 말을 듣기 원하는 인물은 바로 여왕 엘 유스타시아였다. 그리고 두 장로의 이야기를 듣던 유스타시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인간의 위협에 대해 우리가 대비를 해야 한다는 사실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향한 위협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요새 토갈론이 점령되었습니다. 그것도 우리 엘프 동족의 손에 의해 말이죠.”
“엘프와 함께하는 인물은 윤호라는 소환자라고 합니다. 다행히 그는 토갈론의 요새를 점령한 이후 굳건한 방비태세를 갖추고 있다고 합니다. 더 이상 진격할 뜻을 보이지 않다는 것이지요.”
“왕국 남부의 거점인 토갈론의 요새를 차지했으니 뭘 더 바라겠소?”
카드위드의 말을 듣던 라이렉스가 비웃으며 말했다. 로즐린만 아니었으면 토갈론의 요새가 점령당하는 치욕은 겪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엘 로즐린이 소환자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탓에 엘프 왕국은 붉은 핏빛의 대지를 포함해 크리솔라이트 부족에 대한 영향력도 잃어버렸다.
왕국이 차지하고 있는 영토를 생각하면 얼마 되지 않은 땅이긴 했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동족인 엘프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소환자에게 공격을 당했다는 것은 큰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소환자에게 빼앗긴 땅은 바로 빼앗을 수 있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대규모로 군대를 일으킬 수 있는…….”
“바로 빼앗을 수 있다고요? 당신이 인간의 손에서 우리들의 터전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하는 그 로즐린이 소환자에 손에 패배했습니다. 지금의 이 상황이 바로 그 결과라는 것을 눈으로 보고도 모르시나요? 그뿐입니까? 크리솔라이트 부족은 어떻고요?!”
“옳소. 엘 로즐린 장로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말도 안됩니다! 그 책임을 묻는 동안 우리들의 영토는 누가 지킵니까?!”
두 장로가 열을 올리기 시작하자 두 장로를 지지하는 엘프들 사이에서 말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후…….”
갑자기 난장판으로 변하는 회의장의 모습에 엘 유스타시아는 깊게 숨을 내뱉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있었다.
“일단 엘 로즐린에게 다섯 군단 규모의 병력을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녀가 잃은 마장기도 보충하도록 하지요.”
여왕 엘 유스타시아가 결정을 내리듯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인간의 팔 왕국이 제대로 군사를 일으킨다면 현재 엘 로즐린의 병력으로는 막아내는 게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자신들의 왕국에게로 돌아올 터였다. 하지만 유스타시아의 말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종족의 도발이 끝나고 동부가 안정되는 즉시 그녀를 중앙으로 소환하겠습니다. 크리솔라이트 부족과 시스테인 부족이 저희들에게 등을 돌린 것에 대한 그 책임은 반드시 묻도록 하겠습니다.”
서릿발이 선 그녀의 말에 주위에 있던 엘프들이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엘 카드위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표정에는 불만족스러움이 가득했지만, 여왕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또한 토갈론의 요새와 경계를 맞대고 있는 도시에도 센티널과 군단을 배치하겠습니다. 토갈론의 요새는 수백 년 동안 우리 종족의 안전을 지켜주었던 중요한 거점. 소환자가 차지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하면?”
“토갈론 요새 점령을 위한 군단장으로 로얄 센티널 엘 키세스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키세스?!”
“으음. 그녀를…….”
회의장을 메운 모두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러고는 서로의 눈빛을 마주치며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 키세스. 여왕 엘 유스타시아를 모시는 친위대 카스타네아를 이끄는 인물로 뛰어난 전략과 무용은 엘프 제일이라고 불리는 영웅이었다.
“알겠습니다.”
“여왕님의 의견에 세계수의 축복이 있기를.”
그녀라면 충분히 소환자의 손에서 토갈론의 요새를 탈환할 수 있을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시각, 호는 킬리드의 집무실에서 하나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띵동.
-바토리 갑옷의 연구가 완료되었습니다.
-다음 연구의 선택이 가능합니다.
눈앞으로 나타나는 시스템 메시지에 기술 목록창을 연 호는 훗사르의 양성에 필요한 연구 목록을 살피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다음은 한혈마 연구인가? 후우. 이제 거의 다 끝나가네.”
이번 연구와 함께 살상력이 높은 근접 전투용 무기 연구 개발도 끝내면 드디어 훗사르의 양성이 가능해졌다.
그러면 아벨리우스에 이어 수인의 S랭크 기병도 양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골든 크로우의 재상 그나이 칼츠만과 약속했던 거래도 만족시킬 수 있었다.
“S+등급인 윙드 훗사르까지 양성하는 데 성공하면 자넷 1기를 추가적으로 받기로 했지만…….”
탐이 나는 거래 조건이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연구에 시간을 쏟고 싶지는 않았다. 원거리 포격과 저격이 가능한 엑스칼리버면 모를까 C등급인 자넷급 마장기는 현재의 상황에서는 그리 쓸모 있는 마장기가 아니었다.
‘나도 참 간이 커졌네.’
예전 같았으면 마장기 한 기, 한 기를 얻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했었을 터였다.
실제로 예전에 그나이 칼츠만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때는 마장기 한 기가 소중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연이어 전쟁을 치르고 승리를 거두면서 전리품으로 마장기들을 하나둘씩 획득할 수 있었고, 그런 마장기들을 토대로 지금은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마장기 전력이 구축된 상황이었다.
“그래도 마장기는 제작할 수 있어야 돼.”
호는 자신의 영토에서 개발을 완료한 연구 기술 목록을 바라보았다. 많은 연구 개발을 끝냈지만 아직까지도 호는 마장기 제작 기술을 보유하고 못하고 있었다.
이백여 개에 가까운 마장기 제작 기술 중 개발을 완료한 것은 기껏 해봤자 칠십 개가 채 안됐다.
그것도 골든 크로우와의 연구 협약으로 완료시킨 기술이었고, 그렇게 얻은 기술 역시 당장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심지어 호의 세력은 아직까지도 마장기의 수리를 하지 못해 많은 돈을 지불하고 타임리스 상단의 도움을 받고 있는 형편이었다.
하물며 오랜 자금과 시간을 들여 마장기 제작 기술을 완료했다 치더라도 당장 생산이 가능한 것은 마장기전에서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C등급 마장기가 전부라는 점이었다. 그것도 인간족의 C등급 마장기뿐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리그너스 대륙에서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제대로 된 전력을 증강시키기 위해서는 마장기 제작기술의 보유는 필수나 다름없었다. 그런 와중에 호의 머릿속으로 하나의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인피니티 나인.”
하이엘프 에어리스가 말했던 다른 대륙의 절대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 대륙을 지배하는 일곱 종족의 지배자, 칠제라 불리는 이들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고 했다.
호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그의 눈앞에 썬더 퓨리의 양성 방법에 대해 나오기 시작했다. 인피니티 나인이 사용하는 전략 병기라 불리는 EX등급의 괴물들이었다.
[썬더 퓨리(EX)-제3 파신, 크탈나스의 분신이라 불리는 존재들입니다. 미스릴로 만들어진 대검을 무기로 사용하는 이 마검사는 폭풍처럼 전장을 휩쓰는 존재로 그 위력은 A등급의 마장기를 뛰어넘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정보창에 나타난 썬더 퓨리의 내용에는 그 위력이 A급 마장기를 뛰어넘는다고 나와 있었다. 심지어 등급도 EX등급이었다.
“진짜 A등급 마장기보다 강력한 전력이라면 장난이 아닐 텐데.”
하지만 이 썬더 퓨리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SSS랭크의 병사들이 이만이나 희생시켜야 했다. 정확히 말하면 엘프의 실버문, 마족의 브뤼헤아 비쉬가 각각 만 명씩 필요했다. 그리고 호는 이 이만이라는 숫자 그리고 제물이라는 점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다.
그렇게 썬더 퓨리의 정보를 바라보던 호는 곧 창을 닫고는 발코니를 통해 밖을 내려다보았다.
엘 로즐린과의 전쟁 이후 림드 산맥, 아니 이제는 좀 더 넓어진 호의 영토는 하루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조금씩 경제도시로서의 역할을 해내기 시작하는 디르시나와 함께 성장한 디아린 상단으로 인해 리스의 수입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벌어들인 자금들은 계속해서 다른 도시의 특성화 개발에 사용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또다시 수많은 노예들이 림드 산맥으로 유입되었고, 그들이 영지민으로 편입되어 물건들을 소비함으로써 호의 상단이나 다름없는 디아린 상단의 이익을 늘려주고 있었다.
“호 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영토에서 일어나고 있는 긍정적인 변화를 생각하고 있던 호의 귀로 엘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남성 엘프 하나가 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계속된 설득으로 림드 산맥에 머무르게 된 시스테인 부족의 B등급 엘프 영웅 엘 트라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호를 제외한 유이한 킬리드의 영웅으로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 중이었다.
“손님?”
“네. 지크 로리 소속 리셴르나 휘하의 수인이라고 자신을 밝혔습니다.”
“……리셴르나 휘하의 손님?”
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경계를 맞대고 있는 사이라 그런가? 사신과 비슷한 것을 보낸 모양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호 님께서 보내신 호표기에 대해 리셴르나가 감사 물건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선물은 응접실에 모셔다 두었습니다.”
“선물을? 모셔다 두어?”
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트라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곧 나가겠다고 전하도록.”
하지만 호는 곧 몸을 일으켰다. 어째서 리셴르나가 자신에게 사람을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선물을 줬다니 굳이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아벨리우스의 호위와 함께 응접실에 도착한 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림드 산맥의 패자이자 용감한 영웅이신 윤호 님께 대한 바리안스의 대지의 패자 리셴르나 님의 선물이옵니다. 이 자는 커티삭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붙잡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남성 묘인이 호를 향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한때 커티삭에 머무르고 있던 호 님이시라면 친분이 있을 거라는 말과 함께 리셴르나 님께서 보내신 포로이옵니다.”
“멜리아 비쉬 님?”
그리고 묘인의 뒤에 있는 영웅의 정체를 확인한 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온몸이 쇠사슬로 칭칭 감겨 있는 서큐버스 영웅.
그녀는 한때 커티삭에서 함께 했던 마족 B등급 영웅인 멜리아 비쉬였다.
* * *
호가 킬리드의 영주성을 거닐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런 호의 손에는 몇 개의 서류들이 들려 있었는데, 각 도시의 영주들이 전해온 보고서를 간략해서 정리해 놓은 것들이었다. 붉은 핏빛의 대지에서부터 시작된 마족과 엘프의 전쟁은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인간과 수인에게까지 번져나갔다.
붉은 핏빛의 대지의 바로 옆 영토를 차지하고 있던 호도 예외는 아니었다.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고, 많은 생명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렇게 계속된 전쟁에서 가장 큰 이득을 얻은 종족은 바로 소환자인 호와 수인 왕국이었다.
특히나 호는 토갈론 요새를 포함해 엘프 왕국의 영지 세 개를 손에 넣는 쾌거를 올렸다. 그게 벌써 두어 달 전의 일이었다.
“볼 붸르니체스 각하께서 어째서 너를 위험하다고 느끼셨는지 이제야 알 것 같네.”
갑작스레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호는 몸을 돌렸다. 검은색 날개를 지닌 서큐버스가 아벨리우스들과 함께 서 있었다.
마족의 B등급 영웅인 멜리아 비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