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
리그너스 대륙전기 182
“저, 적이다!”
“어어?!”
“어떻게 된 일이지?”
갑작스러운 소식에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엘프들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전면에 있는 적이 후방에 나타나다니? 적들에게 병력의 여유가 있거나 날개가 달려있지 않은 이상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소환자의 병사들은 아군의 공격조차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날개가 있을리는 더더욱 없었다. 요 몇 번의 전투 동안 적군의 비행병은 단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설령 있다 한들 명사수인 엘프들의 화살 밥이 될 뿐이었다.
“어떻게 적들이 후방에서 나타날 수가 있지?”
“설마 대규모 이동 마법?”
“말도 안 돼. 마나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았다고. 게다가 그런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고위 마법사단이 있었으면 왜 이제까지 나타나지 않았겠어?”
그렇게 엘프들끼리 서로 옥신각신하던 그 때였다.
쩌저저적!
“뭐지?”
“피해! 마법이다!”
땅바닥이 갈라지면서 순식간에 솟아오른 나무뿌리가 엘프들의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빨래를 짜듯 쫘악 엘프들의 몸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살아남은 엘프들도 제법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재빠르게 몸을 피할 수가 없었다. 부대는 개개인이 아니라 집단이었다. 공격을 당한다고 해서 나 혼자만 살기 위해 몸을 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향해 수천 발의 화살이 발사되기 시작했다. 화살의 주인들은 엘 샤난이 지휘하는 크리솔라이트 부족의 정예 에머넌스 아쳐들이었다.
* * *
“적들의 움직임이 이상해요.”
“후방에서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어어어?! 아보르 비테 침묵!”
“……드디어 움직인 모양이네.”
사방에서 들려오는 보고에 호는 침을 삼켰다. 후방에서 엘프들의 군대를 교란시키는 화이트 섀도우 작전. 엘 샤난과 아르윈이 행동을 개시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움직임은 그리 오래가지 못할 터였다.
병력의 수도, 질도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로 인해 엘프들의 군대는 혼란에 빠졌고, 지휘계통은 무너졌다.
“모든 병력. 전방을 뚫는다. 아벨리우스가 전면에 서고 호표기로 돌파하도록.”
호가 눈을 빛냈다. 천금과도 같은 이 기회를 이용해 적들에게 큰 피해를 입혀야만 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난전에 특화된 병력들을 엘프들의 군대로 침투시켜야만 했다. 다행히 들려온 보고 중에는 엘 로즐린의 아보르 비테가 침묵했다는 소식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지휘 능력이 더더욱 빛을 바랄 터였다.
“이기지는 못하겠지만.”
남은 병력을 계산해보면 제법 뼈아픈 피해는 줄 수 있었다. 전쟁은 이제부터였다.
“호 님의 명령이 떨어졌다! 모두 정면을 뚫는다!”
“알르드를 위하여!”
“크아아앙! 호표기들은 뒤로 후퇴한다! 힘을 비축해! 그리고 돌진이 시작되면 모두들 엄마 젖 먹던 힘까지 힘을 끌어 올려! 곧 적들의 심장부로 진격할거다!”
다종족 연합군이라 할 정도로 다양한 종족이 함께하고 있었지만 호의 군대는 인간 왕국 특유의 군대처럼 정련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규칙을 세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의 명령만큼은 모두들 복종했다.
뿌우우우!
콰아아앙!
미노타우르스의 뿔피리 소리와 함께 엑스칼리버의 MLC 가 엘븐 템플러로 이루어진 방어선의 한복판을 정확하게 때렸다. 그와 함께 아벨리우스들이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한시진! 여유가 되는 마장기가 있어?!”
호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지금의 기세를 몰아 상대의 방어선을 무너뜨려야 했다. 전차같이 보병들의 방패가 되어줄 수 있는 단단한 병기가 있으면 금상첨화. 이 세계에서 그런 병기는 마장기 뿐이었다.
“아, 아직! 아니다! 릴라릴라 한 대 정도는 뺄 수 있을 것 같아요!”
“어?!”
한시진의 대답에 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적으로 자신들의 마장기 전력은 엘프들의 마장기 편대에 비해 크게 열세였다. 수를 질로 커버하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오히려 엘프들의 마장기 편대를 상대로 무너지지 않고 백중세를 유지하는 아군 마장기사들에게 감사함을 느껴야 할 정도였다.
사실 마장기를 빼달라고는 했지만, 딱히 기대는 하지 않고서 한 말이었다. 그런데 한시진은 한 대의 마장기를 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호의 의문은 이어진 통신으로 해결되었다.
“엘프들의 마장기 상태가 이상해 보인다. 저번 전투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군!”
“저번 전투라면? 설마 엘 라스엘?”
“그래.”
브로리의 대답에 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마 엘 아르윈이 마장기의 마정석에 무슨 행동을 한 모양이었다.
“크냐앙! 그러면 바로 합류할게요!”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리아 캬베데의 릴라릴라가 자신의 커다란 손을 이용해 엘프들의 병사들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참, 원숭이 같네.”
“전 원숭이가 아니에요!”
별 뜻 없는 한 마디에 리아 캬베데의 날선 대답이 들려왔다. 이 정도면 견원지간뿐만 아니라 묘원지간이라는 말도 생겨야만 할 것 같았다.
“……알아알아. 너 말고 마장기한테 한 말이야.”
대답과 함께 호는 앞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머릿속으로는 앞으로의 전투 상황을 빠르게 그려지고 있었다. 보병을 앞세운 근접전. 거기에 리아 캬베데의 릴라릴라는 커다란 도움이 될 터였다.
릴라릴라는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마장기로 파괴력은 강력하지만 느린 속도로 인해 마장기전보다는 지금과 같은 대규모 전투에서의 아군을 지켜주며 적들의 방어선을 붕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마장기였다.
“좋아!”
호표기의 일점 돌파로도 뚫리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방어를 자랑했던 엘프 군단의 보병들이 릴라릴라가 나서는 순간 수수깡처럼 쓸려나가고 있었다. 여태 저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밀려났던 게 허무해질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이래서 마장기가 전장을 지배한다는 거지.”
정확히 말하자면 복합적인 이유가 작용하고 있었다. 엘프들에게 능력치의 상승 버프를 걸어주던 아보르 비테가 침묵했으며 후방에서 일어난 갑작스러운 사태에 일선 지휘관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나타난 릴라릴라까지. 엘프들의 지휘관 중에 SS등급 이상의 수성의 대가가 있는 게 아닌 한 막아내기란 쉽지 않을 터였다.
“캬아아아악!”
“피, 피해! 마장기다!”
“물러서지 마! 전열을 지켜!”
릴라릴라가 적들의 방어선을 흩뜨려놓자 그 사이로 아벨리우스와 호표기들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네 발과 두 발을 이용해 빠른 속도로 적들 사이에 침투,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로 난전을 펼치는 호표기들의 활약은 짐승 그 자체였다.
띵동.
-<침착하라!> D 랭크가 발동되었습니다.
-<지휘관이 독려> B+랭크가 발동되었습니다.
-<아크 스피릿> A랭크가 발동되었습니다.
-<전장의 노래> S랭크가 발동되었습니다.
호도 가만있지 않았다. 빠른 속도로 전장을 돌아다니던 그는 자신의 스킬로 아군의 능력치를 상승시켜주는 한 편 아군을 공격하려는 마법병단이나 궁병대가 보이면 곧바로 MLC 로 적들을 와해시키고 있었다.
쿠와아아앙!
“……?!”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굉음에 깜짝 놀란 호가 고개를 돌렸다. 굉음은 마장기가 폭발하는 소리였다. 공격이 깊숙하게 들어갔는지 마력 엔진이 폭발한 것으로 보였다. 이는 보나마나 완파 수준이었다. 보나마나 안에 탑승하고 있던 마장기사도 살아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전황이 반전되었고, 로즐린의 군단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전장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빌어먹을!”
분노에 찬 엘 로즐린이 탁자를 주먹으로 거세게 내리쳤다.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전부 몰지각한 배신자들 때문이었다. 바로 크리솔라이트 부족과 시스테인 부족의 병사들이었다.
“피해는 어떻지?!”
“마장기전에서 균형이 무너진 터라 병사들의 피해가 극심합니다. 특히나 후방에서 영문을 모르고 있던 궁병대와 마법사단의 피해는…….”
뒤의 이야기는 듣지 않아도 뻔했다. 거의 전멸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팽팽하게 아니 우위를 점하고 있던 마장기 전력의 균형이 무너졌다. 그 이유는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마정석의 부족. 전투 도중 마정석이 떨어진 마장기들이 상대 마장기사들의 손에 파괴되거나 노획되었다는 것이었다. 가까스로 낌새를 눈치챈 눈치 빠른 마장기사들은 어떻게든 도망쳐 나왔지만 그 수가 두 개 편대, 총 열여섯 기가 채 되지 않았다.
“……크윽!”
부하의 보고에 엘 로즐린은 이를 갈았다. 이 피해는 붉은 핏빛의 대지에서 마족들을 몰아냈을 때보다도 훨씬 큰 피해였다.
“엘 샤난! 이 배신자를! 감히 세계수의 나뭇잎을 져 버리다니!”
마음 같아서는 이 지역에 살고 있는 크리솔라이트 부족과 시스테인 부족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했다가는 림드 산맥은커녕 붉은 핏빛의 대지조차도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이 책임을 져야 할 상대는 필요했다.
“엘 샤난의 배신은 아멘드마의 영주이자 하이 센티널엔 엘 라이린에게 책임을 묻겠다.”
엘 라이린. 그녀는 엘 샤난의 어머니였다. 그리고 로즐린의 부관 중 한 엘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크리솔라이트 부족의 반발이 커질지도 모릅니다.”
“반발?! 흥! 이미 동족을 배신다고 적들에게 붙은 녀석들이다! 반발을 하면 무력으로 진압해라!”
“……알겠습니다.”
엘 로즐린의 서슬이 시퍼런 명령에 부관들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엘 라이린 소환은 뒤로 미뤄져야만 했다. 그보다도 더욱 시급한 보고가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큰일입니다! 커티삭이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제대로 피해를 추스르지도 못한 상황에서 날아온 갑작스러운 비보였다.
“설마 볼 붸르니체스가!?”
“수, 수인족입니다! 리셴르나가 움직였습니다! 그 수는 약 십오만! 커티삭에서 지원을 요청해 왔습니다!”
엘프와 마족, 그리고 엘프와 소환자가 치열한 전쟁을 펼치는 동안 기회를 엿보며 웅크리고 있던 사막의 꾀주머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A, B랭크의 병사들과 두 개 편대의 마장기를 앞세운 리셴르나의 공격에 커티삭은 얼마 버티지 못한 채 그대로 함락되었다. 그 시일은 고작 이틀에 불과했다. 리셴르나의 능력도 뛰어났지만 계속된 전쟁으로 인해 성의 방어 시설이 무너진 게 그런 결과를 만들어내었다.
“크윽!”
커티삭이 함락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엘 로즐린은 크게 얼굴을 구겼다. 까닥하다가는 수인과 소환자 양 쪽에서 협공을 당할 판이었다. 거기에다가 자신의 근거지는 인간의 왕국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영토가 점령당했다는 서신이 날아오고 있는 판국이었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그녀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어어?”
갑작스러운 엘프들의 철수 소식에 운명을 건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던 호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리셴르나가 커티삭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눈을 부릅떴다. 엘 로즐린의 철수는 단순한 연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로 자신들의 영토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었다.
“그것도 붉은 핏빛의 대지를 버려두고 말이지.”
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엘 로즐린의 군대가 없다면? 붉은 핏빛의 대지는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엘프와의 사이는 틀어질 대로 틀어진 사이. 자신이 공격을 감행해도 큰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크리솔라이트 부족과 시스테인 부족을 끌어들인다는 명목을 내세울 수도 있었다.
자신이 보유한 마장기 전력과 살아남은 정예병들이라면 영지를 지키는 소수의 엘프들은 어렵지 않게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까지 두들겨 맞았는데, 어느 정도 보상은 받아야 하지 않겠어?”
그리고 엘 로즐린의 군대가 붉은 핏빛의 대지에서 철수를 하자마자 호는 코르다로 군대를 진군시켰다. 점령은 순식간이었다. 엘 샤난을 앞세운 순간 코르다의 엘프들은 곧바로 호에게 투항을 했다.
아멘드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모든 일이 순조롭게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어, 어머니?!”
“샤난!”
끈 떨어진 인형처럼 무너지듯 쓰러지는 엘 샤난을 호가 재빠르게 붙잡았다. 그러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멘드마의 영주이자 하이 센티널인 엘 라이린이 엘 로즐린의 분노를 피하지 못하고 처형을 당한 것이다.